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靑銅器學報 제26권 (p.33-73)

靑銅器時代 智佐里聚落의 形成過程과 社會相

The Formation of Jijwari-Settlement in Bronze Age and its Society
키워드 :
확대가족,세대공동체,단혼가족,구획된 취락,혈연공동체,송국리유형취락,extended family,multi-household family,nuclear family,demarcated settlement,consanguine community,Songguk-ri style settlement.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遺構의 編年
Ⅲ. 聚落의 主要 要素
Ⅳ. 智佐里聚落의 變遷 過程
Ⅳ. 맺음말
참고문헌

초록

지좌리유적의 유물 분류를 통하여 순서배열보충법으로 편년한 9개 단계(Ⅰ~Ⅸ기)를 이용하여 주 거지-수혈-구의 상호 층서ㆍ공간중복의 관계를 살펴서 시기가 불확실한 유구의 시간성을 보완하였 다. 이 결과를 취락의 변천과정을 살피기 위해서 5개의 期(一~五기)로 묶었다.
지좌리유적은 청동기시대 BC.10~6c.에 하천 충적지에 입지하는 山間聚落으로서, 제Ⅴ기에는 취락 전체가 침수되는 큰 수해를 입은 것이 판명되었다. 최초 一期부터 上ㆍ下區 2개의 구역으로 분리 되어 가옥이 형성되었다. 하구에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확대가족 가옥인 세장방형주거지를 중심으로 대형과 중형 가옥이 다수를 차지한다. 반면에 상구에는 배후습지에 수로를 굴착하고 단혼가족의 소형 가옥이 중심이다. 두 구역 모두 2~4동의 가옥으로써 世帶共同體를 이루는 특징을 보이며, 각 구역 내 에서도 주거지는 2~4개소로 분할된다. 주거지의 규모나 수에 있어서 하구가 상구보다 우월하지만, 취락 대표로서의 대형가옥은 하구에서 二期에 먼저 출현하였고, 상구에는 마지막까지도 세대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三期이후에는 수해를 입은 탓에 다시 一期의 마을 형태로 복귀하였고, 세대 공동체가 분화하여 단혼가옥과 1동의 대형가옥으로 구성하는 형태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각 구역을 통합하지 못한 채 분할은 지속되었으므로, 결국 수장의 출현은 이루지 못하였다.
무덤은 하구에서만 확인되는데, 수해 이전에는 남단부에 2기, 五期에는 북단부에 1기를 조성하였 다. 전자는 수렵채집문화권의 묘제로서 부장품은 없었고, 후자는 석검ㆍ석촉을 부장한 석관묘였다. 무덤이 지속적으로 조영되지 못한 것도 수장사회를 이루지 못하였던 까닭일 것이다.
지좌리취락은 소하천 변의 한정된 농경지(밭)를 경작하였으므로 주변 산지의 채집경제에도 크게 의 존하였을 것이다. 산뿌리 쪽으로는 논 경작을 했다고 해도 집약농경으로써 잉여생산을 도모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취락이 전기의 혈연적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또 정치체의 중심인 특정 엘리트가 없이, 혈연적 가족단위의 생산공동체가 지속된 사회였다고 추정된다.
대외관계는 하천의 하류 13㎞ 거리에 위치하는 거점취락 송죽리유적과의 교류가 상정되며, 후반대 에는 주변의 중국 북방계와 일본 야요이계 문화도 유입되었다.
Jijwa-ri Site, formed and flourished from BCE 10 to 6 at an alluvial land, was significantly damaged by the flood, which overwhelmed the whole settlement in the third period. From the first period, houses at Jijwa-ri had been formed in the upper and lower areas demarcated separately. The lower area had been mostly occupied large or mid-sized houses forming a narrow and rectangular residential district typical for the early bronze age extended families. On the other hand, the upper area, surrounded by the waterways excavated at the rear wetland, had been occupied by small houses for nuclear families. Both areas show the tendency that 2~4 separable houses were gathered together to create a certain form of residence for the extended family, called multi-household family, and there were 2~4 separable residential districts in each area. The lower area had bigger residential districts and the greater number of houses than the lower. But it was also in the lower area that a huge house independent from multi-household families was first built in the second period whereas houses in the upper area continued to exist as the members of multi-household families until the end of this period. However, passing the third period where a huge flood occurred, the form of residence returned to that of the first period, and after then, the Jijwa-ri settlement has never built a single huge house but remained in the form of mid-sized or small houses for nuclear families differentiated from multi-household families. Due to this differentiation without integration, it could not have been developed into a chiefdom. Graves have been discovered only in the lower area: two on the southern side formed in the second period, one on the northern side in the fifth period. The first two are in a style typical for hunting-gathering culture with no burial goods excavated. The later is a sarcophagus tomb where stone swards and arrowheads have been discovered. It may also be because of the lack of chiefdom that more tombs could not have been built there. It is also assumed that the settlement communicated with Songjuk-ri Site, a foothold settlement 13km away to the south along the river. In the later periods, northern Chinese culture and Yayoi culture from Japan might also be flowed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