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南冥神道碑와 後世 儒林들의 論難 KCI 등재

After Generations’ Denunciation on Stone Tablet of Nammyeong

남명신도비와 후세 유림들의 논난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298598
  • DOIhttps://doi.org/10.14381/NMH.2013.12.30.119
서비스가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의 사후 그의 생애를 기록한 여러 傳記文字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神道碑는 여느 인물들과는 달리 네 개나 존재한다. 신도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1609년 남명이 領議政에 追贈됨으로 해서 당시 대표적인 제자라 할 수 있는 來庵 鄭仁弘이 神道碑를 지었다. 그러나 1623년 仁祖反正이 일어나 來庵이 처형되자, 죄인이 지은 神道碑는 둘 수 없어 즉각 없애버렸다.
다시 神道碑의 글을 받아 세울 필요가 있을 때, 남명의 손자 曺晉明이 謙齋 河弘度에게 請文했다. 겸재는 자신은 지을 수 없다는 뜻을 표하였다. 대신 西人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志節로 널리 알려진 淸陰 金尙憲에게 請文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淸陰은 지어주지 않았다. 당시 남명의 弟子나 後學들로 주축을 이루었던 大北派가 몰락한 직후라 南冥學派는 매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겸재는 南冥學派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西人들과 제휴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西人 가운데서 영향력이 있는 淸陰에게 청문하도록 주선했던 것이다.
淸陰이 지어주지 않자, 당시 南人의 영수였던 龍洲 趙絅에게 청문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지어주지 않았다. 그 뒤 용주보다 후배로 南人의 영수인 眉叟 許穆과 西人의 영수인 尤庵 宋時烈에게 청문하여 두 편의 神道碑文를 받았다. 그 당시는 德川書院을 南人들이 주도하였으므로 南冥의 묘소 밑에 眉叟가 지은 神道碑를 세웠다.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나중에 三嘉 龍巖書院의 廟庭碑로 세워졌다. 1764년 『南冥別集』을 만들어 南冥에 관계된 附錄文字를 수록할 때도 眉叟와 龍洲가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었지만,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지 않았다.
처음에 南人의 영수와 西人의 영수에게 南冥의 碑文을 동시에 받은 것이 論難의 발단이었다. 두 사람은 學問의 方法이나 文章體裁가 다르기 때문에,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그 碑文은 처음부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眉叟는 스스로 ‘漢나라 이후의 글은 안 본다’라고 선언할 만큼 六經에 바탕한 古學 위주의 학문을 했고, 文章도 아주 簡明하면서 含蓄的이었다. 반면 尤庵은 철저한 朱子學 신봉자였고, 문장도 朱子처럼 내용 위주의 雄渾, 質朴한 文體를 즐겨 사용하였다.
南冥의 후손들은 애초에 어느 특정 黨派에 얽매인 것은 아니었지만, 眉叟가 지은 神道碑文에서, 제목을 「南冥先生神道碑」라 하지 않고 「德山碑」라고 한 점 , 南冥이 學問淵源이 없이 독자적으로 一家의 學問을 이룬 것처럼 서술한 점, 氣節만 강조한 점, 이미 처형된 鄭仁弘의 이름을 비문에 특별히 기록한 점, 자손을 수록하지 않은 점 등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南人系 儒林들이 眉叟를 워낙 尊崇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진 南冥 후손들은 어쩌지는 못 하고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그러다가 眉叟가 南冥을 존경하지 않는 느낌을 주는 내용이 담긴 「答學者書」를 남명 후손들이나 西人系列의 인사들이 입수하여 보게 되자, 眉叟가 지은 神道碑에 대한 불만이 더욱 크게 고조되었다.
1879년부터 勉菴 崔益鉉, 淵齋 宋秉璿, 心石齋 宋秉珣, 老栢軒 鄭載圭 등 老論系 學者들이 眉叟가 지은 神道碑文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尤庵이 지은 神道碑를 칭찬하자, 南冥 後孫과 西人系 儒林들은 尤庵이 지은 碑文을 세울 운동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眉叟가 지은 南冥 神道碑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남명 후손들이 1926년에 이르러 眉叟가 지은 神道碑를 넘겨 버렸다.
그러자 南人들은 南冥 후손들을 대대적으로 성토하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大邱覆審院에까지 가는 5년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1차 2차 소송에서는 남인들이 이겼지만 최종심에서는 曺氏들이 이겼다고 한다*. 眉叟가 지은 神道碑는 다시 서지 못 했고, 묘소 밑에는 尤庵이 지은 神道碑만 서 있게 되었다. 두 비석이 다 특징이 있고, 濟南 河經洛의 條卞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면 眉叟가 지은 碑文도 큰 문제가 없지만, 이해하기 쉽고 南冥을 尊崇하는 점은 尤庵碑가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네 개의 南冥神道碑는 각각 특색이 있고, 또 그 撰者들은 모두 학문적으로나 영향력에 있어서 당대의 최고의 인물이었으므로, 오늘날 와서 보면, 남명을 연구하는 데 네 개의 신도비가 있는 것은 오히려 크게 도움이 된다.

Nammyeong Jo Sik was great scholar in Chosun Dynasty, ranked together with Toegye. He has teached many disciples, they have was distributed over the whole country. They very respected their master Nammyeong, so after Nammyeong’s death, they carried out memorial project as erecting shrine, building Stone Tablet. Typically only one stone tablet was built for a famous people, but four stone tablet was built for Nammyeong.
Who wrote sentence of the stone tablet were Jung Inhong, Chogyeong, Heo Mog, Song Silyeol. They all were renowned scholars. Among them Heo Mog and Song Silyeol were contrast in the way of the study and the recipe of sentence. Plus, their parties was different. Heo Mog belonged to South party, Song Silyeol belonged to East party.
Deogchun academy which sacrifice Nammyeong were driven by South party that hailed Heo Mog as chief. Because the stone tablet written by Heo Mog was built The way to of Nammyeong’s bomb. But the stone tablet written by Song Silyeol can not be built The way to Nammyeong’s bomb.
While The contents of Stone Tablet written by Heo Mog were stirred up Nammyeong descendants’ complaints. On the other hand, the contents of Stone Tablet written by Song Silyeol was greatly welcomed by Nammyeong descendants. Through many controversies, finally in 1926, Nammyeong descendant had erected the stone tablet written by Song Silyeol, had got rid of the original stone tablet written by Heo Mog. Because of this issue the relationship between South party and East party have been more disconnected.
As a result, four stone tablet of Nammyeong which left to present period will provide us with more material benefits.

목차
Ⅰ. 서론
Ⅱ. 南冥 대상의 傳記文字 槪觀
Ⅲ. 眉叟와 尤庵 所撰 神道碑에 관련된 論難
Ⅳ. 결론
저자
  • 許捲洙(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겸 남명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허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