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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목적은 1980년대 이후 최근까지 이루어진 남명 및 남명학에 대한 외국 연구자의 업적과 성과들을 회고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연구사의 검토와 정리에 앞서 외국 연구자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자국의 연구 동향을 일정 정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외국인 연구자의 대다수를 점하는 중국과 일본에 있어서의 유교 내지 유학에 대한 인식과 연구 동향에 대해 개략적으로 검토해보았다. 다음으로 본론에서는 다섯 분야로 나눈 주제별 분류를 통해 외국 연구자의 연구 동향을 비교ㆍ검토하는 방법을 취하였는데, 실천 유학자로서의 남명과 남명학의 실천성 문제, 실천 철학으로서의 남명학이 지니는 실학사상과의 연관성 문제, 성리학자로서의 남명의 정체성과 주자학과의 거리, 남명 사상과 도가 사상과의 상관성, 남명학의 연관 분야 및 남명학파와 남명학의 계승 양상 등이 그것이다. 이들 주제 가운데 남명학의 실천성 문제는 외국 연구자가 일찍이 주목하던 바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끌면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울러 외국 연구자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실천 철학으로서의 남명학에 대한 관심은 이후 실학사상과의 연관성에 있어서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남명학과 주자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영향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과 양자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누어지는데, 후자의 입장은 남명학이 원시유학의 정신을 수용하였다는 절충적 관점에서 도가 사상과의 관계를 주목하는 견해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기존에 외국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진 남명학 관련 연구는 자국의 연구 동향을 반영하는 한편으로 국내의 연구 동향과도 영향 관계를 맺으면서 그 질량에 있어서 일정 정도 성과를 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향후 연구의 심화를 위해서는 연구자의 국제화를 위한 체계적 대책의 수립 및 연구 활성화를 위한 시급한 대책, 예를 들어 관련 자료의 정리 및 번역 출판 등의 과제가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국내의 남명학 연구가 기존의 남명 사상의 언설을 반복 진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에 공헌하는 길을 찾기 위해 현대 중국에서의 유학 연구 사례를 모색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24.
        2012.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다양하게 재배되고 있는 강활의 육묘이식 재배방법 중 추대억제에 효과적이면서 고품질의 약재생산이 가능한 육묘이식 방법을 구명하고자 수행하였다. 강활 재배에서 추대억제 및 고품질의 한약재 생산을 위하여 육묘이식 재배방법에 따른 수량 및 성분함량을 비교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상부 생육은 야생종근이식과 노지육묘이식재배가 양호하였고 다음으로 트레이육묘이식, 직파재배 순이었으며, 추대는 직파와 트레이육묘 이식재배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야생종근이식재배와 노지육묘이식재배가 각각 11.4%, 19.7%의 추대율이 나타났다. 수량은 트레이육묘 이식재배가 426 kg/10a로 가장 높았고, 직파재배가 187 kg/10a로 가장 낮았다. 강활근의 주요 성분은 oxypeucedanin, bisabolangelone이었고, 처리별 함량에서는 야생종근 이식재배가 전반적으로 다른 처리에 비해 낮게 나타났다.
        25.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중국의 17세기 말엽의 혁신적 사상가였던 顔元의 개혁사상을 학문 론과 교육론을 위주로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안원의 사상에 대한 그 러한 논의는 이후에 전개할 남명 사상과의 본격적인 비교 논의를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안원은 초기에 朱子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이윽고 생명을 잃을 뻔한 실존 적 체험을 겪고 난 뒤에 품은 의문을 계기로 사상적 전환을 행하게 된다. 이후 그는 주자학 체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행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이 현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실제적인 공헌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그들의 사유가 주자학적 인성론에 얽매여 있음을 깨닫고서 이를 비판하여 새로운 인간 개념을 공식화하 기에 노력하였다. 그러한 그의 인성론에 대한 논의가 지니는 실천 지향적 특성 은 이후 그의 사상이 후대에 나타나는 實學 사상의 한 선구적 존재가 되게끔 하 였다. 안원은 우주를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으로 보고 인간도 본질적으로 선악을 벗 어난 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인간성을 자아실현의 진정한 도구로서 낙관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보았던 그의 관점은 이윽고 학문과 수양의 과정에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러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는 학문과 수양의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길 은 공자의 원시유학에서 제시하는 三事와 三物, 특히 六藝의 학문을 習行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강조하는 習行의 방법론은 끊임없이 현실적 과제나 구체적 사물과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학습과 실행을 강조함으로써 주자학 체계 가 지니는 개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과 뚜렷하게 대립하였다. 이렇듯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세계를 중시하는 안원 사상의 특징은 格物致知 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곧 그는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 실제로 그 일을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서 그 행위의 대상이 곧 六藝라고 해 석한다. 이러한 해석의 전환을 행함으로써 그는 학문과 수양의 주체를 수동적 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해방시켜 현실의 경험 세계 속에서 대상 사물과의 동적인 관계를 맺는 주체적 자아로 바꾸어 놓았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안원이 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진정한 목 적을 轉世之人,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데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이 론의 당연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안원의 사상적 탐구는 자아 수 양의 정신적 역량을 어떻게 하면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는 세계 형성을 위한 사 회정치적 힘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 향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현실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안원의 사상을 그보다 앞선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실천 사상이었던 남명 조식의 사상과 비교의 관 점에서 논의해 보는 것은 남명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동아시 아 유학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기초적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6.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16th century was a epoch-making time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Korea because of the appearance of two greatest scholars, Nammyeong(南冥) Jo Sik(曺植) and T'oegye(退溪) Yi Hwang(李滉) who were leaders for the direction from the time forward in the intellectrual history of Korea. The difference of academic thinkings and political ideas between them clearly exposed at the beginning was one of the origins of the prosperity from 16th to 17th century in our intellectual history as their disciples were founding principal schools. On the other hand, it also brought about such serious matters as the start of confrontations and discordances between two leading schools. As Nammyeonghakpa(南冥學派) went on disorganization as a school after 17th century as well as downfall in the political world, it had been intensively under political oppression other than T'oegyehakpa(退溪學派) even in the political position similar to it within the political world. But, the negative understandings and evaluations of Nammyeonghak(南冥學) or Nammyeonghakpa in the next generation had virtually started from the discordance and conflict with T'oegye in academic thoughts and political ideas. Yi Hwang who considered as his own duty to restore the soˇngnihak(性理學) because of his awareness of the time being as a corruption conflicted undoubtedly with Nammyeong and his school, by bringing up the dispute of deviation from soˇngnihak's orthodoxy in the academic thinkings of Jo Sik made a difference with him. It also meaned the open of harsh criticism or denial against Nammyeonghak and its school. Such criticisms or negative opinions for Nammyeonghak grew in place after the severe criticisms for Chong Yinhong(鄭仁弘) who was a follower of Jo Sik. The typical critic was the Noronpa(老論派) of soyin(西人) from Yulgok(栗谷) Yi I(李珥) to Taekdang(澤堂) Yi Sik(李植). Especially Yi Sik among them tried to build the foundation of political justification by giving a criticism for Nammyeonghakpa including Chong Yinhong. Along with it, he also tried to give a harsh criticism in a full scale against Nammyeonghak through his large number of writings. After the members of Noronpa of Soyin were influenced by or followed his critical opinions, it ended up to the peak of criticism in the line of Nong'am(農巖) Kim Changhyup(金昌協) and his disciples. Kim Changhyup took a strongly critical and negative position other than Song Siyeol(宋時烈), his master, had a flexible position against Nammyeong. In the end, his negative opinions spreaded out and developed into an intensive criticism in the line of Chong'am (正庵) Yi Hyeon'ik(李顯益) who was his loyal disciple. However, in spite of the harsh journey of Nammyeonghak which had been denied even the worth for its being in history, it came to be a comeback because of its revaluation movement by the scholars of Kyeong sang Namdo(慶尙南道) province in 19th century. As it was in the 19th century of the crisis era, a group of scholars in the province started the revaluation movement of Nammyeonghak and its actual values. The movement was growing much more and continued steady to 20th century. Those flows of Nammyeonghak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Korea became one of the principal reasons of understanding newly of the merit of Nammyeonghak and its reappearance. In brief, still within such continuous circumstances in crisis up to now, we started to revaluate the worth for Nammyeonghak's being as the valid thought even in our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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