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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明使行과 對日使行에 보이는 異端 論爭의 樣相 KCI 등재

The Influence of Diplomatic Trips to Ming upon How Joseon's Envoys to Japan Understood the Japanese Confucianism

대명사행과 대일사행에 보이는 이단논쟁의 양상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279961
  • DOIhttps://doi.org/10.14381/NMH.2014.09.30.4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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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조선은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불교식 사회사상을 비판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었고, 고려의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단으로 지목되었으며, 불교 이단성의 비판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문이 유입되었고, 당시 명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도 매우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그런데 이 양명학 역시 주자학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단성이 지적되었는데, 주된 비판의 내용은 불교와의 유사성이었다. 명나라로 사행을 간 조선인은 명나라 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양명학의 공부 방식이 참선의 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하였으며, 양명학은 선학(禪學)이라는 명제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일본의 유학이 아직 맹아 상태일 때, 경전을 논하는 이들은 주로 승려 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이들의 이단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의 유학이 성장하여 고학 등이 등장하였을 때 조선인은 양명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사행에서의 양명학 논쟁 경험이 일본 유학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1764년 일본에 번성하는 고문사학의 경향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서야 일본 유학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비판의 논점이 불교 유사성에서 경전 이해의 오류로 옮겨갈 수 있었다.

The Joseon Dynasty was founded for the purpose of realizing Neo-Confucianism in the royal politics. From the early stage of the national foundation, Joseon advocated "Pro-Confucian / Anti- Buddhism" policy, with obvious criticism on Buddhist social philosophy of Goryeo. Buddhism, which had been the foundation for the Goryeo Kingdom, fell to an object of criticism as a cult, which formed the basis of implementing the "Pro –Confucian / anti -Buddhism" policy. In the process of Neo-Confucianism naturalized in the 16th century, there were diverse studies adopted, of which the Doctrines of Wang Yangming was one transmitted from Ming, where it was flourishing, into Joseon at an early stage. The Doctrine of Wang Yangming was then put to critique on heathenism in the process of clarifying its purity in the Doctrines of Chu-tzu, main reason for criticism being similarity with Buddhism. The Joseon envoys to Ming pointed out, in their arguments with Ming's scholars, that the study methods of neo-Confucianism were similar to those of Zen meditation, as the proposition that neo-Confucianism was a theory of zen was being a known fact among Joseon scholars. While the Japanese confucianism in the 17th century was still immature, it was mainly Buddhist monks that argued about scriptures, and it was commonplace for people from Joseon to criticize their heathenism. When the Japanese Confucianism grew into Gohak, the people from Joseon viewed this new trend from the perspective as an extended neo-Confucianism. As a consequence, their experiences of arguing on neo-Confucianism in their diplomatic trips to Ming hindered them from correctly understanding the Japanese Confucianism. Not until their realization of the seriousness of the trends of Gomunsahak flourishing in Japan in 1764, was the reality of the Japanese Confucianism appreciated, and the criticism shifted its direction from similarity with Buddhism to errors in interpreting the scriptures.

목차
Ⅰ. 머리말
 Ⅱ. 대명사행에 보이는 성리학 논쟁의 양상
  1. 조선전기 불교에서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비판
  2. 대명사행에 보이는 양명학 비판의 배경
 Ⅲ. 일본에서의 성리학 논쟁의 양상
  1. 16세기 일본 불교에 보이는 유연한 태도
  2. 일본 유학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시각
 Ⅳ. 맺음말
저자
  • 구지현(선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Koo, Jeahy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