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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disputations, supportive or oppositive, and the pros or cons that are concerned with Luji"s poems, are all closely related to the aristocratic consciousness. The forming of aristocratic symbolizes the literature history of Weijin dynasty. And the aristocratic consciousness existing in Luji"s poems indicates the mature of aristocratic consciousness of Chinese poems" history. Luji"s great contribution consists in his origination of profoundly representing aristocratic consciousness that deals with the love of hometown, nostalgia, longing of fame and social status, etc. His poems manifest deep thoughts of a aristocratic literator, meanwhile, his self esteem, mental conflicts, sorrow and loneliness are clearly showed through all his works. Comparing with poets living in Jian"an period, Lu"s poems lack of vigorous style, but much meaningful and sensitive than the Xuanyan and Gongti poems in Liucha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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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 월아산의 法輪寺와 靑谷寺는 寺格에서 조선 초기에 법륜사가 우월했으나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변화가 일어나 청곡사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한 요인은 사족들과의 인적 네트 워크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牧隱 李穡과 愼齋 周世鵬 등은 조선 중기 진주지역 사족들의 청곡사에 대한 긍정적 인식, 청곡사의 사격 변화와 사세 유지·확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청곡사의 사격이 높아지자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진주지역의 사족들도 그곳을 유람과 독서의 장소로서 자주 찾거나 머무는 장소로 삼았다. 이로써 청곡사는 지역 사족들의 다양한 경험이 매개된 장소로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명학파로 분류되는 지역의 이름난 사족 가문 출신이었다. 이는 1592년 10월 왜군에 의해 燒盡된 청곡사의 중창 불사가 비교적 빠른 1601년 겨울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사회·문화적 배경이었다. 浮査 成汝信과 鳳岡 趙㻩은 17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청곡사의 중창 불사를 重建 記文으로 남겼다. 이는 청곡사 역사에서 남아 전하는 첫 문헌적 근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성여신의 「靑谷寺重建記」 와 조겸의 「靑谷僧堂記」에 의하면 청곡사의 중창 불사는 1601년 겨울부터 시작되어 1624년에 1차, 1644년에 2차에 걸쳐 모두 70여 칸 이상의 전각이 완성되었으며, 이 절의 승려 性侃, 戒行, 克明, 道引, 宗修, 惠嚴 등이 주도하였다. 또 두 기문에는 청곡사의 寺勢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러한 청곡사 중창의 시기에 진주지역 남명학파는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특히 서인정변 이후 진주지역 사족 집단은 정치적 측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이 같은 때 성여신 등은 정치적 불안과 혼란에 대응하여 自靖하고 뒤이어 그들은 청곡사를 은거의 장소로 삼았다. 이는 1602년 이후 청곡사의 중창 불사로 인한 寺格과 寺勢의 변화가 초래한 공간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치적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4.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양하씨 滄洲 河憕家門은 진주의 전형적인 토반 사족가문으로서 17세기 초 반까지는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그 후 양송을 통해 畿湖學을 수용하면 서부터는 강우 서인[노론]세력으로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으며, 그런 흐름은 한 말까지 지속되었다. 북인 남명학파에서 서인 기호학파로의 전향은 인조반정 이 후 江右 지역을 덮친 정치사회적 격랑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 이후 滄洲家의 사회적 활동은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판도 위에서 설정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제약도 작지 않았지만 이들은 현조 滄洲 河憕(1563-1624)에 대한 각종 추양사업을 추진하며 문호의 기반을 확충함은 물론 지역 노론세력 및 중앙의 노론계 관료들과 연대하여 강 우지역 노론계 공론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부심하였다. 하증의 6세손 河鎭兌에 대한 孝子旌閭運動이 강우 지역 노론계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추진되고, 또 갖 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에 걸쳐 공론이 유지되어 마침내 정려를 하사받 을 수 있었던 것도 강우지역 노론사회에서 지니는 창주가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사환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었던 창주가가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하 게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풍부한 경제력에 있었다. 18세기 초반에 기준할 때, 창주가는 1,000斗落에 육박하는 전답과 100구에 달하는 노비를 소 유하고 있었음이 분재기를 통해 확인되고 있으며, 시기가 지날수록 경제 규모 는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은 단순히 문호의 유지 차원을 넘어 창주가의 인사들이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사론을 주도해나가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시론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강우지역 사족가문의 존재양태를 고문서를 통해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혀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것이며, 남 명학파 연구로 대표되는 사상사적 분석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 일정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