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4

        21.
        2015.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倻溪 宋希奎(1494-1558)는 佔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新堂 鄭鵬, 松堂 朴英, 杏亭 都衡 등의 인물이 영향을 끼친 星州에서 태어나 고 자라서 출사하고 만년을 보냈던 인물이다. 야계와 사마시 동년이었 던 晦齋 李彦迪 및 7년 연하인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 등이, 학문적 역량을 크게 드러내었던 시대에 이들과 같이 살면서, 어떠한 삶을 살면 서 어떠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성주의 학술사 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거니와, 영남의 유학사 및 나아가 우리나라 조선초기의 유학사 내지 정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16년에 초간 목활자본이 나오고 1924년 중간 목판본이 나올 때까 지 남아 전하는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냥 묻어두기에 는 우리 유학사 내지 정신사의 한 부분을 빠뜨려 두는 일인지라, 이에 대한 연구는 꼭 이루어져야 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논문에서의 논의를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야계의 가계는 시조로부터 9세에 이르기까지는 합천 야로 지역 에 世居하다가 야계의 6대조인 관찰사 宋構가 성주로 이거함에 따라 성주 사람이 되었다. 야계는 대대로 중앙 관직을 역임한 유력한 가문의 후예로서 어릴 적에 杏亭 都衡으로부터 학업을 익혀 20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지방직으 로는 상주목사, 김해부사, 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상주목사에 재임 때 문과 동년인 金光準이 사욕을 부리려는 일에 동조해주지 않음으로 해서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명종 즉위 초에 司憲府 執義로 있으면서 文定王后의 밀지에 따라 尹任·柳寬·柳仁 淑 등의 세 대신을 처형토록 하는데 합의하자는 大司憲 閔齊仁과 大司 諫 金光準의 견해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것으로 인해, 54세 때 대구부 사로 재직하던 중에 良才驛 壁書事件이 일어나자 乙巳名人들이 다시 대거 화를 당하였는데, 이 때 야계도 전라도 高山으로 유배되었다. 58 세 때 放還되어 高山亭을 지어두고 65세까지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둘째, 야계의 문학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孝敬忠信을 체득 하여 실천하는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공자의 제 자 曾晳에게서 보이는 유유자적함과 물아일체를 만끽하는 浴沂風雩의 삶을 추구하였음도 확인하였다. 이 두 가지 면모는 조선 초기 유자로서 의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야계는 관직 생활에서 사림으로서의 확고한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이른바 을사명인으로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퇴처한 뒤 향리의 생활에서는 효제충신과 욕기풍우의 자세를 지니고 유유자적함으로써, 15세기 전반기 사림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하다.
        22.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500년대 초반에 密陽 來進에 奠居한 星山君 李軾의 후손들인 碧珍李氏 麗隱亭派 來進 家門은, 500여 년 동안 동족 마을을 이루어 世居하며 士林家門의 표본이 되어 왔다.이후 계속해서 많은 學者들이 나와 文集을 남겼고, 고을의 鄕校와 書院에 적극 참여하여 士論을 주도하였다.그리고 家訓을 만들어 子孫들을 교육하여 조상의 좋은 점을 배우고, 同族間에는 화목하게 지내고, 나아가 鄕約을 실시하여 鄕風을 先導하는 등 선비정신의 수립과 보급에 誠力을 기울였다.通國의 著姓인 碧珍李氏 가운데서 麗隱亭派 來進 家門은, 국가민족이 戰亂에 휩싸였을 때, 올바른 지도자인 王建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키고 民生을 구출한 시조 碧珍將軍 李忩言, 詩文과 學問으로 中國에까지 이름을 떨친 山花 李堅幹,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킨 麗隱亭 李思之, 反正功臣이면서도 榮達보다는 恬退에 가치를 둔 星山君 李軾, ��小學��으로 子孫敎育에 성공한 泗濱 李繼胤, 자기 자식보다 宗家를 더 생각한 李貴生, 자식의 科擧 合格 취소에도 초연했던 覽懷堂 李而杜 등 훌륭한 조상을 많이 두었다. 이러한 事行들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고의 德目이다. 이런 훌륭한 조상이 있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후손들이, 來進 家門의 名聲과 位相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이는 단순히 碧珍李氏 來進 家門만의 精神的 資産이 아니고, 혼탁해 가는 人類社會를 구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精神的인 좋은 慈養이 될 것이다.孝友를 위주로 한 倫理道德을 중시하고, 學問을 숭상하고, 學者를 우대하고, 자기 가문은 물론 향촌을 先導하는 전통을 유지해 나가는 집안이 좋은 집안이다. 곧 선비정신을 충실히 실천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많이 나오는 가문이다. 碧珍李氏 來進 가문이 이런 선비 가문의 전통을 모범적으로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23.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후지신앙(富士信仰)은 에도(江戶)시대 후기에 에도와 관동(關東)지역에 있었 던 대표적인 서민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후지강(富士講)의 원류가 된 후지신앙 은 修驗道系의 廻國修行者였던 角行藤佛을 시조로 전개됐다. 본 논문에서는 寬保 2년(1742) 9월부터 享和 2년(1802) 7월까지 있었던 후 지강 단속령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막부의 이러한 단속 정책이 후지신앙의 어 떠한 실태를 반영한 것인가? 후지산 北口師職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등을 살펴보았다.
        24.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에 나오는 弗矩內의 의미와 상징을 밝혀 신라인의 내세관과 우주관을 해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신라 천하관의 밑바디인 弗矩內는 출생과 죽음 그리고 재생·부활이라는 우주 관인 ‘뉘’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여기서 弗矩內 뉘란 혁거세와 김알지가 자주빛 알이나 자주빛 구름에 싸인 황금 궤에서 출생하여 대릉원의 주인공들처럼 금관 을 쓰고 죽음여행을 하며 다시 우주새가 되어 천상으로 갔다가 난생으로 재생· 부활하는 순환 고리를 말한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