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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의 목적은 가정 이곡(1298-1351)의 이중적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골이 수립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에서 세계인과 고려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방황한 이곡의 정신적 여정을 검토하려 는 것이다. 이곡은 한산의 호장 출신이다. 그는 1320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한미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1333년 원(元) 의 과거시험인 제과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결과 고려인 합 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원 중앙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곡은 134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15년간 원과 고려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개방성과 보편주의를 신뢰했다. 그에 따라 국가를 초월한 평천하의 정치적 이상을 꿈꾸었다. 다른 한편 그는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 관리로 있으면서도, 고려 정부의 불공정한 인사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고려 정부를 대변해, 원의 공녀정책의 부당성을 역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 고관에 오르지 못한 이곡은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몽골과 고려의 정치세계에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그는 경계인에 머물렀다. ‘원유자(遠遊子)’ 또는 ‘동서남북인(東西南北人)’이란 이곡 스스로의 자칭은 경계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와 황제는 그의 삶의 두 축이었다. 그는 황제의 도시 연경에 머물렀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만들어낸 세계인 이자 동시에 고려인이었다. 그의 좌절은 어떤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보편성의 한계였다. 또한 몽골제국 아래 고려가 경험한 세계화의 외연적 경계였다.
        7,800원
        2.
        2011.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李二曲(1627~1705)의 이름은 顒, 또는 容이라고 하고, 字는 中孚이지만, 보통 二曲先生이라고 불려졌다. 陝西省出身으로 평생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 다.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여러 번 仕宦을 推薦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평 생 빈한함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明代(1368∼1644)가 끝나고 滿洲族에 의해 淸朝가 세워지는 역사상황 속에서 학문을 하였던 二曲이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특색은 宋代朱子나 明代의 王陽明 중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자세로 자신만의 새로운 學術을 이루었다. 이 러한 二曲의 학문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 바로 ‘悔過自新’과 ‘明體適用’이다. ‘悔過自新’이란 말 그대로 학문을 하면서 자신의 過誤를 깨닫고 스스로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이고, ‘明體適用’이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本體를 잘 보전하여 현실에 적용하여 경세치용을 이룬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二曲이 志向하였던 學問은 理論적 糾明에 滿足하지 않고, 끊임없는 實踐을 摸索하였던 儒學이다. 이런 그의 實踐重視思想이 그의 학문관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實踐에 어긋나는 경우는 果敢하게 학문이 아니라고 비평하였다. 즉 內容도 없이 章句에만 얽매이는 學問을 俗學이라고 보았던 二曲이었기 때문에 學問은 悔過自新하여 明體를 밝히고 適用하는 實踐의 學問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