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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
        201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성봉은 신자가 회개의 십자가와 체험의 십자가, 그리고 율법을 극복한 십자가와 자신과 세상을 매장한 십자가를 발견할 것을 늘 강조하였다. 그 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십자가의 이런 단계적 체험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 이다. 본고는 이성봉의 생애와 설교, 사역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십자 가의 도의 여러 단계들을 논하였다. 십자가 신앙은 이성봉의 설교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생애 전 과정에서 적용되고 구현되었다. 그에게 십자가는 실 제였고 전체였다. 오늘날 십자가의 도가 “죄 용서”라는 기초적 수준에서 취급되는 하락한 교회 상황에서 이성봉은 십자가가 모든 것임을 말로써 삶 으로써 죽음으로써 보여주었다.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나약한 죽음만이 아 니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구속을 위한 심판의 제물로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렸고 성령은 그분의 보혈을 취하여 살아 있는 피가 되게 하여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의 증표가 되게 하셨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로써 아담 안에 있는 모든 부 정적인 것들을 다 처리하셨다.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도 끝냈고 자아도 종 결시켰고 세상도 종식시켰다. 이성봉의 사역이 진실로 가치 있고 회상 되 어야할 이유는 부흥사역의 횟수와 결과라는 단순한 외적 성취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로써 승리한 사역자였기 때문이다.
        142.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
        143.
        2015.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양의 문학계에서는 옛날부터 “시는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통용되 었다. 작가의 사상, 감정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인격까지 그의 작품에 반영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진암 이병헌(1870-1940)은 유교 개혁론이나 공자교 운동으로 널 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60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시인기이 도 하다.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병헌의 종합 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작품에 대한 연구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 글은 그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그의 시집에 실린 작품의 연구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이를 위해 그의 시에 나타난 주제 의식의 분석을 통해 작품 전반적인 성격을 규명하였으며, 시의 풍격을 고찰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문예적 성취를 확인하였다. 주제 의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자신이 세상에 받아들 여지지 못하여 느끼는 불운한 감정인 身世之感, 둘째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시기를 살아가면서 견지한 우국 정신, 셋째는 유학자로서 유교 정신을 작품에 구현하는 것이다. 풍격에 드러난 문예미의 특질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느낀 幽鬱과 慷慨이고, 둘째는 철 저한 수양을 거친 유학자로서 가지고 있는 平淡과 典雅이다. 유울과 강개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후천적인 풍격이고, 평담과 전아는 서정시 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선천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된다.
        144.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紫雲 李宜翰(1692~1766)의 삶과 학문경향에 대해 조명한 것이다. 18세기 밀양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의한은 평생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향촌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處士型 학자이다.그는 碧珍將軍 李忩言(858~938)으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문학, 그리고 절조와 의리를 중시하는 家學的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嶺南學統의 큰 주류인 葛庵-大山의 학통과 寒岡-眉叟 학통을 계승한 近畿南人의 학통을 兼攝하여 자기 나름의 학문세계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젊은 날에 관심을 가졌던 文章學에서 50세를 전후하여 爲己之學으로 학문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론 性理學에 치중하기보다 일상적인 삶속에서 자신이 배운 학문을 실천하는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집에는 마음의 수양과 관련한 글이 없지 않지만, ‘當世의 文衡’으로 평가를 받았던 만큼 公的이고 실용적인 문장을 다수 창작하였다. 이는 이의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밀양 지역의 鄕風 振作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로서의 소임과 책무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었다.
        145.
        2014.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paper has carried out a study on “Children head theory” and “Thatched cottage biography”, the two hanmun compositions on Kim Jin Yang published in the late Goryeo period. By studying the texts, the relationship between Kim Jin Yang and the two authors, and the creation date, the author of this paper has analyzed the structures, forms, styles, and writing tactics of these two compositions, trying to investigate the differences in between. An conclusion is drawn that the difference of these two compositions lies in their genres, one is "theory" and the other is "biography ". Kwon Geun and Lee Sung In eulogized Kim Jin Yang not only ecause of their friendship, but his frugality which is advocated by the scholars. Kwon Geun’s “Children head theory” described the liberal, high-spirited and vigorous young Kim Jin Yang by using a pleasant tone and a lively atmosphere. This composition is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ancient Chinese "theory", which is much more like a “miscellany”, this is the Goryeo type of "theory". The Lee Sung In’s “Thatched cottage biography” describe the later years of Kim Jin Yang, so the atmosphere of this article is quite plodding, aiming at sketching out Kim Jin Yang’s aloofness and he can take the rough with the smooth even after his dismissal. This composition is also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ancient Chinese "biography". Both two compositions not only helped to research the Goryeo scholar Kim Jin Yang, but also has a great importance for study the hanmun "theory" and "Biography"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from the end of the Goryeo to the beginning of the Chosun.
        146.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회당 이이두는 퇴계 사후 寒岡 鄭逑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여 퇴계의 학통이 밀양사림들에게 주류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리고 퇴계 학통의 또 다른 한 맥인 학봉 계열을 계승한 갈암 이현일과는 교우관계로 아들을 갈암에게 배우도록 인도하기도 하였다.남회당 이이두의 생애는 ‘孝友’로 대표할 수 있는 생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학��을 통해 법도를 익히고 조금의 어김도 없이 몸소 실천하였다. 부모님이 살아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봉양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팔십이 다된 노구로도 조상을 섬기는 예를 어김없이 실천하여 지역의 유림들에게 존숭의 대상이 되었다. 남회당은 부모에게 뿐만 아니라 형제에 대한 우의 또한 깊어 만년에 친가의 작은 터에 오두막을 짓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제들을 그리워하여 ‘覽懷堂’이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남회당은 시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특히 그가 지은 賦 5편은 다른 작가들의 문학작품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문학성과 작품성이 있었다. 그의 시에는 부모와 형제에 대한 정과 자연속에서의 은일과 자적, 학문에 대한 열정 등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의 부 5편은 그의 문학적 지취와 학문적 역량이 집약된 작품으로 조선중기 이 지역 한문학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147.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8.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500년대 초반에 密陽 來進에 奠居한 星山君 李軾의 후손들인 碧珍李氏 麗隱亭派 來進 家門은, 500여 년 동안 동족 마을을 이루어 世居하며 士林家門의 표본이 되어 왔다.이후 계속해서 많은 學者들이 나와 文集을 남겼고, 고을의 鄕校와 書院에 적극 참여하여 士論을 주도하였다.그리고 家訓을 만들어 子孫들을 교육하여 조상의 좋은 점을 배우고, 同族間에는 화목하게 지내고, 나아가 鄕約을 실시하여 鄕風을 先導하는 등 선비정신의 수립과 보급에 誠力을 기울였다.通國의 著姓인 碧珍李氏 가운데서 麗隱亭派 來進 家門은, 국가민족이 戰亂에 휩싸였을 때, 올바른 지도자인 王建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키고 民生을 구출한 시조 碧珍將軍 李忩言, 詩文과 學問으로 中國에까지 이름을 떨친 山花 李堅幹,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킨 麗隱亭 李思之, 反正功臣이면서도 榮達보다는 恬退에 가치를 둔 星山君 李軾, ��小學��으로 子孫敎育에 성공한 泗濱 李繼胤, 자기 자식보다 宗家를 더 생각한 李貴生, 자식의 科擧 合格 취소에도 초연했던 覽懷堂 李而杜 등 훌륭한 조상을 많이 두었다. 이러한 事行들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고의 德目이다. 이런 훌륭한 조상이 있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후손들이, 來進 家門의 名聲과 位相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이는 단순히 碧珍李氏 來進 家門만의 精神的 資産이 아니고, 혼탁해 가는 人類社會를 구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精神的인 좋은 慈養이 될 것이다.孝友를 위주로 한 倫理道德을 중시하고, 學問을 숭상하고, 學者를 우대하고, 자기 가문은 물론 향촌을 先導하는 전통을 유지해 나가는 집안이 좋은 집안이다. 곧 선비정신을 충실히 실천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많이 나오는 가문이다. 碧珍李氏 來進 가문이 이런 선비 가문의 전통을 모범적으로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149.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mong twentieth-century Korean writings in English, those of Professor Insoo Lee are singularly impressive for their particular combination of wit, well-reasoned argument, and mastery of subtitles of English idiom at all levels. The importance of T. S. Eliot as perhaps the most influential English or American poet of the twentieth century is established. Professor Lee is, of course, well known as the translator of Eliot’s The Waste Land into Korean. His rendering of the defining poem of the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stands today as a monument in the history of Korean translation. Eliot had influenced the works contained in the volume Inside Cloud Cuckoo Land: The Voice of Korea, containing the collected essays, translations, and journalistic articles produced by Professor Lee. Each also was a force for assuming personal moral responsibility in an age defined by warfare, by the trauma resulting from warfare and destruction: the period of World War I and II and the challenges of the subsequent so-called Cold War, and by a general moral lassitude in the era. The English language writings of Professor Lee attest not only the general influence of the era in which Eliot wrote, they also reveal some of the themes and turns of phrase that characterize the writings of Eliot.
        150.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정부는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지만, 일본은 매년 방위백서를 발간하면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종래 한국정부는 ‘조용한 외교’를 기조로 하여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면서 독도의 배타적 영유권에 대한 특별한 가시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광복절을 5일 앞둔 2012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독도에서 ‘독도는 우리땅’임을 천명하여 독도의 실효적 지배 강화를 위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행위가 국익을 위해, 독도의 배타적 지배를 위해 절실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본고는 영남지방의 대표 신문인 ≪매일신문≫과 ≪영남일보≫를 대상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한 기사의 보도 유형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독도방문의 배경과 저의를 알아보고자 했다. 일왕사관 발언 등 쟁점별 보도 경향을 분석한 것은 언론의 취재와 기사 작성, 그리고 저널리즘의 사명감 등을 동시에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양 신문은 지방신문이라는 동질성이 있는 반면에 각기 고유성과 정체성이 있었다. 독도 관련 기사를 정치적 성격으로 배열하고 보도하는 경향과 기사의 수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또한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해 환영일색의 보도를 유지하면서도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매일신문≫보다 ≪영남일보≫가 상대적으로 중립과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매일신문≫이 ≪영남일보≫에 비해 연합뉴스 기사가 적은 것은 기사의 재생산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일왕사과발언과 위안부 등 역사인식의 기사 보도에서도 일방적인 긍정과 중립적 입장의 상대적 차별성이 있었으며, 영남지역민들의 반응을 보도하는 면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났다. 양 신문은 지방신문으로서 가지는 공통된 입장과 신문사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대구경북지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언론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151.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의령지역을 대표하는 학자 西岡 李中厚의 생애와 시세계를 다룬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張福樞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으나 중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건강의 회복에 힘을 썼다. 그는 요양에 집중하는 동안에 다른 한편으로는 근검절약하여 가산을 모았고, 부친의 유명에 따라 종족이 돈목하게 지낼 방책으로 別莊을 지어 집안의 大小事를 의논하고 도왔다. 이렇게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평생의 심력을 다한 그에게 자제들이 별장 곁에 西岡精舍를 지어주었다. 그는 만년에 이곳에서 그간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하면서 집안을 다스렸는데,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가업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다. 그는 이처럼 질병과 가산을 모으는 일에 힘을 썼지만 선비로서의 도리는 잊지 않아 인근의 지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輓詩가 100여 편에 이르고, 또 공부하고 요양하는 여가에 벗들과 모여 명승을 찾아 즐기기도 하였는데 이 때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시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는 상당히 수준에 이르러 그와 절친하게 지내던 深齋 曺兢燮이 시에는 情來·氣來·神來의 三來가 있는데 그의 시는 이것을 거의 이루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시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輓詩는 일반적인 만사와는 달리 자신의 슬픈 감정과 마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고인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어떤 시는 만시라기보다는 고인의 일생을 정리한 誄詞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 많다. 반면에 次韻詩는 다른 사람이 지은 시를 따라서 짓는 제약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서정적인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많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152.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object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main outline of Sujeong Lee’s thoughts of Christian faith and passionate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through his two articles, “Confession of Faith” and “Conditions in Korea”. Sujeong Lee who became an associate member of the Korean delegation to Japan, headed by Younghyo Park(朴泳孝) arrived in Japan on September 29, 1882. He met Dr. Tsudasen(津田山), a Japanese scholar of agriculture. And he was much impressed by Tsudasen’s deep-rooted faith and sincere piety to God. As a result, he had so much interest in Christianity and dedicated to studying the Bible and various Christian books. By studying these books, he sought after the essential truth of the Christian faith. Through Japanese faithful Christians he was brought into contact with George W. Knox, Robert S. Maclay and Henry Loomis who were pioneer missionaries in Japan. And on April 29, 1883, he was examined by Yaskawa(安川亨) and baptized by George W. Knox. While he was in Japan, he devoted himself to various Christian activities and studied Christian doctrine to increase his knowledge of Christian truth and faith. As soon as Sujeong Lee found a new truth and sublime faith in Christianity, he was eager to propagate the Gospel to Korea from the bottom of his heart. When he believed in Jesus Christ he confessed his faith to the missionaries and Japanese Christians through the famous article(“Confession of Faith”, 「信仰告白書」) that he wrote with all his heart and soul in May 1883. And then, seven months later, he wrote another remarkable article (“Conditions in Korea”, 「宣敎師派送呼訴文」) on December 13, 1883 to appeal to American Christians for mission to Korea.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the main thoughts and principles Sujeong Lee left behind us through “Confession of Faith” and “Conditions in Korea”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s: ① the principle of ‘internal combustion & extension’: There is organic corelation between Sujeong Lee’s internal faith and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② triple methodology of effective mission for Korea: ‘Bible translationestablishment of church-inviting missionaries’ ③ conservative faith: Sujeong Lee stressed the belief of apostolic faith, sola scriptura, sola gratia, and sola fide. ④ plea for mission to Korea: Sujeong Lee was called a Korean Macedonian, since he had showed strongly his earnest desire for American Christians to send their missionaries to Korea. ⑤ indignity of mission: Sujeong Lee, the native Korean fully committed himself to the ministry of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 ⑥ attempt to provide efficient policy for early mission to Korea: Sujeong Lee put a strong emphasis on Christian education. ⑦ mission initiated by Korean: Sujeong Lee was the pioneer Korean Christian.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his great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es: First, he translated the Bible into his native language. When Henry Loomis, the American Bible Society directing manager in Japan had asked Sujeong Lee to undertake the translation of the Gospels into Korean, he was pleased to accept it. He then began, with the help of Chinese and Japanese Bibles, to translate the Scriptures into Korean such as ‘Hyeon To Han Han Shinyak Seong Seo’(4 Gospels and Acts, 1884), ‘The Gospel of Mark’(‘Shinyak Maga Bokeumseo Eonhae’, 1885), ‘The Gospel of Luke’(1885), ‘Romans’(1885) and so on. He believed with absolute certainty that the Korean Bible would be an effective means for extending the true Gospel to Korea without distortion. And he also expected that the Korean Bible would provide an effective tool for the early missionaries to propagate the Gospel to Korea. Horace G. Underwood, Henry G. Appenzeller and William B. Scranton, coming to Korea through Japan, had in their hands ‘Shinyak Maga Bokeumseo Eonhae’ in the Korean language. Second. he shared the Gospel with Korean students in Tokyo and opened the Korean Sabbath School in 1883 for Christian education. He taught them the Bible and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Third, he appealed to American Christians for mission to Korea. He showed actively his ardent desire to send American missionaries to his motherland as soon as possible. So he was called a Korean Macedonian. As a result of his efforts, the first ordained American missionaries, Horace G. Underwood and Henry G. Appenzeller came to Korea on April 5, 1885. These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show that the early Christian mission activities in Korea was started by Sujeong Lee, the pioneer Korean Christian.
        153.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Lee Chang Hoi (Lee) was born in 1872 at Namyang. He became a christian in the early period when the gospel was spreading in the region. After conversion he worked hard for the modern education movement in the influence of George Herber Jones. Hong Seung Ha founded the Hoheung elementary school with Jones’ donation in 1901. The school was managed by Lee who established Powell school in purpose of teaching English in 1902. Lee managed nine day schools within nine churches which were founded by Hong Seung Ha. He also served as an exhorter in Namyang church, and worked as an assistant worker for a year in 1906. He later became the evangelist from 1907 to 1910. After 1906 he developed Boheung school as a central school in Namyang. He managed the school with general level edcuation department, high level education department, and measurement education department, and tried to keep Namyang redisents’ wealth from the intrusion of Japan. He held the United Sports Day gathering people from the surrounding elementary schools to inspire the patriotism. Some Japanese called Boheung school as a rioter training center for this reason, and insisted closing down the school since it was growing as a center for anti-Japanese thoughts. Lee also participated founding Sangdong elementary school, and he was directly and indirectly engaged in managing other schools. He also ran the evening school in Boheung school for children who couldn’t study in the daytime. He also worked as the principal of Sangdong evening school. He established the Namyang branch of Daehan-Jaganghoi for the progress of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The group protested against the Japanese economic invasion with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He was in ministry from 1913 to 1916 at Namyang church. He supported the neighboring churches not only to stand independently but also to found schools. He also inspired other people to build churches in the churchless areas and to teach the biblical knowledge and Hangul by running the Bible Classes. He became a circuit pastor of Namyang and Osan in 1916 and transferred to Gwangju in June 1918. When he was in ministry of Gwangju,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broke out. As he participated in this movement, he was arrested and in jail for 4 months. After he was released for the lack of evidence, he met Lee Dae Jung who raised the independence funds with him. However, Lee got arrested due to the fund raising activity and got sentenced to two years in prison. He was a pastor who fostered the patriotic enlightment movement into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and Independence Movement.
        154.
        2012.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모자이크 모음곡≫은 이상근이 1960년대 초 미국연수 이후 작곡한 것으로 서양현대음악 기법 의 본격적인 시도들과 함께 12음기법의 체화를 위한 도전으로 시작된 작품이다. 그의 자평에서 출 발한 본 논고는 이상근의 12음기법 사용과 작품의 특징을 ‘양식의 혼합’이라는 맥락에서 설명한다. ≪모자이크 모음곡≫에서 나타나는 양식의 혼합은 12음기법과 선율에 내재된 한국 전통 음악의 요 소 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혼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12음기법의 수용에서 나타나는 상대적으 로 자유로운 기법의 사용, 음렬에서 발견되는 이상근 특유의 음정작업과 화성 유형들 또한 이 작품 에 깊게 배어 있는 이상근식 음악 양식의 혼합으로 풀이하였으며, 동시에 서양의 새로운 기법을 독 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려 했던 노력의 산물로 평가하고 이를 이상근의 음악에 담겨 있는 한국음악 의 현대성으로 해석하였다.
        155.
        2012.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한국의 대표적 작곡가로서 서양기법을 수용하였으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이를 한국 적인 것과 혼용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던 이상근의 피아노 작품 중 우연성 음악인 《피아 노를 위한 투영 Ⅰ》과 《투영 Ⅱ》의 음고 구조를 분석·고찰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본 논문에서 는 한국적 음향을 완전 4도 음정에 해당하는 ‘음정류 5’와 이의 확장인 ‘새야화현’을 집합류 (027)의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그 결과 《투영 Ⅱ》는 음정류 5를 중심으로 확장된 집합류가 선 율, 화성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적 음향을 서양적 어휘와 적절하게 혼용하여 작곡자의 독창 적 스타일을 구축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투영 Ⅰ》은 음정류 1 중심의 반음계주의와 음 정류 6이 조화를 이루어 선율, 화성, 성부진행, 그리고 12음고의 체계적 구상을 이루는 현대적 성향 이 강한 작품임을 시사한다. 이상근은 《투영 Ⅰ》과 《투영 Ⅱ》의 연주시 반드시 단편 A1으로 시작하여 B4로 종결되어야 하며 단편 A와 B는 번갈아 연주되어야 한다는 불확정성 이면의 확정적 요소를 제시한다. 이로 인하 여 《투영 Ⅰ》과 《투영 Ⅱ》의 단편 A와 B는 서로 상이한 음고 소재를 근간으로 구상되었다. 음고 구조 분석은 A♭중심음을 점차 발전시키는 《투영 Ⅰ》의 단편 A, 주요 집합류를 단편 A 각 부분에 서 발췌하여 재인용·확장 시키는 《투영 Ⅱ》와 같은 각 단편 내의 새로운 양상을 주지할 수 있게 해주며, 따라서 우연성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연주자에게는 연주 순서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 준 다.
        156.
        2012.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상근(1922-2000)이 ‘도전과 실험정신’의 작곡가이자 시대를 앞선 음악교육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59년 9월부터 1960년 8월까지 1년간에 걸친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시의 피바디 사범대 학에서의 연수와 1960년 여름에 참가한 탱글우드음악제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피바디 프로젝트’에 선발된 이상근의 미국에서의 음악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피바디사범대학 체제기간 중 이상 근의 <교향곡 2번> 4악장, ‘한국선율에 의한 서완조,’ <피아노 3중주곡 2번> 등 세 작품이 연주되었 다. 특히 탱글우드음악제 기간 아론 코플랜드에게 수학하면서 작곡한 <피아노 3중주곡 2번>의 초연 을 비롯하여 이상근의 작품들이 미국에서 연주된 배경과 그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또한 피바디 연수를 통해 구체화된 음악교육관이 귀국 후 저술한 그의 음악교과서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아 본다.
        157.
        2012.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 출신의 작곡가 이상근(1922~2000)의 음악이 최근 음악학계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본 연구 는 그의 초기 합창음악 양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1946년부터 1951년 사이 쓰여진 그의 12작품(개별 16곡) 중 출판된 11작품이 ‘전통과 현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되었다. 이상근은 그의 논문에서 전 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에 대한 생각들을 펼치고 있다. 그는 전통 음악적 소재와 민족적 정서를 중 요시 하였고 이를 그가 영향받은 인상주의 음악과 결합하여 새로운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 력하였다. 그의 시도는 5음음계나 새야화현이 현대적 리듬과 화성진행과 결합한 형태로 음악화되었 다. 이상근의 초기 합창음악은 한국창작음악의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성이나 현대성 외에 합 창의 대중적 속성을 반영하는 ‘친근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158.
        2012.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상근(1922-2000)의 연가곡집《가을 저녁의 시》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김춘수 (1922-2004)의 초기 두 시집에서 가사를 발췌한 것이다. 8곡으로 이루어진 이 연가곡집에서 이상근 은 김춘수의 초기 시적세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존의 비참함과 무한세계의 동경, 그러나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인식의 한계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연가곡집의 시적 내용이다. 8곡의 곡들은 모두 첫 곡 <언덕에서>와 의미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흘러가는 무상한 존재양식 을 형상화 하는 모토동기(F-E-D-C)를 통해 음악 내재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이 음형에서 이끌어 지는 2도, 3도, 4도의 음정조직이 각각 동기적 작업을 통해 전 사이클에서 선율과 화음의 주요 재료 로 사용되며 시적의미를 형상화한다. 각 곡들에서는 새야화현과 같은 한국 음악적인 요소와 서양의 현대적인 기법들을 혼용하여, 각 각의 시적 의미에 맞게 다양한 음악어법들이 사용되었다.
        159.
        2010.1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intended to investigate environmental factors including soil and vegetation in order to understand the environmental and ecological characteristics of 12 different habitats of Iris odaesanensis. These habitats, according to investigations, are mostly located at elevation of 280 m to 1,555 m with angles of inclination ranging from 2 degree to 30 degrees. A total of 273 vascular plants are identified in 23 quadrates of 12 habitats. Dominant species of woody plants in 12 habitats are represented as Quercus mongolica in the tree layer (T1) and the subtree (T2) layer, and Lespedeza maximowiczii, Lindera obtusiloba, Rhododendron schlippenbachii in the shrub (S) layer. The importance value of Iris odaesanensis is 9.65%, as regards the herbaceous layer, and 6 highly ranked species such as Carex siderosticta (3.92%), Meehania urticifolia (2.67%), Spodiopogon cotulifer (2.58%), Aconitum pseudolaeve (2.51%), Carex bostrychostigma (2.28%) and Disporum smilacinum (2.09%) are considered to be an affinity with Iris odaesanensis in their habitats. The degree of their average species diversity is 1.32, and that of dominance and evenness are 0.08 and 0.89, respectively. The type of soil is sandy loam and loam, and the average field capacity of soil is 28.31%. Their average organic matter is 16.71%, soil pH 5.29, and available phosphorus is 9.29%. Correlation coefficients analysis based on environmental factors, vegetation and soil analysis shows that the coverage of Iris odaesanensis is correlated with pH and dominance, and species richness is positive related with species d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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