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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국 장로교 여성 가운데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최덕지 (1901-1956)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무너진 한국교회를 회복 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전개한 교회재건 운동을 살펴보고, 그의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지금까지 대체로 매우 부정적 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극단적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최덕 지의 재건운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교회론에 대한 깊은 신학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본고는 이런 연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시도 이다. 최덕지의 교회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의 교회재건 운동을 해방 직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위치시키고 ‘도나투스파 교회론’을 해석학 적 도구로 사용하여 그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최덕지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재건운동과 재건교회 설립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그의 교회 론에 도나투스주의와 매우 유사한 성격-장점과 한계 두 측면 모두에 있어 서-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은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 해서는 큰 공헌을 하였으나, 교회의 일치 유지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야말 로 보다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공헌이 한계보다 훨 씬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덕지의 교회론이 지금 주님의 몸을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찢어놓고 만신창이로 만든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실로 무겁다. 참된 교회의 회복 을 위해서는 ‘일치를 해치지 않는 거룩성’과 ‘거룩성을 해치지 않는 일치’ 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분열된 현실의 뿌리 이해와 일치의 길 모색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이후 북한교회가 직면하게 될 해방직후와 유사한 배교자 치리 문제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22.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한치진이 『基督敎人生觀』을 통해 1930년대 한국교회의 문제 점을 진단하고 그 개선방안을 제시한 논지를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연구에서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基督敎人生觀』 뿐만 아니라 본 주제와 관련된 다른 주요 문헌들도 참고할 것이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에 출판되었으며 기독교윤리관에 입각하여 저술되었다. 그는 목사도 신학 자도 아닌 평신도의 위치에 있었지만 기독교윤리에 뛰어난 지식을 갖춘 인 물이었다. 한치진의 저서 『基督敎人生觀』이 남긴 중요한 교훈들을 정리하 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혁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당시 한국교회가 여러 방면에서 심각 하게 타락했다는 점을 직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개혁해나가기 위 해서는 먼저 교회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내적 부패상부터 척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둘째, 실천적인 관점이다. 한치진은 엄격한 규범을 제시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선행을 추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을 따라 기독교윤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저서에 높은 실업률, 젊은 세대 교육, 병약한 환자들, 삶과 노동, 파시즘과 권위주의 등 다방면 에서 윤리적 주제들을 담았다. 셋째, 세계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교회는 반드시 만물의 궁극적 중생(重 生)을 고대하면서 현세와 지복(至福)의 내세 양 지평에 동등한 관심을 가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가 향후 한치진의 ‘기독교 윤리관’, ‘기독교 심리학’, ‘기독교 교 육학’, ‘신앙적 사고’ 등의 연구 작업으로 더욱 확장되어지기를 기대한다.
        123.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이다. 독일의 루터10년 프로젝트처럼, 한국교회 역시 많은 학술 심포지엄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종교 개혁 내지는 루터 신학의 세계적인 의미를 찾을 것이다. 본 논문은 루터의 신학에서 “무엇이 종교개혁적인가?”를 다루었다. 관점에 따라서 루터 신학 의 핵심은 다르게 선택될 수도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염 두에 두었고, 그 결과 루터 신학의 바른 이해와 적용을 위해 ‘이신칭의’, ‘십자가 신학’, ‘만인제사장직’을 선택하여 논했다. 칭의의 조건은 그리스 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렇지만 칭의는 종결이 아닌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시작이다. 신자의 거룩한 삶이 칭의와 더불어 시작되고, 이 세상에서 생을 다하기까지 함께 간다. 그것이 무엇이건 인간이 할 일이 있다면, 칭의 이후의 일이며, 칭의 이후의 일이 역으로 칭의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즉 칭 의를 위해 인간이 할 일은 없지만, 거룩한 삶은 칭의와 더불어 가는 것이 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의 일하심의 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한다. 이것은 가시적인 것 혹은 외적인 권위와 규모 를 통해 신을 파악하려했던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 내지는 스콜라신학을 거부한다. 물질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존성, 기복 및 개교회 지상주의 는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인제사장직은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적 평등의 선언이자, 직업 활동 을 통한 소명의 성취를 요구한다. 한국교회 역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이 분법적 틀을 희석시켜야 하며, 동시에 교회 밖 직장과 사회에서 직업 소명, 즉 제사장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자랑스런 유산을 물려받은 프로테스탄트의 후예이다.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 십자가 신학, 만인제사장직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여 교회의 교회됨을 회복하는 분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124.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시리아 내전 이후 난민은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 었고, 이 문제가 교회와 사회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원하건 말건 간에, 난민문제는 이미 다가왔고, 전 세계로부터 이에 대한 책임을 요구받고 있다. 사실 난민문제는 성경과 교회역사 가운 데 항상 접해왔던 유구한 문제이며, 특히 세계화 현상을 맞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더욱 인식되기 시작한 문제이다. 급기야 2016년 브라질 리오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에서는 난민들이 한 팀을 이뤄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런 맥락에서, 우리는 종교개혁가 칼뱅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난민사역의 한 측면을 들여다보았다. 본 논문은 칼뱅을 종교난민, 난민목회자, 난민사역의 관점에서 살펴보았 다. 먼저 칼뱅은 종교난민이었는데, 그는 이방인에서 이웃으로 다시 시민 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난민의 정체성을 지녔고, 그것이 그의 신학과 사 역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칼뱅은 난민목회자였는데, 그는 난민목회에 대 한 문제의식을 지녔고, 이를 해결하고자 구조와 사역자를 마련하였다. 이 런 칼뱅의 난민사역의 유산을 검토하면서, 난민의 정체성, 난민의 연대, 상 황과 목회라는 교훈과 도전을 살펴보았다. 특히 칼뱅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난민 나아가 이주민이 경험할 이주, 추방, 외국인혐오 등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었으며, 따라서 환대의 신학 의 중요성이 다시금 대두되었다. 더구나 기독교가 중심이 아닌 주변의 위 치에 설 때 신학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도전도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교회 도 난민사역의 근거가 되는 난민신학을 구성하고, 난민사역을 개발해야할 당위성에 직면하고 있다. 이주민, 특히 난민은 이동, 즉 이주와 관련된 존재인데, ‘이동 중인 인간’ 은 가장 위약한 존재이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복음에 대 한 수용성이 가장 높은 존재이다. 따라서 난민은 마태복음 28장의 복음선 교는 물론이고 마태복음 25장의 긍휼선교의 우선적인 대상이요, 또한 주체 인 것이다.
        126.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MCC)는 1951년에서 1971년까지 한국에서 구제와 교육 사역을 해 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1920년 조직된 이후 전 세계의 분쟁지역 사람들을 구제하기 시작하였고,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제사역을 펼쳐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농업, 물공급, 집 짓기, 보건, 직업 창조, 평화 세우기, 교육 등이다. 이런 활동과 함께 그들은 전 세계의 수많은 다양한 기구들을 파트너로 삼아 지원하고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평화 선교’ 정책에 기초하여,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인 모든 차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한국과 관계를 시작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7월에는 한국대표부를 대구에 설립하고 경산에 농장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국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 네 가지는, 물자구제 사업, 직업학교, 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 전쟁 과부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 등이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의 사역은 제자도에 기초하여 공동체 안에 평화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사역의 구체적인 모습이 개인과 가정과 마을과 한 국가에 대한 구제와 개발이고, 구제와 개발이 지향하는 바는 평화인 것이다. 이 구제사역은 곧 평화를 주고 나누고 세우는 사역이었다. 구제사역과 평화사역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한국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모든 욕구를 포괄하는 선교인 ‘메시야의 평화 선교’에 근거해서 한국전쟁 시기 한국에서 그들의 평화사역을 시작하였다. 진정한 평화는 ‘일용할 양식’과 ‘공동체’가 그 기초이다. 그들은 신앙교육은 하되 교파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설립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메노나이트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들어온 한국의 교회들을 존중했고, 한국교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감당해 주었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섬겨 준 것이다.
        127.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젠더이슈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1920-30년대 기독교가 젠더담론 형성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관한 연구이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근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신여성의 등장과 ‘여성해방’의 전위를 자처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기독교가 선점해왔던 ‘남녀평등의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적 ‘진지’를 어떻게 지켜나가고자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더불어 「신학세계」, 「신학지남」, 「기독신보」 등 대표적인 기독교 정기간행물들에 실린 글들을 분석하여 일제 식민치하에서 형성된 기독교의 근대담론이 저항담론이 아닌 서구적 근대이념에 종속된 또 하나의 식민담론이었음을 밝힌다. 기독교계는 선교를 위협하는 ‘신사상들’로부터 기독교 대중들을 지키고 기독교의 외연을 확장해나가기 위해 새로운 담론전략이 필요했다. 대중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전기장르를 통해 ‘남녀평등’과 ‘인류애’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임을 설파하고 이를 실현한 역사적 모범으로 영미권 여성들을 소개했다. 다음으로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두각들 드러냈던 여성들의 역사를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소개하면서 기독교야말로 남녀평등의 종교임을 재차 확인시켰다. 또한 개인의 도덕성 계발의 강조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사회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대중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기독교가 취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덕분에 기독교는 ‘남녀평등’이 근대사회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임을 주지시키고 젠더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불을 지피는데 공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드러난 기독교계의 담론전략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또 다른 방식의 식민화를 초래하는 종속구조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로부터 단절을 강요받고 있던 조선의 대중들이 영미권 역사와 영미권 여성들의 업적을 근대의 이상적인 모델로 동경하게 만들었다. 또한 일제의 억압정치와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외면한 채 ‘자발적 헌신’과 ‘이타적 희생’만을 강조한 담론전략은 식민체제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억압적 현실에 스스로 순응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젠더 논의에 있어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조선사회가 처한 현실과 교회의 실질적인 문제들이 논의의 중심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29.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is a critical analysis on the 10 Years (2002-2012) of the denominational activities since the 5 Districts were merged into one national district of the Church of the Nazarene in Korea.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earch for an advanced way to promote Church of the Nazarene for effective church growth in the coming era in Korea. For this purpose it attempts to evaluate the efforts and results of the unification of the five districts into one in relation to history and church growth of the denomination. Indeed, the merging of the five districts into one was a historical event in the mist of divisions and conflicts of the churches and denominations in Korea. Also the merging event was a distinctive model for innovative cultural adapt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international Church of the Nazarene. This essay discovered some positive results from the unification, that enhanced the identity of the Nazarene Church, administrative consolidation for ordination process, church planting, and unified relations with the international church as well as Korea Nazarene University. However, still the unified church needs an innovative dimension of leadership system for effective church growth. This essay proposes that the pyramid model of the unified church needs to be transformed into an organic or post-hierarchical system. Already, the name of “International Headquarter of the Church of the Nazarene” was changed to “Global Ministry Center” to abolish the existing pyramid model of leadership toward organic model, which is the fundamental Biblical model of leadership for effective church growth. This essay insists that Nazarene Church in Korea also needs to work on having a less hierarchical system of the Church for effective church growth, that is one of the main movements of postmodern evangelical churches,
        130.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is a study on the curriculum of church history of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from 1901 to 1935.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was established in 1901. The seminary was built for the spread of the gospel not for the research of theology. W. L. Swallen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seminary and he wrote the first textbook of church history in the Korean language in 1913. The book was entitled Kyohoisaki (敎會史記) : the Book of Church History. The editorial system of the Kyohoisaki was a dictionary of history.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the book was evangelical. A new text of church history of Presbyterian Seminary was published in the 1930’s. The new text’s theological foundation was evangelical, the same as Swallen’s text. But the level of study of church history was developed further. The new text included the advanced objectivity of historical description, methodology of history and the system of editing. The Presbyterian seminary could offer the academical curriculum of the church history in the 1930’s.
        131.
        2011.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t was in the year of 2010 that the news, which the thirteenth General As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ould be held in Pusan in 2013, was reported. Since then,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community has been extremely divided. While many Christians welcomed the news in jubilation, some opposed it in anger. Those church leaders and theologians in opposition have said that the WCC denies the orthodox doctrine of proselytism and promotes a religious pluralism through its program of dialogue among various religions The WCC’s theological orientation, they argue, “anti-Biblical, anti-Christian and anti-church.” The WCC’s theology and ecumenical movement ia “a Satanic challenge to the church. Therefore, they oppose the scheduled General Assembly of the WCC. However, their seemingly theological argument and accusation is, it seems, is political rather than theological. An anti-WCC movement in Korea, which began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more specifically after the north-south division, was also begun not by theologians but by some politicians and ultra-conservative church leaders during the Korean War in Pusan. This article aims to explore this historical context in which the anti-WCC movement was begun. Who did initiate it, when and why? This article thus discusses such concepts as the Cold War, the emergence of a new world order, the division of Korea, the Korean War, McCarthy’s anti-communist hysteria, ‘red complex and so forth. All of these elements brought about a new doctrine that communism is anti-Christianity and Christianity is anti-communism. In this peculiar historical context, a strong militant anti-communist element is so strong in the Korean church community that some church leaders have stood militantly against the WCC.
        132.
        2010.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절대적인 수적우세에도 불구하고 교회음악에서 여성의 역할은 젠더 화된 구조아래 리더십의 부재라는 현상으로 특징 지워진다. 한국교회음악에서 일어나는 젠 더역학은 음악을 여성의 영역으로, 말씀을 남성의 영역으로 이분화 된 음악의 사회적 의미와 도 연관되어 있다. 이글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초기한국교회시기에 여성 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정체성을 이루어 갔는지를, 노래하는 여성, 찬송가사 작 사자, 그리고 반주자로서의 영역으로 나누어 알아본다. 초기한국교회에서 여성들은 찬송을 노래하면서 강요된 침묵의 안방으로부터 공적인 공간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찬송가사 작사 를 통해 창작능력을 표출하였으며 풍금과 피아노 반주자로서 전문음악가로서의 가능성을 찾 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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