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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재(含忍齋) 정국채(鄭國采)의 생애와 우암학(尤庵學) 수용 KCI 등재

Life of Haminjae(含忍齋) Jeong Guk-chae(鄭國采) and his acceptance of Studies of U-am(尤庵學)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95126
  • DOIhttps://doi.org/10.35203/EACT.2020.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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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화와 사상 (East Asian Culture and Thought)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동양학연구소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초록

경상우도에 연고를 둔 함인재 정국채는 19세기 전반을 전후로 한 시기를 주요 활동기로 삼았던 노론 계열의 재야 유학자다. 남명학파의 본산 지역에서 자신의 학적⋅이념적 소속을 노론계로 정위시킨 사실도 독특하지만, 정국채의 경우 정주학과 농학 및 예학 등과 같이 제 범주를 아우르는 학문세계를 개척한 정황 또한 매우 이채롭게 여겨진다. 그러나 정국채가 남긴 문집인 『함인 재유고』가 학계의 공적 담론의 장에 접속되지 않은 채 사실상 미공개의 상태를 유지해 왔던 까닭에,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금번 논의에서는 정국채가 향유한 생애의 연대기적 추이를 추적해서 개괄해 보임과 동시에, 특히 그의 학문세계 형성에 관여하였던 두 스승인 성담 송환기와 경호 이의조 간에 교차된 학문적 영향력의 문제를 논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간 축적된 가학의 토대 하에, 42세에 대면한 송환기의 문하에서 정국채는 정주학 전반에 걸쳐서 질적으로 도약하는 심화 학습의 계기를 맞이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송환기의 5대조인 송시열이 수립한 우암학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국면으로 이행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한편 이의조와의 대면을 통해서 정국채는 그의 학자적 정체성을 예학자로 정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정국채는 지리한 『가례증해』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사례촬요』를 저술하기도 했으나, 이의조에게 전한 서신들은 예학이 형성된 연원의 일단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송환기가 매개가 되어 우암학의 계승자로 나선 정국채는 『송자대전』과 송시열의 「연보」를 숙독하는 한편, 주변의 동문들에게 우암의 저술을 필독 할 것을 적극 권유하는 열의를 발휘하기도 했다. 송시열 이상으로 『주자대전』을 예찬하곤 했던 정국채는 성주에 건립된 노강서원의 사액 문제에도 큰 관심을 표했는데, 이 또한 우암학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노론계의 도통 계보를 중시한 결과였다. 송환기 사후에 스승을 노강서원에 추배하기 위해 노력하고, 문집 간행을 위해 주도적인 희생을 기울였던 정황 또한 우암학을 적극 계승하려는 의지와 필적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Jeong Guk-chae, born at Gyeongsangu-do(慶尙右道), Jeong was a Noronleaned( 老論) Confucian scholar whose main activity was done out of office in the early 19th Century. In his case, not only unique was the fact that he attributed his academic and ideological belonging to Noron group at the home of Nammyeong school(南冥學派), but it seemed extraordinary that he explored the academic world encompassing Ch'eng-Chu Neo-Confucianism(程朱學), agriculture (農學) and Yehak (禮學, study on manners from Confucian tradition). This discussion traced and summarized his life and at the same time explained academic influence of his two teachers Seongdam(性潭) Song Hwan-gi(宋煥箕) and Gyeongho(鏡湖) Lee Ui-jo(李宜朝) who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his academic world. As a result, the study found he could experience in-depth learning in overall Ch'eng-Chu Neo-Confucianism as a student of Song Hwan-gi and transformed himself as the successor of Theory of U-am established by Song Si-yeol (宋時烈). Meanwhile, following his meeting with author of GaryeJeunghae(家禮增 解). Lee Ui-jo, he started to walked the path as a Yehak scholar(禮學者). Jeong Guk-chae, becoming the successor of Theory of U-am, read Songjadaejoen (宋子大全) and chronology in detail(年譜) and was so passionate as to recommend his friends and family to read the books of Song Si-yeol necessarily. Jeong Guk-chae, who highly admired and praised Jujadaejeon(朱子大全), also expressed his keen interest in the issue of plaque of Nogang Lecture Hall(老江書院).

목차
논문 초록
Ⅰ. 드는 말
Ⅱ. 생애의 연대기적 분포
Ⅲ. 우암학(尤庵學)의 수용의 두 국면
Ⅳ. 결 론
<참고문헌>
Absract
저자
  • 김종수(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 | Kim Jong-su (Visiting Fellow at Uam Research Institute, Chungbuk National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