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예이츠의 희곡 『큰 시계탑의 왕』의 타이틀 롤을 맡고 있는 큰 시계탑의 왕에 관한 연구이다. 『큰 시계탑의 왕』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극의 제목이 『삼월의 보름달』로 바뀌게 되고, 새로운 제목의 버전에서는 원래 버전에서 타이틀 롤인 왕은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버전에서 그 인물이 생략되었다는 것이 원래 버전에서 담당하고 있던 인물의 기능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논문은 큰 시계탑의 왕에 주목하여 극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그가 수행하고 있는 여러 기능을 탐구한다. 먼저 『큰 시계탑의 왕』이라는 제목이 암시해주는 것처럼 왕은 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 희곡의 구조적 원형이 되고 있는 『매의 우물에서』의 노인과 같이 주인공과 대비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극의 행위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촉발자와 극의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으로서 왕의 존재가 이 희곡을 『삼월의 보름달』과 차별화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버섯은 대부분 시설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안전하게 고품질의 버섯 생산을 위해서는 재배사 내 환경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헤파필터 교체에 따른 큰느타리 재배사 대기중 미생물상 변화를 분석하여 헤파필터 적정 교체기간을 설정하고자 연구를 수행하였다. 헤파필터 교체 전 재배단계별 대기중 세균 및 진균 밀도는 배지제조과정에서 세균 169.7 cfu/m 3 , 진균 570 cfu/m 3 , 균 긁기과정에서 세균 126.3 cfu/m 3 , 진균 560cfu/m 3로 부유균 의 밀도가 가장 높았다. 헤파필터 교체 후 세균의 밀도는 배양실에서 가장 낮아졌고, 진균의 밀도는 냉각실에서 가장 낮게 나타났다. 헤파필터 교체전 Cladosporium sp. 등 7속 7종이었고, 교체 후 1개월은 Penicillium sp. 등 6속 6종, 2개월은 Cladosporium cladosporioides 등 4속 7종, 3 개월차는 Mucor plumbeus 등 5속 7종, 4개월에서 6개월까지는 Penicillium brevicompactum 등 각각 5속 12종, 5속 10종, 5속 10종으로 교체 후 기간이 지날수록 종이 다양해지고 증가하였다. 부유균의 밀도는 헤파필터 교체 후 2개월 후 가장 낮았고 차츰 증가하다가 6개월에는 교체전 밀도와 비슷해지거나 높아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헤파필터는 6개월마다 교체하는 것이 오염저감을 위해 효율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The king of Joseon Dynasty Jeong-jo commanded the renovation of Seongjeong-gak, once a study for crown prince, to serve as Pyeonjeon(便殿), a main office for kings. The renovated building strictly separated the routes designated for the king and the other officers, respectively. The interior space consisted of Youngnae, reserved for the king and his senior aides, and Youngwae, for lower ranking officers. Youngnae(楹內) and Youngwae(楹 外) corresponded to the two blocks (the space between two columns) on the east and west side, respectively. Such structure of Pyeonjeon was heavily transformed over several occasions beginning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 Youngwae was subdivided into separate spaces, and the routes for the king and the officers became indistinguishable.
This study focuses on the 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seco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which has been spotlighted for political and economic history. The author analyzed the contents of wood procurement with the Yeonggeon Diary, which records each day of construction site.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2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Yeonggeon of Gyeongbokgung Palace, was a new building that reflected the old system and 270 years of changed environment on the existing site. Despite the poor economic conditions, it began with years of effort and voluntary volunteer work and dedication. Second, the priority of timber transport was recruiting people in the whole process and the supply and demand of transportation tools. Carrying lumber from the mountains to the riverside and floating it at the right time were all a matter of manpower. Soldiers and carts were used to carry timber that arrived in Hangang River to the construction site. The cart was a consumable product, so it was necessary to continuously use the wood to make cart at the site. Third, fire and flood were the biggest obstacles to the Yeonggeon schedule of Gyeongbokgung Palace. Especially the fire was fatal. It was difficult to extinguish the fire in temporary structure, where was the storage for wood to construct. These disasters greatly affected the construction cost and construction period. Wood procurements of Gyeongbokgung Palace were based on public offerings. At the same time, recycled materials from other palace wood and nearby houses, nationwide buying of private mountain wood, the logging of royal tombs and some of the buildings of Gyeonghui Palace and Changgyeong Palace were relocated.
본 연구는 영친왕의 일본 생활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골프활동을 찾는 것으로 국내 및 일본의 서적, 논문, 학회지, 신문, 각종 잡지, 사진 등의 문헌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영친왕은 일본 황족 마사코와의 결혼으로 일본 황족의 대우를 받게 되어 일본 황실의 영향으로 1924년 골프를 처음 배우게 되었고, 1925년에는 일본 황태자가 개최하는 대회에도 참가하는 등의 골프활동을 보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1년간의 유럽여행을 떠나며 싱가폴, 파리, 스위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에서 골프 경기는 물론 골프장 시찰, 골프 레슨, 골프 공 제조 공장들을 방문하며 많은 골프활동을 보였다. 유럽에서 돌아온 후에는 경성 군자리골프장 부지, 건설자금, 운영비를 지원해 주었다. 그 후 일본 고급 직업 장교로 생활하는 기간에는 특별한 골프활동을 보이지는 못하였고,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전시 복구 등의 사회적인 여건과 경제적 문제, 1958년부터는 건강상의 문제로 더 이상의 골프활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Tomb of King Muryeong, located in Sonsan-ri, was found vulnerable due to leakages during since the summer of 2016. This research aims to evaluate structural safety of the Tomb under the tumulus. Site surveys were conducted to find vulnerable inner parts. Structural safety assessment is presented based on both site survey results and analytical results obtained through FEM analysis using the ANSYS program. The underground structure was explicitly modeled to focus on two types of loadings: design loads and actual gravity loads. In general, the tomb does not show any critical deflection increase or damage through the analytical investigation. However, maintenance through continuous monitoring is necessary to prevent severe deflections and stress concentrations since the rigidity of the tomb materials are very vulnerable and likely to be reduced due to prolonged weathering and continuous rain leakage.
본 연구는 현륭원이 여러 왕조에 걸쳐 왕릉후보로 거론된 과정을 살펴보고, 정조의 풍수 인식과 함께 실패한 재혈(裁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륭원의 입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윤선도의 논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인용되고 있으며 활용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현륭원의 재혈과정을 통해 정조가 이루고자 하였던 목표는 일정 정도 차질을 빚고 있는데, 여러 특징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입수룡과 좌향이 현저하게 틀어진 모습을 보이는데, ‘對珠向空’이라 해서 여의주 형상의 안산에 집착한 결과라 하지만, 입수룡과 혈처가 같은 선상에 자리하지 못하고 있다. 혈토의 출현을 중요하게 고려한 것으로 『홍재전서』에는 기록하고 있으나, 정조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정조의 의지에 따라 천원한 현륭원은 길지를 선정하였으나 재혈에 실패함으로써, 정조가 의도한 결과물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본인이 직접 발로 뛰고 확인한 것이 아닌, 보고에만 의지한 결과는 여러 논란의 여지를 만들었다.
마태복음의 배경이 되는 마태공동체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의 선교명령에 따라 열방을 향해 선교하였고, 동시에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선교하 였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가 유대인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다윗의 혈통 을 이은 왕이자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마태복음 전체의 구성을 모세오경과 유비시켰다(analog). 또 왕으로 온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보다 ‘천국’(Kingdom)을 선호하며 ‘왕’(King)의 복음의 특징을 드러낸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결론이자 핵심인 ‘대위임령’을 천하의 제왕이 등극하는 형식,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로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선교 명령은 결국 그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가르치고 고치며 훈련했던 모든 것들이 ‘선교적 제자도’로 집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이츠의 희곡인 오이디푸스는 시대 정신을 함의하고 있다. 예이츠 당 대의 사회적 이상향과 예술적 지향은 오이디푸스가 직면했던 터부를 극복하기 위해 부조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이츠와 소포클레스가 살았던 사회는 공통적으로 윤리적 터부와 사회적 부조리가 대비된다. 두 사회가 지닌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이츠는 오이디푸스를 통해 윤리적 터부를 극복하고 예술 철학적 부조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예술적 부조리인 잊힌 영웅들의 이름부르기는 성과 폭력의 터부를 초월한 실존적 예술철학을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예이츠의 예술적 영혼과의 만남은 사람들을 현실의 감각적 터부를 넘어 미래 이상향으로 향하도록 각성하게 하는 영혼의 전향술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The palace byeoljeon(別殿), the King’s non-ceremonial space, were created as a space for the king to comfortably use and for the king to do what he wanted to do. The byeoljeon housed various types of spaces and were flexible in that they could be repurposed to meet the demands of the times. Nevertheless, their characteristic as palatial building created for the King’s convenience has remained unchanged. In this study, we examine the process by which such royal spaces were created by focusing on the reconstruction of the Changdeokgung Huijeongdang during Japanese occupation period, with a view to continuity and the transformation process. The reconstruction of Huijeongdang at the time may be considered along internal and external characteristics. Internally, Huijeongdang connected the symbolism of the king’s space as the palace byeoljeon. Externally, Huijeongdang is characterized by its mixture of traditional and western style, where western style structures were housed within traditional buildings. The plans for the block of Huijeongdang also included the coexistence of traditional building, western style building, and mixture of traditional and western style building. This reflects the characteristic continuity of the byeoljeon as well as the architectural techniques of the time, manifested together within a specific spatial block.
This study focuses on the architectural changes of stele pavilion at the royal tombs of Joseon Dynasty. Throughout the survey on overall forty two stele pavilions, they were classified into basic type, expanded type, and 4-side corridor type. Basic type was usually used for general small stela, while expanded type was for extraordinarily large ones. 4-side corridor type, however, turned out to be used for both small and large stela and has appeared only during King Gojong period(高宗年間, 1863-1907). When it was first applied at Geonwolleung(健元陵) in 1870s, the purpose of 4-side corridor type seemed to stabilize the enlarged structure due to the size of the larger stele. Later, 4-side corridor type was repeated for small stela at Hongneung(洪陵) and Yureung(裕陵) in 1898 and 1904 respectively, to express higher dignity of Daehan Empire(大韓帝國). This type of plan continued to other pavilions in the center of Seoul such as Kinyeombijeon(紀念碑殿) and Seokgojeon(石鼓 殿) that were built in 1903 with sophisticated proportion and multiple brackets. This architectural change implies that stele pavilion itself has become more significant than stele inside.
We report a calendar sheet for the 31st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1894) (hereafter, calendar sheet 1894) in Korea, which calendrical data in a single page. This calendar sheet 1894 is composed of 14 rows by 14 columns (about 190 cells), and various calendrical data are recorded such as the sexagenary circle of the first day in each month, 24 solar terms, full moon day. In this paper, we compare calendrical data of 1894 calendar sheet with those of the almanac based on the Shixian calendar (hereafter, annual almanac) of the same year. Our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 we find that the year is expressed using the reign-year of the king of the Joseon dynasty differently from using the reign-style of China in the annual almanac those times. Other calendar days of this calendar sheet are the same as those of the annual almanac in term of lunar dates, 24 solar terms, sexagenary days and so forth. Second, we find that the calendar sheet 1894 contains memorial days for 64 lineally ancestors of the Joseon royal family. These royal memorial days appears in the annual almanac two years later (i.e., 1896). Third, as the most distinctive feature, we find that the symbol of 工 kept every two cells. It was found that the cells can be filled with three days as the maximum number of days and then are labelled the same symbol 工 every second cell. This feature allows us to get the first year in which this kind of calendar sheet was published. It is conjectured one of 11 years, such as 1845, 1846, 1847, 1873, 1874, 1875, 1876, 1877, 1878, 1879 or 1880. We also think that the format of the calendar sheet 1894 has influenced on the Daehan-Minryeok (Korean civil calendar sheet) of 1920.
This paper attempts to study on the substantial characters of the sangryang-muns written for the constructions of Sudara-jang and Beopbo-jeon at Haein-sa in the years of king Gwanghae and king Injo. On that basis, it also attempts to declare the first time that the Buddhist Order firstly used long sangryang-mun, and to presume the backgrounds of the constructions.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queen, Mrs. Ryu and court ladies of king Gwanhae had participated as donators to the constructions. Therefore, it is supposed that the constructions had been promoted by the queen's Buddhistic beliefs as well as the commemoration of the 6th award of eulogistic posthumous title to king Gwanghae.
Second, throughout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long sangryang-mun was firstly used in the construction of Sudara-jang. Therefore, we can see the fact that long sangryang-mun was introduced to the Buddhist Order, as donation by royal families. But the long sangryang-mun couldn't be suitable for the traditional customs of Buddhism, the monks wrote additionally the Balwon-mun, so to speak, the pryer address.
Third, the sangryang-mun of Beopbo-jeon was written in the mixed format of long sangryang-mun and traditional Balwon-mun. It is supposed that the Buddhist monks wanted to keep the traditional customs.
Four, in the late period of J oseon dynasty, the same formats as the sangryang-muns of Sudara-jang and Beopbo-jeon have been widely used in the various Buddhist buildings. Consequently, it is supposed that these three sangryang-muns were the embryonic formats for the major types of the late Buddhist building sangryang-muns.
주자성리학을 국가의 기본 통치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조에서 임금은 그 모든 사회체제의 구심점이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그러한 임금의 대표적인 의사표현 수단이 어필이다. 어필은 내용적으로는 임금의 개인적인 생각․사상 및 그 시대의 제반 요소가 담겨져 있고, 서체적로는 조선조의 서예사와 서예미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이다. 그동안 어필 관련 연구는 일부 임금의 서체에 국한하여 부분적으로 연구되어 조선조 전체적인 관점에서 어필을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본 논문은 임금의 서체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조선 왕조실록』에 기술된 어필에 담겨진 내용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분석․고찰하였다.
실록에 기술된 어필에 대한 내용 속에는 어필과 관련된 형식적인 내용에서부터 문화적․ 사상적․정치적 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담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임금이 써서 내린 글을 통칭하여 어필이라고 하는데, 실록에는 임금의 글씨에 대한 명칭을 다양한 용어로 쓰이는 것이 확인된다. 어필의 정치적․사상적 배경도 주자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라 王道政治를 근본으로 禮治思想을 절요처로 하여 왕도정치와 예치의 통합을 통한 ‘修己之學’과 ‘治人之學’적 요소의 조화로운 통일을 지향하였다.
어필은 서체적 의미 이외에 어필내용을 깊이 분석하여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임금이 어필을 내린 사유를 분류해서 정의한다면 “임금이 국정운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고, 종묘사직의 안위를 지키며, 선대왕 및 성현들의 유지를 존숭하고 이를 본받아 계승하며, 신하와 백성들과의 소통 및 교육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임금의 입장에서 표현하는 형식적인 의사 표시 수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조에서 어필의 상징성은 지엄, 권위, 존숭, 공신력, 초권력적 성격을 띤다. 임금은 나라의 지존으로서 이러한 상징성에 의거하여 어필정치를 하였다. 이에 따른 어필의 효용성은 첫째 왕도정치의 구현의 수단, 둘째 행정적 통치의 구현 수단, 셋째 교훈․경계적 現示의 수단, 넷째 국방․외교에 관한 신뢰구축의 수단, 다섯째 특별권력으로써의 왕권 구현 수단 등으로 어필이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조에 있어서 어필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려 나감에 있어, 임금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직접적이고 형식적인 수단이었다. 이 어필 속에는 임금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나라를 다스려 나가는 국정운영의 방향과 철학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이 에 따라 어필의 내용을 세부적으로 고찰하여 어필 속에 담겨진 의미를 다양하게 도출하였다. 조선조는 임금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어필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조선조를 전반적으로 이해 하는 중요한 지렛대이다. 즉 어필은 조선조 이해의 대표적 아이콘이다. 따라서 이번 어필 내용에 대한 연구는 향후 조선조의 정치적 사회적 이해는 물론이고 특히 미술사, 서예사 등 조선조 미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 시켜 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There have long been debated whether Jeju king cherry in Korea and Punus x yedoensis (Yoshino cherry) in Japan are the same or not and its originality. Recent genomic approach among P. yedoensis and closed related varieties from Korea, Japan and USA confirms that P. yedoensis is F1 hybrid. The results also show that there are two types of Jeju king cherry in Mt. Halla, Jeju, Korea and one type is clearly different and the other type is the same grouping to Yoshino cherry in Japan and USA and the maternal texa of the two types in Jeju is the same of P. pendula. The search of paternal texa of the same type and further molecular genetic analysis and classification among newly found hundreds of Jeju King Trees in natural habitats of Mt. Halla including a 265 year-old tree along with previous findings would reveal the hypothesis that two independent F1 hybrid of P. yedoensis are evolved in Mt. Halla where is the only natural birth place of P. yedoensis in the world. Furthermore, policy agenda of king cherry tree eco-exploration among six countries including two divided Korea proposed. In terms of bio-diplomacy, it was amazing fact that Jeju King Cherry trees were sent USA under Japanese colony in 1912. In 1943, USA Congressman John Rankin of Mississippi confirms that they were Korean Cherry Trees. The first four of these trees were presented to the American University in 1943 by the Korean Women’s Relief Society of Honolulu according to notice of AU’s School authority. As Jeju NAtional University students and teachers confirmed the fact in April 2018, they suggest Jeju King Cherry Trees Eco- Exploration between the two universities at university level, hoping to extend a warming program of planting Jeju King Cherry trees at the Dalma tourism complex in Wonsan city of North Korea in April of 2020.
사과나무의 생장은 대목의 지상부 노출 길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접수 품종의 특성에 맞는 대목 노출 길이의 선택이 중요하다. 따라서, 국내육성 신품종 ‘썸머킹’에 적합한 왜성대목 M.9, M.26의 노출 길이 구명을 위하여 접목부가 지면에서 5, 10, 15cm로 노출되게 재식 한 후 수체생장과 생산성을 조사하였다. 재식 4년차 신초장은 M.9와 M.26 5cm 노출이 10cm 노출에 비해 12.6, 5.5cm, 15cm 노출에 비해 11.4, 8.2cm 긴 것으로 나타났다. 재식 4년차 주간단면적의 경우 5cm 노출을 100으로 했을 때, 10, 15cm 노출은 M.9의 경우 58, 64 이며, M.26은 75, 61으로 조사되었다. 대목 노출 길이가 짧을수록 수고, 신초장, TCA의 영양생장이 많아졌으며, 특히 5cm 노출은 ‘썸머킹’의 수세를 강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M.9와 M.26의 누적수량효율은 영양생장과는 반대로 15cm 노출에서 각각 0.99, 0.68로 가장 높았으며 10cm 노출은 0.91, 0.61이었으며 5cm 노출은 0.58, 0.51로 노출 길이가 길어질수록 우수하였다. 그러나 10cm와 15cm 노출의 통계적 유의차는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결과 ‘썸머킹’의 영양생장과 생식생장을 고려했을 때 M.9와 M.26 노출 길이는 10cm가 가장 적정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극 기지인 세종과학기지가 위치한 킹조지섬은 남극해류에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고 날씨가 급변하며 남위 62도에 위치하여 남반구의 여름엔 비교적 온도가 높은 편이다. 많은 강수량과 높은 온도의 영향으로 식생의 분포가 넓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연구지역의 대표적인 식생으로는 이끼(사니오니아)와 지의류(오크롤레키아, 우스니아)가 있는데 이 생물들은 지하의 수분분포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연구지역은 신생대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발생한 화산 쇄설물과 퇴적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분 공급처는 크게 세 가지로 직접적인 강수, 빙하가 녹은 물과 대기의 단열팽창현상인데 올해 2월 중순 총 강수량은 5.7mm로 남극의 여름철에는 특히 빙하가 녹은 물에 영향이 가장 크다. 연구지역의 이끼 서식지는 빙하에 가까우며 지의류에 서식지는 해안쪽으로 분포한다. 이것이 지하 내부의 수분분포와 관련된 것으로 가정 후 땅이 가장 많이 녹은 시기인 2018년 2월 중순에 측선 길이는 40m이며 1m 전극 간격의 웨너배열법을 사용한 전기비저항탐사, 주파수 500MHz 안테나를 사용한 레이다탐사를 실시하였다.
동토층의 깊이가 얕게는 0.8m부터 깊게는 1.5m로 많은 차이를 보였는데 동토층의 깊이가 수분량에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정 위치의 활동층 내에 존재한 두께 5~7cm 가량의 퇴적층 또한 동토층에 영향을 주었고 지표의 구조토 형성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큰느타리버섯은 에르고스테롤 및 글루칸과 같은 기능성 물질의 함량이 높아 항산화 활성 및 프리바이오틱 효과를 일으키는 버섯이다. 큰느타리버섯은 향이 강하며 단단해 기호도가 높지만 장기간 소요되는 선박수출 등에서는 선도유지 기간 확보가 필요하다. 버섯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요인은 온도, 상대습도, 공기조성 및 통풍 상태가 있으며 이로 인해 버섯의 호흡량, 수분 함량, 경도, 색도, pH 및 이취 등에 영향을 준다. 큰느타리버섯의 주요 장해는 갈변, 이취, 부패가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상품성이 높은 품종을 개발하거나 저장성을 높이는 처리 방법이 고안되고 있다. 버섯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건조, 감마선 조사, 키토산 처리와 같은 수확 후 처리 방법과 CA 저장과 MA 포장을 통한 저장 방법이 있다. 버섯의 건조는 자연건조, 열풍건조, 동결건조, 진공건조, 전자파진공건조 방법이 있으며 동결건조 방법을 사용한 버섯의 성분저하가 비교적 낮았다. 1 kGy 감마선 조사가 고선량에 비해 저장기간 연장에 효과적이었으며 오일, protocatechuic acid, 왁스 등의 친수성 colloid를 키토산에 첨가하여 코팅처리 하였을 때 경도유지, 호흡 및 갈변이 억제되었다. 큰느타리버섯의 CA 저장조건은 10℃ 이하의 온도에서 5kPa O₂ + 10~15kPa CO₂의 공기 조성이 제시되었으며 MA 포장으로는 미세천공을 갖는 PP필름을 이용한 능동적 기체조성 방법이 저장 중 품질유지에 효과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