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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isorhyme is an important part of Chinese phonology research. The research into Chinese isorhymes performed in the Korean Peninsula is also no less important, especially from the perspective of East Asian Linguistics. It is of great value to understand the content of isorhymes in the Korean peninsula for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 of isorhymes abroad. By collecting and sorting the research materials on Korean isorhymes and phonology in the past 50 years, this paper analyzes the characteristics and values of studies on Chinese isorhymes in the Korean Peninsula. It summarizes the application of ancient phonology theory, the study on a phonological model of Shengyin Changhetu (《聲音唱和圖》 ), Qieyun (《切韻》 ) and related rhyme books, and studies on rhyming in the three dynasties of Song, Ming, and Qing. In the final analysis, it is concluded that considering the history and current situation related to the studies on Chinese isorhyme in the Korean Peninsula, the fundamental research into the equivalence prosody is of great value.
        5,500원
        2.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당대시인들은 언어의 “생소화”에 상당히 집착했다. 어법적 생소화가 바로 시어의 생소화 신드롬이 당대를 풍미한 이유는 시가 권력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궁정창화와 과거는 시와 권력이 결합한 “현장”이었다. 당대 초엽은 궁정창화가 시의 발전을 견인했고, “以詩取 士”가 확정된 중엽부터는 과거가 시의 번영을 강력하게 추동했다. 응시자의 신분제한이 철폐 되면서 시인층도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에 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시의 경쟁은 번영 을 낳았다. 시어의 생소화는 번영의 단면이다. 당시의 어법적 생소화는 주로 근체시에서 목도 된다. 특히 근체시에서 가장 미학적 연이라고 일컬어지는 2연과 3연에 나타난다. 어순의 도치 와 문장성분의 생략은 생소화의 전략이다. 어법적 도치는 앞으로 환위된 요소들이 전경화 효 과를 가진다. 문장성분의 생략은 독자의 상상력이 다양하게 작동할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시 정을 풍부하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4,900원
        3.
        201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德瑛, 主要活動在淸乾隆年间,乾隆元年壯元第一, 却終身官止四 品,而其人品學德均佳, 被衆人所敬佩, 後學追從者甚众,作品丰富多材,自成独特的文学风貌。由金德瑛的诗歌集≪桧门诗存≫, 可見他的人生轨迹 和生平经历,所到之处、所感之事。本稿集中探討就≪桧门诗存≫中<觀劇 絶句>三十首, 所謂≪檜門觀劇詩≫, 從中闡明他的文學觀及戱劇觀所在如 何。 乾隆盛世,戏曲艺术得到长足的发展,观剧诗的创作在这一时期具有独 特的文学意义。金德瑛的《檜門觀劇詩》是这一时期观剧诗的代表,其中明 确表达了诗人“咏史”的戏剧观:“稗官院本,虚实杂陈,美恶观感,易于通 俗,君子犹有取焉。其间亵呢荒唐,所当刊落。今每篇举一人一事,比兴讽 喻,咏史之变体也。”《檜門觀劇詩》中收录的观剧诗或记事或写人,均以 史笔传达兴亡之感借他人酒杯浇自己之块垒。观剧诗的价值定位存在于两个 层面:一是助益于文学批评史的不足之處,观剧诗一身兼二职,既是对戏剧 的审美接受,同时又是对戏剧的再传播;二是观剧诗并不是戏剧作品的衍生 品,创作主体通过诗歌表达戏剧观念,知识阶层对其接受、鉴赏的同时也有 唱和作品产生,形成了自足性兼發性互動性的文化現象。金德瑛的观剧诗传 承至今,其间不乏文人唱和、评点之作。至光绪以后,雖是戏剧趋向案头 化,而观剧诗的创作自有主張,叶德辉、皮錫瑞、易顺鼎等人敢於試圖对观 剧诗创作的唱和,使得唱和观剧诗成为清中後期戏曲审美内涵演绎的別格。歷來观剧诗的传播和接受, 皆被文人士大夫所重視,而观剧诗的基本功 能也與小说戏曲泂異, 尤其是观剧诗的接受階層比較狹小,因此难免会呈现 意識形態的貴族化傾向。同时限于诗歌篇幅較小,对戏曲的评论和论述有时 不能全面深入,缺乏对戏曲的艺术内涵及社会透視。 总之,金德瑛的觀劇詩與其諸家的和詩能够反映出淸代中後期的文学傾 向,并表达出艺术特征以及重敎多訓的歷史意識, 對當時崑花相競的劇壇大 有啓發性, 戏曲主題雅化的进程有所推动,使得南北地方戱更加提高其存在力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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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필담과 창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자를 공통 언어로 사용하는 동아시아의 국가들 사이에는 다른 문화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양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음성언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때 문자언어인 ‘漢字’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바로 筆談과 唱和이다. 이 둘은 국가 간의 교류, 사 신들과 문사들, 여행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역관을 통하지 않은 채 커뮤니케 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서툰 역관보다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리 고 필담과 창화는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문학행위로 漢文을 수 단으로 한 문명의식, 유대의식의 표출이라는 점과 상호교류의 역할을 한다는 동질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한정된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므로 뛰어 난 문필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도 동일하다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필담과 창화는 쓰이는 경우가 다르다. 우선 筆談은 문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의사 교환 수단으로 散文형식이 일반 적이나, 唱和는 운율을 가지는 시의 화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대화 형식으로 韻文형식이 일반적이다. 필담은 문장도 ‘問’,‘答’의 형식으로 나누어져 궁금증을 묻 고 답하는 형식이지만, 창화는 次韻의 형식을 빌려 대화가 이루어지며 시문창작 이라는 결과물까지 나오게 된다. 그리고 필담은 상대에 대한 정보탐색과 전달의 기능을 한다. 통신사의 주된 임무가 적정탐색이었고, 임무 수행에 필연적으로 필 담이 主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와 관련된 것은 절대 엄금이었으므로, 필담에 남아있는 내용은 대체로 私的인 주제가 많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물이 나 지식을 교환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고 필담은 외국인끼리 외교와 교류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며, 누구와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통의 경우는 조선의 사신(특히 三使중 製述官, 書記등이 主)이 일본의 문사나 관리와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이나, 行中과도 가능하며 多者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이기도 했다. 그러나 쌍방이 대면한 현장에서 즉석에서 써야 하므로 일반적 문장 과는 다르게 요점만 기록할 수밖에 없고, 일정한 시간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행위 이므로 심도 깊은 논의는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唱和는 국가 간의 문학적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국가의 위신을 높이는 기능이 큰 몫을 차지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교제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밑바닥에는 묘한 경쟁심리가 깔려 있게 마련이었다. 일본 사행에서는 일본 문사나 행인들의 시문 요청이 많았으므로, 통신사의 제술관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창화는 작품창작 활동의 일환으로 詩를 창작하는 행위이므로, 無用한 잡담과 청풍명월 따위는 인용하지 않았고, 依韻, 用韻, 次韻등을 지켜야 하는 제약이 있다. 이렇듯 필담과 창화는 ‘붓을 통한 대화’라는 동질성 속에서 이질성 또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필담과 창화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목적과 내용 등에 의 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성은 동질성을 기본으로 하여 생각되어야 할 것 이며, 동질성 또한 이질성을 배제하고서 거론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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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글은 조선시대 대일사행기록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 관련 기록을 살펴본 논문이다. 울릉도 독도 관련 기록은 1617년 회답겸쇄환사 종사관 이경직의『扶桑錄』과 1719년 통신사 필담창화집『桑韓星槎餘響』, 그리고 계미통신사행을 통해 저술된 성대중의『日本錄』과 원중거의『和國志』, 마지막으로 1882년 수신사행을 기록한 박영효의『使和記略』에서 확인된다. 비록 소략하지만, 울릉도 독도에 대한 대일사행의 인식과 대일사행이 오간 시대의 양국의 인식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먼저 이경직의『부상록』에 보이는 기록은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의 이중적 행태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전후 공식적으로는 두 나라의 국교재개를 위해 가교역할을 하면서도, 선초부터 드러낸바 있는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는 대마도를 분명히 인식케하는 기록이다. 둘째로 필담창화집『상한성사여향』에 보이는 조선지도는 울릉도 우산도를 명칭과 함께 분명하게 표기해둔 기록이다. 이는 당시에도시대 막부와 긴밀히 관계 맺고 있는 이들이 간행한 책이라는 점에서 당시 일본의 영토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음, 계미통신사 사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성대중과 원중 거의 기록에 나오는 울릉도ㆍ독도 기록은 안용복, 대마도 관련 내용과 얽혀 전한다. 사행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대마도의 농간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과거 안용복의 울릉도 도해 사건이 다시 호명된 것인데, 곧 두 사람은 조선이 앞으로 일본과 대마도를 구별해서 봐야 하며 특히 대마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대마도가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야욕을 안용복이 꺾었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박영효의『사화기략』에 전하는 기록은 에도막부의 울릉도 도해금지령이 메이지유신이후 해이해져 울릉도ㆍ독도로 도해하는 일본인이 빈번히 발생하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이 시기는 메이지 정권이 울릉도ㆍ독도에 관해 에도막부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는 시기임을 반영하지만, 머지않아 독도 점거를 감행하는 메이지정권의 조치를 예견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독도와 관련하여 한⋅일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시점에서 근원적 해법을 모색하는데 의미 있는 지혜를 제공하는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6.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기해통신사 사행록인 『扶桑紀行』의 내용상의 특징 및 저자 鄭后僑의 일본 인식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후교는 숙종대 김창흡, 신정하를 비롯한 노론 계열 문인들 사이에서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는 1719년 부사 황선의 자제 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하였으며 제술관 및 서기들과 함께 일본인들과의 시문창화를 담당하였다. 그에게 일본 사행은 詩材를 제공해주는 일종의 유람이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사행록 역시 견문이나 정보 전달보다 는 유람의 체험을 곡진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상의 특징으로는 감각적인 풍광 묘사와 독특한 유람 체험의 전달을 위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 문사들과의 필담 교류를 일기와 시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고래사냥이나 시문창화의 현장 등 다른 사행록에서 발견되지 않는 다채로운 경험을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한편 『부상기행』에 나타나는 저자의 일본 인식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일본의 법도와 국력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감성적인 공감을 통해 일본인의 성품과 습속에 대해 재평가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화이론적 사고의 변용을 통해 일본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지식인이 기존 관념의 전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그것의 변용, 혹은 우회적 방식을 통해 새로운 인식을 창출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상 『부상기행』에 대한 검토를 통해 사행록 연구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분석의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시기 및 다른 시기의 일본 관련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본고의 논의를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7.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동와 조휘진(1729-1797)의 생애와 활동을 밝히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正祖가 남명 조식에게 사제(賜祭)하였던 시기를 남명학 부흥의 시발점으로 일컫는데, 그는 이때 남명학파의 중심인 덕천서원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각종 진주 관련 지리지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출중한 인물로 많은 인물과 교유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으나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가 아직 없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안에 세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거부하고 함안에 은거하였던 趙悅, 단종 때의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趙旅, 임진왜란 때 순사한 趙宗道가 그의 선조이다. 그는 평소 효를 실천함과 동시에 선조의 忠을 드러낸 것 역시 효의 실천으로 보았다. 선조 열 명의 업적을 기록한 『趙氏十忠實錄』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남명학의 전수자로서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유림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문집인 『東窩遺集』에 보이는 창화시 및 만사를 통해 그의 교유범위가 퇴계학파와 중앙의 남인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고 處士的인 학풍을 견지하던 남명학파의 유풍을 그대로 견지하였던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8.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강희맹의 함양시절 시작활동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 보는 데 있다. 현전하는 문집에 가운데 17권 4책으로 이루어진 甲辰字본 사숙 재집에 이 시기의 시가 실려 있다. 강희맹은 양부 강순덕의 상을 당해 벼슬에 서 물러난 51세 전후의 2, 3년간 함양에 머물렀다. 짧은 시기였으나 이곳에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당시 함양군수로 부임해 있던 김종직과의 교유이다. 어릴 때 교분이 있었던 이들은, 강희맹이 함양에 있는 동안 자주 오가면서 친분 을 나누었다. 중앙 관계를 떠나있는 문인관료로서의 공감대 위에 창화시가 오 가고 시의 영역은 주변 생활을 읊는 것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들의 창화는 함양 시절을 관통해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둘째는 함양의 경물과 소소한 전원생활의 경험이 시적 영감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번잡한 서울을 떠나 직접 채소를 재배하고 약초를 캐면서 농사를 연구하던 강희맹은, 생활 속에 보 이는 가축과 식물을 시재의 하나로 활용하였고 그림으로도 그려냈다. 강희맹에게 있어 함양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지냈던 경기지역의 전원과 다른 차원에서 온전히 농사 현장을 향유하면서 시를 창작하는 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