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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谷 成運의 「南溟先生墓碣」에 대한 小考 KCI 등재

A Study on Nammyeongseonsaengmyogal by Daegok Seong Woon

대곡 성운의 「남명선생묘갈」에 대한 소고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290814
  • DOIhttps://doi.org/10.14381/NMH.2015.03.3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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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이 글은 대곡 성운이 쓴 「남명선생묘갈」을 중심으로 남명의 삶을 살핀 것 이다. 이 묘갈은 남명 관련 여타 비지문 중에서도 특히 ‘남명의 기상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칭송받았다.
대곡은 남명의 평생 知己였다. 때문에 묘갈에서도 언급하였듯,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남명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상 속 남 명의 모습이었다. 특히 학문하는 자로서의 일상적 모습과 스승으로서의 특징 적 면모를 묘갈에서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일상 속의 모습’이었을까. 남명과 대곡은 당대의 대표적인 재야지식인이었다. 출사하지 않았기에 兼善天下의 공적은 없었지만, 獨善其身의 처세를 통해 후인에게 출사인 못잖 은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철저한 자기 학문에 근원을 둔 재야지식인으 로서의 삶이었다. 두 사람이 보여준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이러한 삶은 ‘일상 의 모습’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두 사람이 가장 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외형적 처세에서 그 유형을 달리 하였다. 따라서 그동안의 연구가 두 사람을 같은 층위에 놓고서도 서로 상대적인 방향에서 접근하기도 하 였다. 남명은 보다 외향적인 측면에서, 대곡은 남명에 비해 내향적 측면에서 의 접근이었다.
그러나 후학들의 이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생전엔 평생의 지 기였고, 사후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 벗으로 인식되었다. 그 기저엔 바로 대곡의 이 묘갈이 있었다. 남명에 대한 대곡의 그 허여지점, 곧 삶의 유형이 다소 달랐을 뿐 당대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드러내려고 의도하지 않았 기에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지만, 그들만은 서로를 허여하였던 것이다.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Nammyeongseonsaengmyogal by Daegok Seong Woon among the tombstone writings for Nammyeong Jo Shik. The myogal(a small round tombstone) was praised as "the best expression of Nammyeong's spirit" of all the tombstone writings for him.
Daegok was a lifetime friend of Nammyeong's and exhibited Nammyeong in daily life in an intensive manner in the myogal, putting a special emphasis on his aspects in daily life as a scholar and his features as a teacher. Why did he put a special emphasis on them?
Both Nammyeong and Daegok were representative intellectuals not in a government position those days. Since they did not go into government service, they received no visible attacks that the world could notice. However, they exerted as much influence on later generations as those who went into government service by leading a life of stepping back and cultivating themselves. It was a life as an intellectual not in a government position with a root in thorough self-study. Such a life as an intellectual not in a government position demonstrated by the two was clearly confirmed in "their aspects in daily life," which they shared most between them.
They tookdifferent types of external conduct of life, which is why previous studies took approaches in different directions from each other while placing them on the same hierarchy. They approached Nammyeong in an extroverted aspect and Daegok in an introverted one.
In spite of those viewpoints of later-generation scholars, however, the two were lifetime friends before death and considered to have understood each other best after death. The base of the perception is Daegok's myogal. There were small differences in types of life between them or Daegok's Heoyeojijeom for Nammyeong, but they were in the same direction in terms of self-identity establishment as intellectuals not in a government position. They did not intend to reveal it, which was why few people recognized it. It is, however, apparent that they allowed each other.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작성 및 立碣 과정
 Ⅲ. 대곡이 인식한 남명의 모습
 Ⅳ. 在野知性으로서의 舍藏的 삶
 Ⅴ. 나가며
저자
  • 강정화(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HK교수·남명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Kang Jeong-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