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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은 文으로 빚고 禮로 다듬은 文治國家이자 禮治의 공동체였다. 朱子學을 尊信했던 양반 사대부들은 ‘文治’ 구현의 충실한 수행자를 자임했고, 국가의 기초 단위인 ‘家’의 실현 공간인 마을에 대한 애착은 강렬했다. 그들에게 마을은 住居와 生活을 넘어 學術·文化를 자급하는 知識共同體로 착상되었고, 그것의 보편적 구현을 朱子學의 朝鮮化로 받아들였다. 인문 景觀으로서의 마을은 形成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이념과 가치를 지닌 인간이 造成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의 우열은 그것을 디자인하는 인간의 능력과 직결된다. 시대를 내다보는 안목과 식견을 지닌 인간이 디자인에 개입할 때 그 공간은 形質의 수월성, 즉 格調를 담보할 수 있다. 안계마을 河氏의 本源的 思惟는 朱子學과 南冥學이었다. 전자가 보편성을 지닌 종적 思惟라면 후자는 특수성에 바탕한 횡적 가치였다. 이들은 양자를 종횡으로 엮에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고, 또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며 사회·학문적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5세기에 안계에 정착한 하씨들이 이 공간에 대한 우월적 지배력을 확보하고 주자학·남명학적 개념과 구도 속에서 마을을 경영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고, 그 정점에는 그 시대의 嶺南學界가 선호했던 河弘度라는 학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와 그 자손들이 조성하고 경영했던 文巖[門巖]·敬勝齋·慕寒齋·宗川書院·直方軒·光影亭·尼谷書堂·士山書堂 등의 학술문화 인프라는 안계마을의 학술문화적 지향과 정치사회적 노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안계마을을 무대로 펼쳐졌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300년의 시간 속에서 역사의 지층으로 남았고, 우리는 이 지층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반추하려 한다. 마을은 이런 것이다. 글은 인간의 필요와 이해에 따라 고칠 수도 있고, 곱게 단장할 수도 있지만 시간의 경과 속에 견고하게 다져진 삶의 자취는 섣부른 개변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을의 문화사가 지니는 質實하면서도 혹독한 장면이다.
        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안계 마을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급격히 쇠퇴하던 시기에 오히려 남명 사상을 심화, 발전시킨 마을이다. 안계의 남명학은 그 후로 진양 하씨 문중의 가학 형태로 전승되면서 근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홍도는 안계 마을 남명학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다. 남명 조식의 학문은 하항과 하수일을 거쳐 하홍도에 전수되었고, 하홍도는 소멸될 지경에 빠진 남명학파의 사상을 심도 있게 발전시켜 후학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홍도가 남긴 『겸재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홍도를 기리는 만사와 제문에서 많은 후학들이 이러한 측면을 인정하는 내용을 볼 수 있고, 그가 직접 쓴 글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그는 인조반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식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의 문집에서 간혹 은미하게 이러한 사상이 드러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겸재집』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안계 마을의 남명학을 주도했던 최초의 인물인 하홍도는, 자신의학문과 사상에 대한 이처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안계 마을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명학이라는 학문과 사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홍도의 역할에 크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본다.
        3.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시대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 마을에 거주했던 진양 하씨(안계 하씨)가 혼인을 맺은 집안[婚班]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통해 안계 하씨 집안이 지닌 정치사회적 성격이 드러날 것이다. 안계 하씨는 15세기 중후반부터 안계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로 1900년에 태어난 인물들까지 이 집안에서 맺은 혼인의 건수는 568건에 달한다. 혼반의 수는 50개의 성씨, 108개의 본관이며, 대체로 경상우도 지역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안계 하씨 혼반의 성격은 초기의 혼반에서 대체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入鄕 초기부터 河弘度·河弘達·河澈·河泳의 주도 하에서 결정된 혼반까지의 숫자는 20개 성씨 28개 본관인데, 이들 혼반의 특징은 ‘德川書院 운영 주도 및 참여’, ‘曺植 문인 및 사숙인’, ‘鄭仁弘 관련’, ‘北人 관련’, ‘壬亂 참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초기 혼반과 혼인을 한 건수는 전체의 약 25%에 달하며, 이러한 특징을 지닌 여타 혼반과도 지속적으로 혼인을 맺었다. 또한 인조반정 이후에는 대체로 남인 계열의 집안과 혼인하였는데, 그중에서 남인의 색채가 짙은 혼반도 있었다.
        4.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晉陽河氏 가운데서 河珍을 시조로 하는 司直公派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名公巨卿이 배출되어 대단히 번성하였다. 그러나 領議政 河演, 大司諫 河潔 등이 현달하여 서울로 옮겨가는 바람에 진주에서는 명성이 줄어들었다. 다시 그 후손 중에 咸吉道 觀察使를 지낸 河襟이 朝鮮前期에 진주로 還故함에 따라서 다시 문호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南冥 이후 제일인자’라는 명성을 얻은 謙齋 河弘度와 그 아우인 樂窩 河弘達, 그리고 낙와의 아들이자 겸재의 조카인 雪牕 河澈 등이 나와 南冥學을 계승하여 큰 학문을 성취하여 이 家門의 격을 높였다. 科擧나 仕宦을 통한 번성은 아니었으나 학문과 儒論을 주도하여 지역 유림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냄으로써 집안을 현저하게 만들었다. 河東[조선말기까지는 晋州] 安溪마을에 거주했던 晉陽河氏 司直公派 가문의 역사와 특성을 자세히 고찰해 보고, 그 가운데 가문을 번성하게 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선별하여 그들의 유림사회에서의 행적을 고찰하여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