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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담산신사(談山神社)의 전신(前身)은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불교(佛敎)전래 이후 불교문화(佛敎文化)가 번성하던 7세기에 건립된 묘악사(妙樂寺)이다. 근세(近世)에 들어와서 국가적인 폐불훼석(?佛毁?)으로 신사(神社)로 바뀌었으므로 고대(古代)로부터의 1200년간 절의 불공(佛供)양식이 그대로 답습되어 전승되어 왔다. 신찬(神饌)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고대불교문화(古代佛敎文化)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교류가 빈번했던 한국고대의 식문화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되리라 본다. 1) 고배(高排) 음식의 형태는 본신사(本神社)와 동시대(同時代) 동계통(同系統)의 춘일대사(春日大社)나 법륭사(法隆寺) 등 고대(古代)의 절이나 신사(神社)에 남아 있어서 현존하는 한국 고배차림과 상통하는 점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단지 일본은 현재로는 사자(死者)나 신(神)에게 대한 제사에만 남아 있다는 점이 한국은 경사스런 행사에도 널리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또 한가지는 본신사(本神社)의 고배형태가 단순한 원주형(圓柱型)에서상부가 지붕 같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고배음식은 실제로 행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비해 「백미어식(百味御食)」은 형태만을 화려하게 만든 상징적인 것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외관상의 모양만을 만든 것이라 보고 신인공식(神人供食)의 사상으로 볼 때 고대(古代)에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였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고배음식은 원래 불교, 도교, 유교, 샤마니즘 등의 복합적인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아 인도와 중국에 근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뒷바침이 될만한 것이 없어서 앞으로 뿌리와 유래 그리고 변천과정 등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2) 고배음식 위의 장식은 고추나 꽈리 등의 열매를 죽곶(竹串)(대나무 꽂이)에 꽂아서 더욱 화려하게 만든 점이 특징이다. 이는 이조(李朝)시대 궁중연회행사에서 고배음식에 상화(床花)로 꽂는데 까지의 발전과정에서 극히 시초단계의 형태로 본다. 생열매나 꽃이 보였고 다음이 떡으로 새나 꽃모양을 만들어 장식했고(사진 10) 그 다음이 계절과 관계없이 실크나 종이로 조화(造花)를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3) 화도(和稻)의 문양(紋樣)은 매년 다르나 만형(卍型)은 필히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다양한 종류중에서 선택한 것으로 보아 문양이 고대로부터 다양하게 발전했었음을 알 수 있고 만(卍)자를 필히 넣는 것은 본신사(本神社)가 절이였고 절형식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4) 황도(荒稻) 본(本) 제사에서는 현재의 벼보다 대가 수십센치나 긴 흑(黑), 백(白), 적(赤)등 3종류의 고대미(古代米)를 쓰고 있다. 적미(赤米)와 흑미(黑米)는 현미(玄米)의 일종으로서 품종(品種)과 계통(系統)에 따라서 종피(種皮)의 색이 적색계(赤色系)는 적미(赤米), 흑자색(黑紫色)인 것을 흑미(黑米)로 칭하여 사용했다. 백미(白米)는 현재의 도정된 쌀이라고 본다. 이도 원래는 대가 긴 고대미(古代米)였다. 춘일대사(春日大社) 제사에도 흑미반(黑米飯)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개량된 쌀이 되기 이전의 형태는 물론 최초에는 현미를 식용했던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술이 달린 벼의 대를 그대로 장식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쌀을 귀중한 식량으로 꼽았던 것으로 본다. 5) 과실어공(果實御供)의 과일은 각종 야생열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우리가 식용하지 않는 과일, 채소, 구근류가 보인다. 고대식용(古代食用)식물의 재연구조사가 필요하다. 6) 고대(古代)제사나 현재 고배음식에서 보이는 오색(五色)은 오행설(五行說)에 근거를 두나 고대(古代) 신앙부터 다수의 종교의 부합적인 사상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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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발표에서 이해를 시도하는 澹山 河祐植(1875~1943)은 지금까지 본격적 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새로운 연구 대상이다. 이에 본 연구는 그의 文集 인 󰡔澹山集󰡕을 통한 텍스트 분석에 치중하였다. 󰡔澹山集󰡕은 그가 사망하고 십 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간행되었지만, 그 編次는 그가 생전에 손수 확정해 놓은 면모 그대로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澹山集󰡕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담산의 인생에는 다음의 세 가지 특기할 만 한 사항이 눈에 띈다. 첫째, 南冥學을 수용함과 아울러 艮齋 田愚에까지 이어지 던 栗谷學을 함께 계승한 學問淵源을 지니고 있다. 둘째,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대신 비협조로 일관하며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을 변치 않 는 ‘靖獻’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셋째, 學問淵源이 닿은 선현들의 문집 간행을 돕고 집안에 전해지던 遺文을 수습하여 간행하는 등 문헌의 정리와 간 행 사업에 전념하여 업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을 걷는 과정과 일제의 식민통치시기를 몸소 겪어야 했 던 담산은 ‘時義’를 중시하는 出處觀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주의 원리와 心性의 원리 및 양자의 관계성을 통일된 원리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心性論에 대한 심 후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담산이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변절하지 않고 끝 까지 절조를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마음공부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하 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채 인물의 도덕성을 부차적 문제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담산의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