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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시대 생산된 中庸圖說을 분석해 해석 양상과 특징을 논구한 것이다. 『중용』해석은 단락을 나누어 요지를 파악하는 구조분석과 핵심주제어에 대한 심층해석으로 양분할 수 있다. 본고는 이 가운데 전자에 중점을 두어 도설을 통한 『중용』해석의 양상을 살핀 것이다. 조선시대 작성된 147개의 중용도를 분석한 결과 전체의 요지를 뽑아 그린 全圖는 30여 개이고, 나머지는 장별로 요지를 뽑아 그린 章圖이거나 人心道心 등 핵심주제어를 도표화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全圖는 구조분석과 논리접속에 관한 해석을 엿볼 수 있어 『중용』해석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최초로 中庸全圖를 그린 인물은 영남학파의 張顯光인데, 그의 「中庸之圖」는 주자의 4대지설이나 6대절설을 따르지 않고 정자의 설에 자신의 견해 더해 5대절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 뒤 17세기 후반 기호학파 朴世采가 「中庸總圖」를 그렸는데, 장하주의 설에 의거해 4大支로 구분한 최초의 도표이다. 17세기 후반 韓汝愈는 남송 말 饒魯의 6대절설에 의거하여 독자적인 6대절설을 제시하였으며, 주자의 『중용장구』 33장 체제를 수용하되 제5대절의 편차를 일부 개편해 재구성하였다. 한편 18세기 전반 기호학파 李泰壽는 대절별로 6장의 도표를 그려 전체의 구조와 요지를 도표화하였으며, 金載海는 『중용장구』 33장을 1綱·2目·4結로 파악하여 독특한 중용도를 그렸으며, 李顯益은 제1장을 외곽에 그리고 그 안에 나머지 장을 그렸는데 4대지설에 의거해 단락을 나누었다. 이처럼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기호학파에서는 다양한 중용도가 그려졌는데,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韓元震의 중용도가 나온 뒤로 기호학파의 『중용』해석은 한원진의 4대절설이 널리 수용되면서 한동안 다른 성향의 도표가 나타나지 않고 大節圖나 章圖만 나타난다. 반면 18세기 전반 근기남인계의 李瀷은 『중용』도 『대학』처럼 經文과 傳文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 제2장부터 제11장까지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부분을 孔子中庸으로 보고, 그 나머지 장은 子思傳으로 보아 매우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인 愼後聃은 스승의 설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중용도를 그렸다. 18세기 조선학계는 중앙학계와 지방학계로 확연히 구분된다. 중앙학계의 소수학자들은 청대 고증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학풍이 변하였는데, 지방학계는 여전히 주자학을 근거로 하여 시대변화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학계에서도 영남학계와 기호학계가 다른 성향을 보이는데,『중용』해석의 경우 18세기 후반 이후 작성된 독창적인 중용도를 그린 학자 20명 가운데 15명이 영남출신으로 영남학계에서는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모색을 하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영남지방에서 작성된 중용도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면, 정자의 3분설,『중용장구』장하주의 4대지설, 「독중용법」의 6대절설, 4대지설과 6대절설을 통합하는 설, 3분설 및 4대지설과 6대절설을 모두 수용하는 설, 독자적인 5대절설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이진상과 그의 문인 허유·곽종석 등에게서 나타나는 4대지설과 6대절설을 하나로 합해 유기적으로 파악하려 한 노력은 『중용』해석사에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 기호학파에서도 한원진의 설과 다른 설이 등장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조선시대 중용도 가운데 章別로 요지를 파악해 그린 章圖는 제1장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제20장과 제33장을 그린 도표가 많이 보인다. 한편 중용도 가운데 『중용』을 이해하는 핵심주제어인 天命, 中庸, 中和, 九經, 天道人道 등을 그린 도표도 다수 발견되며, 「중용장구서」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序分節圖와 「중용장구서」에서 언급한 人心道心의 문제를 해명한 人心道心圖도 많이 발견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학자들은 『중용』의 본지를 터득하기 위해 수많은 도표를 그려 논리구조와 논리접속을 파악하는 한편, 핵심주제어에 대한 부단한 논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특징을 가진 해석은 동아시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에서만 나타나는 해석의 특징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자못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