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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5

        1.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는 유학의 큰 프레임에서 역동적인 자기 변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조선후기 실학을 분석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한국유학을 재고하려는 시도다. 조선후기 실학의 변증법적 전환은 ‘초월(超越)의 유학’에서 ‘지상(地上)의 유학’ 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조선후기의 실학이 ①유학의 실제성 ②개방적ㆍ경험적ㆍ과학적 탐구 ③맥락 의존적 가치관 ④도 덕적 가치에 대한 ‘행위’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 인할 수 있다. 이는 실학의 이론적 흐름이 성리학의 ‘초월적ㆍ관념적 탐구에 서 현실적ㆍ경험적 탐구로’ 전환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실 학이 한국유학사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의 유학을 재고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 담론인 까닭이다.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정주(程朱)의 리(理)를 법ㆍ제도의 사회 원리로 재해석함으로써 현실의 차원에서 적용될 수 길을 제시했다. ‘실학의 중조’로 불리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노ㆍ장,불교, 서학 등 여타 학문에 대한 적극적 개방과 함께 과학적 학문 방법을 도입, 실증적 합리성을 견지했다. 또한 그의 국가관에는 형세[勢]에 근거를 둔 ‘맥락 의존적’ 가치관이 함축되어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도덕 ‘행위’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경험적 인식 방법을 제안함으 로써 과학적 탐구의 단초를 제공했다.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 혜강 최한기 (崔漢綺, 1803~1879)는 태양중심설을 비롯하여 뉴턴의 물리학, 기계론적 신체관 등의 자연과학적 탐구를 자신의 기학(氣學)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이렇듯 조선후기 실학은 선진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롭게 재조직함으로써 변증법적 전환을 이루었다. 비록 실학이 초월의 영역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경험과학적 지식의 이론화는 다양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진화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탐구는 실학을 건너뛰고 ‘지금, 여기’의 유학으로 올 수 없음을, 그리고 왜 실학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6,600원
        2.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행연구가 있지 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가 저조해진 19세기에 활약한 실학자에 대한 그것은 비교적 양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 최한기 (崔漢綺)와 이규경 (李圭景)의 일본인식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았다. 최한기의 일본관은 세계 각국의 지리, 제도, 산물, 역사, 종교, 풍토, 문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구전요 (地毬典要)󰡕에 집중적으로 나 타나 있다. 그 저본은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영환지략 (瀛環志略)』이지만 두 책의 일본 기술이 미비한 부분을 신유한 (申維翰) 의 『해유록 (海游錄)󰡕에 의거해서 보충했기 때문에 그의 일본에 관한 지 식・이해는 신유한에 의거하고 있다. 최한기는 일본의 세습제도에 대해 “어찌 인간의 재능에 한계가 있겠 는가? 실로 정교 (政敎)의 구속에 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공평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일본 정보・지식은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기학 (氣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전통적 유교의 화의사상이나 역사적인 적개심, 멸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이규경은 규장각검서관 (奎章閣檢書官)이자 『청령국지 (蜻蛉國 志)󰡕라는 일본에 관한 저술도 있는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가 할아버지 였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최한기보다 풍부한 문헌과 지식・정보와 접 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활용해서 일본의 신화, 역사부터 생활 문화와 속신 (俗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그의 저서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속에서 기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일본인을 가리켜 ‘도이 (島夷)’, ‘왜이 (倭夷)’, ‘흑치 녹정 (黑齒綠頂)’ 등의 멸칭을 거리낌 없이 쓰고 그 방대한 지식을 가지 고도 일본이나 일본인에의 멸시관, 차별의식을 고치고 극복하기에 이르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나 사고전서 (四庫全書)에도 수록된 일본의 유학 자 야먀노이 테이 (山井鼎)의 『칠경맹자고문 (七經孟子考文)』의 고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규경은 그러한 차별의식을 옆에 두고 일본의 문물이나 학술의 좋은 것을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9,900원
        3.
        2008.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소고는 倭亂(1592年~1598年)과 胡亂(1636年~1637年) 이후 조선후기의 사 상을 ‘実心’과 ‘実心実学’을 키워드 삼아 고찰하였다. 조선후기는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고, 보다 견고한 왕조지배체제를 제구성해야 한다는 당면과제가 있었다. 따 라서 그 이전과는 다른 氣流가 정치․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와 문화 등 여러 분야 에 흐르게 되었다. 특히 ‘実’이라는 개념을 자주 눈에 띠는데, 이는 兩亂의 原因을 반성한 결과일 것이다. 즉 ‘虛’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實’이다. 따라서 英祖․正祖時期의 文書에서 발견되는 ‘実心’과 ‘實心實學’의 용례는 ‘實’을 내용을 고찰함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儒學의 텍스트에서 ‘実’은 ‘誠’의 내용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특히 中庸에는 ‘誠’은 하늘의 道이고, ‘誠之’는 사람의 道라고 하는 規定이 있는데, 이는 ‘実心’을 분석하고 논의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거점이 된다. 용례를 정리하면 실심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공식문서에서 신하가 군주에게 요구하는 ‘実心’이 다. 이 경우 군주는 끊임없이 신하의 忠告과 警告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実心’을 갖추어야 한다. 政治的의미가 강한 실심으로, 君民共治를 위한 實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行動主体로서의 군주 自身의 文書, 혹은 신하 의 個人的文書에 사용된 ‘実心’이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本然의 마음을 실심으로 보는 것이다. 朱子学적 修養論인 ‘存天理去人慾’과 ‘戒愼恐懼’의 자세를 갖추고, 内面의 純粋性으로서의 실심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런 ‘実心’은 他者에게 感動을 주어 共感하고, 他者와의 疎通을 꾀하며, 他者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여기서의 ‘実心’은 實事에 임하여 實政을 행하고 백성에 도움이 되는 實效를 거두는 원동력이다. 또 이 실심에 근거한 학문이 ‘實心實學’이다. 이 ‘實心實學’은 陽明学的絶対純粋의 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重視하는 観点이 기초를 이룬다. 실심을 강조하는 人士들은 文字에 얽매여 있는 知識을 実践에 옮기는 ‘實心實學’ 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한다. 즉 朝鮮後期의 새로운 학문기류에서 보이는 實心이 란, 자신을 향한 엄격 수양의 필요성을 자각한 데서 나온 개념이다. 이런 실심을 전제로 하는 실심실학이란, 이상적 민생실현을 위한 의식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7,700원
        4.
        2006.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is focused on Damheonseo(湛軒書), an anthology written by Hong Daeyong, and I deal with Chinese Architectural views which he had experienced in his itinerary to Beijing, and the vivid pictures of Joseonkwan (called the Koryo or Joseon Embassy) located in Beijing at that time. He was a scholar of great erudition over astronomy, mathematics, military science, politics, and so on. He was interested in practical sciences at early time, and criticized secular scholars full of vanity who had presented purposeless articles. In his age of 35, Qianlong(乾隆) 30 (1764, Youngjo 41), he, a military escort, accompanied by Hong Uk, Joseon envoy and his uncle. Before his itinerary, he self-studied Chinese. Also, during a long journey he got new experiences and information around each area, deviating his group whenever he had some times. He could get more variant experiences than others because of his character full of curiosity, and his observations from the vivid lives of the time helped us get various views between Chinese and Korean architecture. Likewise, although he denounced Qing(淸) scathingly as a barbarian, he mentioned several points about the characteristics of Chinese architecture at that time. First of all, totally Chinese architecture had strong rational and practical points. Secondly, based on bountiful products, buildings along streets shown in Chinese city had sophisticated compositions, and luxurious and magnificent appearances. Thirdly, using the brick from walls to houses was so universal. Fourthly, the layouts of building with three- or four-closed courtyard had very orderly shapes, and the structure of street was also so arranged. Finally, because of stand-up lives, the scales and appearances of interior space were even more extended, and storages were less developed than those of Joseon. As another points, I found that Joseonkwan was moved next to Shushangguan(庶常館)from Huidongnanguan(會同南館) around Hanlimyuan(翰林院), and had been remodeled into a house with Korean custom in using the inner spaces, although it was followed by a closed courtyard style. Likewise, I recognized that Ondols were sure to be established in all temporary houses during the journey to Qing, and felt their strong traditional residential custom in such mentions. Now that the past pictures have disappeared and ways of life and our values have been largely changed, this study has very important meaning in comparing the ancient Chinese and Korean architecture.
        4,300원
        5.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