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중국의 개량형이라 할 만큼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용의 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점에 주목해 해석한 의미이다. 중국과 한국이 대륙과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한자문화권의 영향으로 한·중간의 외교와 문물왕래를 통한 문화교류가 학문과 예술사조 전반에서 나타난다. 원나라때 성리학의 계승이나 송대 목조건축에 의한 우리 목조건축의 발달, 당대 남종화풍의 영향은 우리 미술사에서도 발견된다. 과거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인해 문인들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원림의 소재가 되는 꽃과 나무의 경우도 중국의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발달한 백과사전류에서 나타나는 꽃과 나무에 대한 출전분석을 통해 중국의 것을 인용한 사례에 주목하여 그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나름대로 독자성을 추구했던 농서분야의 경우에도 농사 직설은 중국의 풍토와 다른 우리나라에 실정에 맞게 편찬된 농서였으나 우리나라 역시 지역의 풍토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양반사회 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꽃과 나무들에 대한 내용들을 포함 한 백과사전류에서는 어떠한 특성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서는 꽃을 다룰 때 대부분 송대의 화훼서가 인용의 주를 이루고 있는데 중국 송대는 당대에 등장한 화훼서의 영향으로 민간인들에게도 화훼가 가장 유행했던 시기이다. 대나무 심는 법을 자세히 기록한 월암종 죽법에 보면 “도랑을 깊고 넓게 파고 말린 마분과 고운 진흙 을 고루 섞어 높이 1자 정도로 메운다. 마분이 없으면 간겨를 대용해도 된다. 여름철에는 성글게, 겨울에는 빽빽이 채운 다음에 대나무를 심는다.” 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자세한 재식방법의 서술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따라할 만한 비법으로까지 통했다. 또 양반의 서화취미와 관련되어 꽃과 나무의 격을 품평하는데 있어 해당 종의 생육조건을 아는 것은 형태와 그 의미를 발굴하는 기초적 소양이 되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예원지편에는 명나라 왕상진의 군 방보, 박주목단사, 낙양목단기 등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낙양에서 유명한 모란의 인기는 조선시대에도 유행하였다. 특히 임원경제지에는 금화경독기의 인용도 많이 등장하는데 이 책은 중국의 것이 아닌 서유구의 저작으로 중국 것과 비교하여 우리 풍토에 맞도록 새롭게 적용한 것이다. 과실수와 조경수목을 다룬 임원경제지 만학지에는 역대 중국 약학서를 집대성한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 명나라 왕상진의 군방보, 당나라 곽탁타의 종수서, 양안 상순의 화 한삼재도회, 명나라 광번의 편민도찬, 명나라 서광계의 감 저소 등이 주요 인용서로 제시되었다. 백과사전류의 집필유 행에 의해 해당분야 지식기반이 풍부해지자 당시 관련 중국 책자와의 비교를 통한 현지적용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꽤 오래전 부터 있었던 사실이다. 일찍이 15 세기에 화훼류를 집성한 작은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강 희안의 양화소록에는 원나라 거가필용사류전집이 다수 인용되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은 중국의 출전을 그대로 인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관찰한 우리나라 환경을 적용해 자세히 그 차이점을 일러주고 있다. 동생인 강희맹도 같은 경향을 띤다. 그들은 식물에 대해 설명할 때 먼저 폭넓게 수집한 전거들을 인용했다. 이는 당시 학문의 성향이 출전에 의해 그 근거를 대는 것을 기본교양으로 삼았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화목을 가꾸는 것과 감상하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도야하는데 필요한 수단이였으며 유학의 격물치지와 그 맥을 함께 한다. 당시 중국의 꽃과 나무에 대한 책자들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먼저 지식인층이 중국에서 유행한 문화와 그 본보기로 책자들을 수용한 후, 이를 탐독하여 현지풍토에 맞춘 창의적 개량을 한 것을 세상에 백과사전류의 편찬을 통해 내놓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임원경제지와 같은 시기에 유희의 물명고와 같은 사전형 식에도 초와 목이 소재로 등장한다. 백과사전류의 편찬유행에 영향을 준 것은 이용후생의 실 학적 사상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당시 조선은 공법과 도량형이 표준화되지 않았고 모든 행위와 공정에 체계가 없는 상태 였고 재료에 대한 지식 또한 없었던 점은 중국의 것을 적극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되었다. 중국에서 먼저 유행 한 문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이러한 지식을 조선에 먼저 전하려 한 선구자적 입장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문물을 전문으로 수입하는 상인세력과 함께 발달하게 된다. 실학파의 입장에서는 실사구시의 형태로 본격화 되면서 꽃과 나무의 이름 붙이기와 품종의 구별, 의미를 따지는 품 평이외에도 파종이나 접붙이는 법, 재배나 재식 등과 관리 도 총망라되는 실용적 전문서 경향도 보이게 된다. 조선시대 꽃과 나무를 다룬 백과사전류들은 중국책에서 얻은 견문을 활용하고 당대의 관련 정보를 집대성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환경에 맞춘 독특한 식생이나 전통지식을 덧붙이는 도구로 사용되어 그 편찬과정을 반복하면서 당시 정원경영과 원예유행의 지식기반으로 작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