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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송은 과거를 통해 많은 인재를 선발하였다. 과거 선발 인원의 확대는 많은 과거 준비생을 탄생시켰고 이들은 새로운 사대부 계층을 형성해 송대 사회의 주역이 되었 다. 송 황실은 士大夫들의 宴會나 畜妓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취하였고 이는 사대부 와 歌妓의 만남을 촉진시켰다. 만남에는 歌妓의 노래와 연주가 있었고 여기에 맞춘 塡詞의 풍조를 탄생시켰다.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의 창작도 급속도로 늘어났 다. 숭문정책으로 과거급제자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늘어난 진사급제자 숫자만큼 같 은 시기 사 작품의 숫자도 비례하여 증가한다. 송사의 대표작가 30명을 분석해보면 사가 흥성한 북송시기 사인이 17명이다. 그 중 진사출신이 13명으로 76프로를 차지 한다. 인구에 회자되는宋詞三百首를 분석해 보아도 북송시기 진사출신 詞人이 60 프로에 달한다. 즉 송사는 숭문정책으로 인한 사대부계층의 확대와 그에 따른 도시 문화, 음악문화, 歌妓문화가 어우러져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6,000원
        2.
        2022.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명청 시기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면서 지식인들 에게 여가란 단순한 노동 이외의 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유와 인격 수양과 더불어 정신적 치유를 위한 방편이 되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심령의 자유와 개성의 해방을 추구하고 전통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산수를 유람하며 일상에서 술 과 차, 놀이문화를 즐기고 독서와 문학 창작, 예술품 감상을 통한 고상한 삶을 추구 하였다. 그들은 풍부한 지식과 품격을 토대로 철학, 문학, 예술, 양생, 심미관, 인격 수양과 연결시켜서 다양한 여가문화를 형성하였다.
        5,700원
        3.
        2020.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examined the document Shaemirok, which recorded the daily lives of people from Jangsoo (長水), Junrado to Pyeongang (平康), Gangwondo, from 1591 to 1601. This book represents the mid Josun dynasty Noble Lineage's diary together with Muk-Jae (默齋日記). This study analyzed the Shaemirok of Noble lineage’s seasonal food and traditional Korean food through the lens of the Shaemirok. The Shaemirok recorded that Josun people practiced the Julsa (節祀) and Julshik (節食) during the spring, as follows: Sakil (中和節) five times on February 1, Dapchungil (Samjiknal) six times on March 3, Hanshikil five times on March 8, and Deungsuk (Chopile) three times on April 8. Samjiknal on March 3, which is mentioned six times, is the spring Julsa and Julshik that show up most frequently within the Shaemirok’s records. The Shaemirok recorded that Josun people, practiced the Julsa and Julshik during the summer, as follows: Danyang (Danoh) eight times on May 5 Youdoojul six times on June 15, Chilsuk five times on July 7, and Bakjoong five times on July 15. Dangohjul on May 5, which is mentioned eight times, is the summer Julsa and Julshik that show up most frequently within the Shaemirok’s records. The Shaemirok’s author recorded Julsa and Julshik practiced in the autumn eight times annually. Joongangjul, which is mentioned six times, is the autumn Julsa and Julshik that show up most frequently within the Shaemirok’s records. Shaemirok recorded that Josun people practiced the Julsa and Julshik during the winter, as follows: Dongji during November, Sul on January 1, and Daebohrum on January 15 Dongji and Sul, Daebohrum are mentioned eight and seven times, respectively, in the Shaemirok. The people of the Four Main Families of the mid-period Josun practiced more Julsa and Julshik in the winter than in any other season. The Josun people stored the most food during winter, thus had the highest abundance of food. This seasonal factor explains Dongji and Sul, Daebohrum’s unusual frequency with which they were celebrated.
        4,600원
        4.
        2018.04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조선후기는 전통사회의 마지막 부흥기로 전통시대 문화의 발전이 성숙되었으며, 정원 조영 또한 상류문화의 하나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의 지식층이었던 사대부들은 정원을 통해 자신만의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기록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작된 의원기는 당시 사대부들의 정원문화 속에서 파생된 결과물 중 하나이며, 의원은 그들이 누리고자 했던 정원문화가 반영된 상상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의원기에 나타난 의원의 모습은 작자의 실제 원림 소유의 유무와 관계없이 가상 공간속에서 그들이 이상 적이라 여기는 자연의 발견과 재구성으로 이어졌으며, 저작 이라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이상향을 완성해가는 문화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일례로 구곡유거기 말미에 ‘서씨와 염씨가 사는 곳을 보니 완연히 내 마음속에 그려보았던 곳이 다’는 내용은 의원기에 나타난 이상적 생태공간이 실제 실현 가능한 범주 내에서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 서 의원기를 살펴보는 과정은 당시 사대부들이 희구했던 생태적 상상 환경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조선 후기 저작된 사대부들의 의원기의 내용 분석을 토대로 의원의 입지, 공간구성 및 구성요소들을 살 펴봄으로써 당시 정원에 구현하고자 했던 생태적 특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첫째, 의원의 입지는 대부분 풍수지리 사상을 토대로 조 성된 공간을 지목하고 있다. 도성 안에 외지고 조용한 곳을 터로 잡은 이용휴의 「구곡유거기(九曲幽居記)」 외 다른의 원기에서는 ‘산을 뒤에 두르고 시내를 앞에 둔 집’, ‘산봉우리가 돌아서고 산언덕이 굽이치는 곳이나 숲이 아늑하고 개울물이 여유 있게 흘러가는 곳’, ‘물을 접하고 있는 산’, ‘아름다운 산수’, ‘숲과 계곡이 울창한 곳’ 등 공히 배산임수 형국의 입지를 보이고 있었으며 특히 제황상유인첩에 나타나는 의원의 입지는 복지(福地), 국세(局勢)가 맺힌 곳 등 풍수 지리적 요소가 확인된다. 이용휴의 의원 또한 깊은 산 속의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지 않으나, 도성안의 석벽을 담으로 삼는다는 내용은 주변의 산악지형에 둘러진 곳을 정원 으로 삼았으며, 이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이운지 (怡雲志)」 편의 암서유사(巖棲幽事)의 기록과도 유사한 입지와도 관련이 있었다. 둘째, 의원의 공간구성은 규모면에서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집과 주변의 작은 뜰로 구성된 단순구조와 내원·외원으로 구분되는 넓은 지역에 다양한 기능과 장소성을 부여한 구조로 구분되었다. 구곡유거기와 허균의 편지에 나타나는 의원은 각각 집 주위 약간 평의 땅을 개간하고 남새밭을 일구거나 집 남쪽에 넓은 뜰을 두었다. 제황상유인첩이나 숙수념의 경우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되는 대규모 정원으로 건물이나 정원시설 등에 의해 각기 다른 장소성을 지니는 공간구성이 확인되었다. 제황상유인첩의 의원은 여러 채의 건물 내에 화분을 심은 내원과 연못이나 산골짜기 물이 흐 르는 남새밭 등 수경관 중심의 외원으로 구분되는 등 담장 으로 둘러진 공간뿐만 아니라 주변의 산림 또는 계곡 일부 를 의원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숙수념 또한 각기 다른 기능을 지닌 건조물 7개소와 6개의 별원이 내원에 포함되어 대규모 정원의 형태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외원에 해당하는 오로원은 이보다 더 큰 규모로 둘레가 사십리에 달하는 숲과 계곡이 울창한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이외에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의원은 한가하게 독서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 등 처사의 삶을 표방하고 있으나 공간구성상 의원에서 행해 지는 향유행태에 따라 별도의 건조물을 두는 등 규모면에서 작지 않은 구성을 보이고 있었다. 셋째, 의원에 조성된 공간구성요소는 원예나 완상 등의 향유 행태를 통해 남새밭과 대밭, 화분, 각종 화목 및 과실수를 두었으며, 정원 요소로는 연못과 정자 등을 배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소규모의 의원을 설정한 이용휴와 허균은 공 간의장요소로서 화단이나 화분, 수석 등 점경물로 이용할 수 있는 요소들이 주로 확인되었다. 이용휴는 처마 앞에 꽃 과 수석을 놓았으며, 특히 계절별 다양한 경관을 누릴 수 있도록 개화시기가 다른 꽃을 심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허균은 건축물 주변을 온갖 꽃과 대나무로 둘러진 곳으로 꾸몄으며, 전정(前庭)에는 패랭이꽃과 금선화를 심은 화분과 화단, 괴석 등을 배치하였다. 한편, 대규모의 의원을 설정한 임원경제지에서는 부용(芙蓉), 대나무, 매화, 토란, 밤나무 등의 수목을 식재하였으며, 특기사항으로 수목식재를 통한 경관구성 이후에 각 건축물들이 배치되는 과정은 일반적인 정원이 건축물의 조성 이후 이를 중심으로 경관연출이나 공간구성요소의 배치가 이루어지는 반면, 의원은 건물 중심의 공간에서 벗어나 외부 생태공간 조성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제황상유인첩의 의원에는 수백 묘(畝)의 전답과 연꽃이 심겨진 연못과 호수, 남새밭, 초각(草閣)과 대나무 숲 등의 요소들이 확인되었으며, 숙수념에 나타나는 의원에는 폭포와 동굴, 대나무 숲, 강과 계류를 포함하고 주변에 정자와 대(臺)를 조성하여 정원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의원기에 나타나는 의원은 배산임수 형 국의 풍수적 입지를 지니며, 공간의 구성과 영역의 설정에 주거 목적의 건축물과 주변의 남새밭 또는 뜰이 결합된 공 간구성이 확대되어 주변의 산수를 외원으로 포함하기도 하였다. 또한 규모에 따라 건축물 주변이나 내원에는 화단이나 화분, 괴석배치 등의 공간구성요소가 확인되었으며, 외원에는 다양한 자연요소를 포함한 영역 내부에 과실수나 화목의 식재, 연못 또는 정자와 같은 정원시설의 설치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특성들은 작자의 태도에 따라 그 입지와 규모, 공간구성, 정원 내 요소의 다양성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려나가는 과정이 공히 기록되고 있어 상상 환경속의 텍스트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시대적 배경이 반영된 생태적 환경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
        201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establish the identity of Korean traditional food based on the recorded food preferences during the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Our primary source in this regard was the invaluable, historical document called the "Miam's diary." This important document reveals details of such food preferences from October 1567 to September 1568. By analyzing the income-expenditure trends of virtually every household, this diary was used to describe a vivid traditional food preference of the people during that period. A detailed analysis of the diary reveals the summary of families' characteristics in the 16th century. First, it records the fact that expenditure on food was mainly based on stipend and gifts received. The type of food preferred by the people was diverse in nature; for it included rice, bean, chicken, pheasant, and seafood. However, there were dried or pickled forms too so as to prevent them from undergoing decay. Second, it throws light on the fact that people expended food mainly as a salary for servants. People utilized the income from selling such food items to purchase goods and land. They also used the same either to donate for a funeral or wedding purpose. Third, it records the fact that day-to-day purchase of groceries was mostly based on gift(s) for someone close to them such as a neighbor, colleague, relative, or student. Further, such gifts included small groceries, food items, and clothes. Fourth, based on the data available in the diary, it seemed likely that the gentry families laid emphasis on the customary formalities of a family dating back to as early as the late 16th century. Finally, the document also records the fact that noblemen of the Chosun Dynasty had a notion that they had to extend warmth and affection by presenting generous gifts to their guests at home. Noblemen during that period were very particular in welcoming their guests as they believed that this approach alone would testify their status as noblemen.
        4,500원
        7.
        200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9,200원
        9.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문헌에 실린 봉정사 관련 시문들을 중심으로 시문이 창작된 연대와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고, 이들 시문을 통해 봉정사가 사찰이 갖는 기본적 기능 이 외에 유교적 공간으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점을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봉정 사는 신라 시대의 승려인 能仁이 창건한 고찰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과 대웅전 은 독특한 건축 양상을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될 만큼 매우 가치적인 공간예술이다. 또 봉정사를 포함한 주변 원림은 사찰이 지닌 특수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렇듯 봉정사는 불교 문화로서의 전통성과 심미성을 지닌 공간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지식인들이 사찰 공간을 유교 공간으로 활용하였고 특히 조선의 유학을 집대성한 퇴계가 16세에 이곳을 찾은 이후로는 그 상징성이 더욱더 커갔다. 그리하여 봉정사는 독서와 강학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퇴계집』을 중간하는가 하면 『번암집』과 『서산집』을 간행하는 등 인쇄문화의 꽃을 피웠다. 특히 김시 침·류원지·이이송 등이 주도하여 창건한 蒼巖精舍는 추념의 공간이자 성지순례 코스로서의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렇듯 불교적 수행·의례·강학의 공간인 사 찰이, 지역 사대부와 사족에게 강학·문집 간행·풍류 등의 방식으로 향유되었다.
        10.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