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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흔히들 일본의 독도점취는 러일전쟁의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경우 그 이전부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야욕을 갖고 있었음을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문제의식 하에서 본고의 경우 일본 의 독도 점취는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조치였다 는 시각에서 벗어나 1850년대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개척한 뒤 남 하의 향방을 동아시아로 정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러시아 와 일본의 각축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부동항의 확보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는 1854년 조선 동해안을 샅샅이 탐사하였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러시아 해군이 1857년에 ‘朝鮮東海岸圖’를 처음 발행하였다. 여기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 국영토로 파악되었고, 이 지도는 1862년, 1868년, 1882년에 증보 간행되었다. 일본 해군은 1868년 러시아의‘조선동해안도’를 입 수하였고, 태정관과 외무성 은 일본 관리를 파 해 조선의 사정을 내탐하였다. 이때의 문서인‘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에는 러시아 의 조선 경략론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된 시말 을 조사하라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울릉도와 독도 를 부동항으로 주목하게 될 상황을 염려하여 조사항목에 포함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의 교역이 증대하자 일본은 조선을 개국시키면서 원산을 개항장에 포함시켰다. 그에 따라 울 릉도와 독도에 관심이 고조되어 개척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불법적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벌목과 어로활동을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아관파천 때 울릉도 삼림채벌권을 획득한 뒤(1896.8.28.), 1899년 일본의 울릉도에 대한 삼림채벌 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러시아 군함이 몇 차례 울릉도에 기항하여 병력을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고 독도를 관할하게 하는 칙령 제41호를 발표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 태를 경험한 일본은 러일전쟁의 전략상 목적에서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1905년의 무주지 선점론 역시 그 과정에서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22.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울릉도의 조면암질 응회암의 저온변질작용으로 할로이사이트가 생성되었다. 할로이사이트는 자연 상태에서 수화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양파구조의 구상 또는 가장자리가 휘어진 판상 입자로 산출된다. 할로이사이트는 Si의 함량이 고령토 광물의 이상값보다 높아서 약간의 비정질이 혼재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할로이사이트의 높은 Fe 함량은 판상 할로이사이트 생성의 원인이다. 조면암질 유리가 변질되면서 용탈된 원소들이 주로 화산유리의 입간 공극에 할로이사이트로 침전되었으며, 유리를 교대한 Si가 풍부한 반구상 비정질 집합체도 부분적으로 구상할로이사이트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할로이사이트는 조면암질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울릉도에서 화산재의 주요 변질물 중의 하나이다.
        123.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영토의 포기는 영토의 취득의 한 유형인 선점과 같이 영토주권의 상실의 한 유형이다. 영토의 소유국가가 무거주지를 영원히 포기하면 그는 영토주권을 상실하게 되고 그 영토는 타국가가 실효 적인 선점을 하게 될 때 까지 무주지로 된다. 선점이 첫째로 실제적인 점유의 취득(체소)과 둘째로 영토주권 취득의 의사(심소)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토의 포기도 첫째로 영토로 부터의 실제적인 철수와 둘째로 영토주권 포기의 의사를 요한다. 따라서 영토로 부터의 단순한 철수는 그 국가가 영토로 부터 영구히 떠나려는 의사를 가지지 아니하는 한 영토포기 를 수반하지 아니한다. 일시적인 철수와 영토주권 행사의 약화는 소유국가가 그 영토를 다시 점유할 의사와 능력을 가졌다는 추정 이 있는 한 영토주권 상실의 효과가 수반되지 아니한다. 독도의 영토주권에 관한 1954년 2월 10일자 및 1956년 9월 20일 자 일본정부의 견해에 의하면 일본정부는‘조선초기부터 장기간 쇄환정책을 승계해왔고 … 한국정부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위‘쇄환정책’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의 포기를 의미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들 섬에 대한 포기의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쇄환정책’은 이들 섬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한 유형인 것이다. 따라서 1905년의‘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의한 독도의 선점은 무주지에 대한 선점이 아니므로 국제법상 위법인 것이다.
        124.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점취한 목적과 과정을 구명함으로써 그들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입증하려는 시도이다. 즉 일 본이 이 두 섬을 점취한 목적이 러일전쟁,특히 러시아 발틱함대의 내도(來到)에 대비하기 위한 기지확보용(基地確保用)이었음을 증명, 이것이 차이로 선언 위배행위였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독도편입은 러일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정부의 대비책이 었다. 1904년 5월 15 일을 전후하여 일본해군이 여순항에서 최신예 해군전력의 약 3분의 1을 한꺼번에 상실하자, 그들은 우선 울릉도가 갑자기 필요하게 되었다. 망루를 설치하는 방법 이외에 전력을 보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죽변과 울릉 도에 망루 건설을 시작하여 8월과 9월에 각각 완공했다. 이어 해군 군령부는 9월 25 일 독도 망루 설치를 위한 조사를 명령했다. 그러자 내각은 불과 4일 뒤인 9월 29 일 나까이를 시켜 ‘리양코도 영토 편입원’을 제출케 했다. 독도점취를 위한 대부분의 조치가 집중적으로 취해진 시기는 도고가 군령부장의 명령에 따라 동경에 체류한 5주간(1904.1 2.30 - 1905.2.6) 의 일이었다. 독도 영토 편입고시는 도고의 엄전 태세 완비 선언 (2.2 1)에 이어 바로 이튿날(2 .22) 이루어졌다. 그 방법도 열강 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시마네 현이라는 일 지방관청의 관내고시로 처리했다. 당시는 미국이 일본의 과도한 승리를 우려하여 러시아 대신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사실이 엄연한 이상 어떤 논리로도 독도영토편입과 러일 전쟁과의 관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쟁에는 ‘폭력’과 ‘탐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독도점취가 차이로 선언의 규제 대상 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125.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420년대 강원도 관아는 일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고,그때까 지 왜구들과의 접촉은 평화적인 교역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인과의 교류방식 변화는 조선전기 강원도의 우산도와 울릉도 섬에 대한 정책으로 조선조정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경상도 의 제포,부산포,그리고 염포 3개의 항구에서 접촉이 주로 이루어진 교역은 수군영의 보호된 지역에서 일본과의 교역통로로 집중되었다. 조선조정은 경상도 삼포에서 성공적으로 일본인 교역을 허용하는 정책을 수행함에 따라 모든 강원도 지역을 일본인들의 출현을 금지하였다. 강원도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문인을 가지고 도항할 곳이 없었다. 즉 조선조정은 일본 배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해안 수역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강원도 해안에는 섬이 적은 관계로 일본인들이 강원도로 내왕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우산도와 울릉도 역사는 일본인 접촉과 교류로 연관되어 있었다.
        126.
        2010.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Characteristics of precipitation and temperature in Ulleung-do and Dok-do were analyzed with hourly accumulated precipitation and mean temperature data obtained from Automatic Weather System(AWS) for latest four years(2005∼2008). In Ulleung-do, total annual mean precipitation for this period is 1,574.4 mm, which shows larger amount than 1434.2 mm of whole Korean peninsula for latest 10 years(1999∼2008) and 1,236.2 mm at Ulleung-do on common years(1971∼2000), shows that the trend of precipitation gradually increases during the recent years. This amount is also 1.4 times larger than the total annual mean precipitation of 660.1 mm in Dok-do. Mean precipitation intensity(mm ) at each time of a day in each month at Ulleung-do represents that the maximum values larger than 3.0 mm were shown in May and on 0200 LST, whereas these were found in August and 0700 LST with 3.1 mm in Dok-do. The difference of the precipitation amount and its intensity between Uleung-do and Dok-do is explained by the topological effect came from each covering area, and this fact is also identified from similar comparison of the precipitation characteristics for the islands in West Sea. The annual mean temperature of 14.0 ℃ in Dok-do is 1.2 ℃ higher than that of 12.8 ℃ in Ulleung-do. Trends of monthly mean temperature in both islands are shown to increase for the observed period.
        128.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신라의 지증왕 13년(512) 때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전하는『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고대 삼국 성립에서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우산국에 관해 언급된 유일한 기록이다. 이 자료를 갖고 흔히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로 인해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 땅이 되었고, 나아가 한국 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현종조까지 ‘우산국’ 자료가 나온다. 본 연구는 이에 주목하여 기존 통설을 부정하고, 우산국은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환동해 권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고대로부터 정착해온 원주민에 의해 건국되고 삼국시대와 고려 현종조에 걸쳐 존재하였던 강력한 해상왕국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울릉도의 역사는 1883년 개척령에 의해 시작되는 것 이 아니라 한국사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강인하고 지속적인 왕조인 우산국이 존재하였고, 우산국이 멸망한 후 고려와 조선시대 울릉도를 찾아 들어간 사람들이 그 전설을 되뇌이며 울릉도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가꾸기 위한 노력을 통해 우산국의 영화를 재현하려고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울릉도는 공도정책에 의해 버려진 섬이 아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강인한 정신성과 불굴의 투지와 모험정신으로 뭉친 사람들이 일구어낸 역사가 깃들인 땅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 것 이다. 이것이 울릉도가 주체가 되는 우산국의 역사 읽기이다.
        129.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섬의 소유를 결정하는 관습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구명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시도하게 된 이유는 “울릉도 쟁계(爭界)" 때에 일본 막부가 울릉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정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일본에서보다 조선에서 더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두루 알다시피 울릉도 쟁계가 발생한 것은 쇄환(刷還) 정책으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어부들에게 울릉도의 도해를 금지하고 있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이틈을 이용하여 일본의 막부는 호키주 요나고의 오야•무라카와 두 집안에 울릉도에서의 어채(魚採)를 인정하는 도해 면허를 발급했다. 그렇지만 이 섬에서 조선 어부들과의 조우로, 어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1693년 오야 집안에 고용되었던 어부들이 박어둔과 안용복을 납치해갔다. 이를 계기로 울릉도의 소유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조선의 예조에서는 1도 2명, 곧 조선에서는 울릉도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죽도라고 한다는 사실을 들어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야기된 분쟁은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 결론이 났다. 당시에 막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고, 호키주 요나고의 오야•무라카와 두 집안에게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이렇게 도해 금지령을 내리면서 제시한 것이 호키에서는 울릉도까지의 거리가 160리 정도인데 비해 조선에서는 40리 정도라는 지리적인 원근에 입각한 것이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섬의 소유를 결정할 때에 이런 관습이 작용했다는 사실은 광해군 때에 통신사(通信使)로 도일하였던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습은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에도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기타자와 세이세이(北澤正誠)의 『죽도고증(竹島考證)』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독도인 송도가 일본에 더 가깝기 때문에 일본의 섬임을 증명해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또 독도가 항해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빨리 등대를 설치해야 한다는 조언도 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1904년 나가이 요사부로에게 독도의 편입을 사주하면서, 망루를 세우고 해저전선을 설치하자고 했던, 당시 외무성의 정무국장이었던 야마자 엔지로(山座圓二郞)의 의견과 상통하는 것이어서, 그들의 독도 강탈이 일찍부터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그 과정에서 야마자는 독도가 일본에서 10해리나 더 가깝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견해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위키피디아(Wikipedia) 백과사전』의 지도에 의하면 오히려 한국 울진에서의 거리가 일본 마쓰에에서의 거리보다 5Km 더 가깝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은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더 가까운 지도를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어, 경제대국에 걸맞는 외교를 하지 않고, 제국주의적인 영토 야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해명하면서, 독도 문제가 한•일 간의 단순한 영토문제가 아니라, 역사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면서, 두 나라 사이에 존재했던 관습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둔다.
        130.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석간주는 적색과 적갈색 등 붉은 빛을 띠는 전통 광물성 안료로 주성분은 산화철이다. 석간주의 광물학적 특성과 기능성을 연구하기 위해서, 문헌에 옛 산지로 나와있는 울릉도 주토굴에서 석간주를 채취하였다. 울릉도주토굴의 석간주광석은 감람석현무암과 각섬석조면암 경계면에서 단속적으로 산출하며, 적갈색 또는 황갈색을 띠고 대체로 점토질이며 부분적으로 암편을 함유하고 있다. 석간주광석 중 적색은 적철석에 의한 것이며, 황갈색은 훼리하이드라이트에 의한 것이다. 울릉도석간주광석의 색상을 결정하는 산화철광물들은 고토양중에서 함철 수용액으로부터 훼리하이드라이트라는 광물로 침전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적철석으로 전이되었다. 석간주광석을 전통방식에 의해 안료로 제작하여 목재에 재현한 색상은 전통 건축물에서 측정한 붉은색 색상과 유사하였다. 울릉도석간주안료의 내습기능과 방염기능은 화학석간주안료에 비해 월등히 우수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연소시험에서 화학석간주안료는 발화와 연소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보였다. 울릉도석간주안료가 함유된 배지에서 목재부후균의 성장이 저지되는 경향을 보여 울릉도석간주는 방부성을 지닌 채색안료로 판단된다.
        132.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에서 나온 다케시마문제에 관한 조 사연구 최종보고서(2007.3)와 일본 외무성의 「竹島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2008.3.8) 팸플릿의 경우 독도영 유권에 대해 ‘17세기 고유영토설’을 내세우고 있다. 본고는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 위해 공도정책이란 용어 대신에 수토정책이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함께 일본의 17세기 고유영토설을 불식하기 위해 향후 수토정책에서 어떤 논리를 보강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 보고자 한 것이다. 일본의 17세기 고유영토설을 주장하는 울릉도로 건너갈 때의 정박 장이나 어채지로 이용하여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독도의 영유 권을 확립했고, 17세기말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지만, 독도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일 양쪽의 자료에서 일본 어부들이 전적으로 독도를 목표로 하여 어로활동을 했다는 자료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독도에서의 어 로활동은 울릉도를 근거지로 하여 이루어졌다. 일본 어부들은‘독도’만을 대상으로 해서 항해하지 않았다. 안용복 사건이후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온 사람들은 국제법 위반자들이었다. 그들은 1883 년 개척령에 의해 일본으로 소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882년 이전까지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들어가 살았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독도에까지 어로활동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발굴하여야 한다. 수토정책의 경우 일본으로 하여금 울릉도·독도가 우리 땅임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정책을 부각시켜야 하고, 그것을 공도정책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수토정책 의 대상에는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도 포함되었음을 드러내주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자료 가운데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았다는 자료는 제시되고 있지만 독도에 들어가 어로활동을 한 자료, 그리고 수토관이 독도를 심찰한 자료는 아직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료 발굴에 초점을 두어야만 한다.
        133.
        2008.1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seasonal variations of picoplankton including Prochlorococcus, Synechococcus and Picoeukayotes around Ulneung Island were investigated by flow cytometry in spring, summer and autumn in 2006. All groups of picoplankton showed clear seasonal patterns in population abundance. Among the group, Synechococcus showed the most prominent seasonal variation during the study period. The maximal abundance of Synechococcus occurred in summer and the lowest in autumn. The seasonal distribution of Prochlorococcus displayed the reverse tendency with that of Synechococcus. The abundance of Prochlorococcus ranged from 2.9×103 cells/ml in summer to 311×103 cells/ml in autumn. However, the seasonal distribution of Picoeukaryotes was shown to be relatively constant, and the maximal abundance was 81.5×103 cells/ml in summer. The highest abundance of Picoeukaryotes occurred in summer and the lowest in autumn and the seasonal distribution in abundance of Picoeukaryotes showed a similar trend with that of Synechococcus. The estimated total carbon biomass of picoplankton were ranged from 74.7 mgC/m2 to 1,055.9 mgC/m2. The highest total carbon biomass occurred in summer, but lowest occurred in autumn. The pattern of the contribution of three picoplankton to total autotrophic picoplankton carbon is different. The contribution of Synechococcus to total autotrophic picoplankton carbon is increased to 75%, but the contribution of Prochlorococcus dropped to 12% in summer. The contribution of Picoeukaryotes is ranged from 24% in summer to 72.5% in spring.
        134.
        2008.08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울릉도산 산채인 울릉미역취, 부지갱이 및 삼나물의 식품학적 가치평가와 활용증대를 위한 기본 자료를 얻기 위하여, 건조 산채분말의 일반성분, 유기산, 유리 아미노산, riboflavin, thiamin, 지방산, 카테킨 및 미네랄 성분 함량을 각각 분석하였다. 산채류의 일반성분으로 수분함량은 , 조단백질은 , 조지방은 , 조섬유질은 , 조회분은 를 각각 나타내었다. 유기산의 종류와 함량은 산채별 차이가 있었으며 succinic acid, citr
        136.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is carried out through ecological situation of native Bupleurum latissimum habitats and the research of environmental conditions for conservation of native sites, restoration of alternative habitats and preliminary data for application of useful medicinal plant. Native Bupleurum latissimum habitats were distributed on lower and middle part of the mountain from Altitude 54m to 185m, and the directions of slope were researched as usually northen and western slope. As a result of phytosociological research in 12 stands of native Bupleurum latissimum habitats, they were seperated to two communities(Bupleurum latissimum typical community and Bupleurum latissimum-Galium spurium community) in accordance with containable rate of the organic matter and soil hardeness. Soil condition is usually constituted as loamy sand and clay loam. Bupleurum latissimum is propagated in valuable soil conditions. Bupleurum latissimum lives with Morus bombycis, Reynoutria sachalinensis in Bupleurum latissimum typical community and Thalictrum aquilegifolium, Stellaria media, Hedera rhombea etc. is appeared with Bupleurum latissimum in Bupleurum latissimum-Galium spurium community. Especially, companion species were researched as Aster glehni, Dystaenia takeshimana and so on. The flora of vascular plants in this study is 44 families, 88genus 82species, 2 subspecies, 14 varietas, 4 forma and total 102 taxa. Plants of compositae occupied 10.78% among whole of them.
        137.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은 2005년에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제정했다. 이 날은 1905년에 <시마네현 제 40호>의 고시를 통해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고 하여 자국의 영토로 정한 100주년에 해당하는 날이다. 그것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서 <독도의 날> 제정 움직임이 있었고, 경상북도는 10월을 <독도의 달>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에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에 석도(石島), 즉 독도(獨島)를 편입한 날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이다.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때 우리 측의 협상당사자는 김종필(당시 중앙정부부장)이었다. 그는 1962년 11월13일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기자들에게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 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고 한다. 다케시마의 날 제정이 있던 작년에 한일회담 관련 문서가 공개되었을 때 우리나라 언론은 독도 폭파 망언의 진원지가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 측 대표단의 일원인 이세키 유지로 (외무성 아세아국장)가 회담 중에 제기한 것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세키 국장이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 회의 (1962년 9월3일)에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언론에서 이것을 다투어 보도하였지만, 김종필도 귀국길에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그게 뭐 대수라고 호들갑을 떠는가 싶었다. 정작 볼 것은 보지 못하면서! 정작 이번 한일회담의 문서 공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962년 2월 22일 회담 때 독도에 관한 언급이 일본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날 일본의 고사카(小阪) 외상은“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한국 측이 이에 응소할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김종필은 “하찮은 섬 문제를 일본이 심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희망을 박 의장(朴正熙議長)에게 전달하겠다.”고 했었다.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제안을, 시마네현 고시 의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킨 날을 기해 제기했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주목하지 못할까? 일본은 작심하고 그것을 제기하였는데도 말이다. 당시 김종필이나 회담에 임하는 우리나라 대표들이 이 날이 어떤 날이었는가를 기억한 사람이 있었을까?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종필은 <하찮은 섬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한일회담 비밀문서가 공개된 그 시점은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으로 인해 연일 언론에서 독도 문제를 다투어 다루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 나 우리나라 언론은 한일회담 기사를 다루면서 2월 22일이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확정한 날, 그리고 <다케시마의 날>이 라는 점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독도 폭파를 누가 제기한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고 호들갑을 떨었다. 10월 25일은 <독도>를 우리나라 땅이라고 국내외에 천명한 날이다. 독도를 논할 때 울릉도 개척령을 공포한 1883년은 아주 의미 있는 해 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시점은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에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울릉도의 관할구역으로 확정한 날이다. 1883년 개척령 공포 이전의 독도와 울릉도는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의해 빈 섬, 버려진 땅이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독도 자료를 들여다 보면 공도정책이란 잘못된 용어이다. 쇄출(刷出), 혹은 수토정책(搜討政策) 이라고 하여야 한다. 1883년 이전의 쇄출, 혹은 수토정책에 관한 자료 의 검토를 통해 독도 ․ 울릉도에 들어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내법 위반자인데 반해, 일본인들은 <월경죄인(越境罪人)>으로서 국제법 위반 자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아가 1883년 개척령 공포로부터 1900년의 칙령 제41호 반포에 이르기까지의 독도 자료의 검토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내적으로도,국제적으로도 합법적 활동을 한 것임에 반해 일본인의 활동은 국제법 을 위반한 것이었음을 천명하고자 한다.
        138.
        200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Non-native flora of the Ulleung island, located in the eastern part of South Korea, was surveyed as 54 taxa with 16 families, 35 genera, 53 species and 1 variety. Considering the geographical distribution aspects of the island, the flora of the island showed more closely related with Korean Peninsular than Japan. Poaceace (28%) and Asteraceae (24%) represents more than 50% of the non-native flora in Ulleung island, meaning that they have an advantage of seed dispersal and adaptation to new environments. Ulleung island is comparatively small island of vulnerable to the attack of invasive alien plants but presently, it has the least number of non-native plants than other areas in South Korea. Therefore, we need to take much interest in prevention and mitigation of non-native plant in the future.
        139.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이제까지 선행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메이지 시대 문헌들을 중심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 본 것이다. 독도의 일본에 대한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분리하여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였으나 독도는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근대국가형 성기에 과연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본 논문은 메이지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은 전 통시대와 마찬가지로 울릉도를 중시하였을 뿐으로, 울릉도개척논의는 존재했으나 독도를 단독으로 주시한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당시 메이지 지식인의 언설에서 볼 때 울릉도와 독도를 동해상에 위치한 두 섬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따로 떼어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점, 메이지 시대 이전과 이후의 지도자료를 통해 볼 때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일본의 영토로 간주한 지도도 있지만 이 두 섬을 조선의 영토로 간주한 지도, 혹은 아예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되지 않은 지도가 존재했으며 메이지 시대 지도에도 독도를 일본의 영토권 내로 표시한 지도는 없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배타적 영토관념이 희박했던 시대에 독도에 대한 관심이 불명료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즉,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영토편제하기 이전인 19세기 후반기에 일볹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한 흔적은 없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140.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독도에 대한 역사ㆍ지리적 인식을 밝히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이 연구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문헌 자료와 구전 자료, 그리고 지도들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성과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하나의 세트로 인식하여 왔는데,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독도에 대한 실체를 별도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한국은 일찍부터 울릉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본은 상대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식을 근대에 들어서 가지기 시작하였다. 셋째 한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울릉도는 울릉도로, 독도는 우산도로 인식하였으며, 이들 두 섬에 대한 위치와 크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졌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이들 두 섬의 명칭부터 혼란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정확한 지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넷째 일본은 독도가 무주지였기 때문에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무주지는 생활권을 함께 하는 곳에 속한다는 원칙에 따라, 울릉도에 속한 섬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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