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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자고고학’은 “한자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그 배후의 말 없는 문화사를 발굴, 해 석하는 학문”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는 한자를 대상으로, 특히 한자의 어원을 통해 이에 반영된 문화성을 밝히는 학문으로, 이의 증명에 언어문자학, 문헌학, 고고학, 인 류학 등의 자료들이 동원될 수 있다. 여기서는 ‘한자고고학’의 개념 정립을 비롯해 그 실천적 사례로 ‘일(壹)’자의 어원과 상징 분석을 통해 ‘한자고고학’의 방법론적 구 축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를 위해 (1)문자학적 측면에서 일(壹)의 어원과 상징, (2)고 고학적 측면에서의 호(壺)와 인면호(人面壺)의 상징, (3)인류학적 측면에서의 호리병 박 숭배 전통, (4)출토문헌에서의 관련 자료들, (5)확장적 연구로서의 여러 유사 자료 들도 함께 논의했다. 이를 통해 기존의 한자학을 문화연구로 그 영역을 확장시키고, 인접학문과의 접속 속에서 그간의 한자 내부에 한정되었던 시선을 밖으로 확장함으 로써, 새로운 해석과 관련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5,800원
        2.
        2022.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단경식동검문화는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를 아우르는 말로 공병식동검문화와 같은 다른 문화권에 대비시켜 한국 청동기문화권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단경식동검문화의 청동기는 동검, 동부, 동경 등이 대표 기종인데, 특히 요서계통 동검 및 다뉴동경 등이 조합되는 유물 구성은 고조선문화권 정치체의 권력 기반과도 관련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고조선문화권의 청동기는 십이대영자문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상호작용의 네트워크가 북방계통 에서 중원계통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조합 관계 역시 일정하게 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서계통의 비파형동검문화는‘단순무기(동검)+의기(동경)+공구(동부)’중심 체계이며, 차마구가 중시된다. 세 형동검문화는‘복합무기(동검ㆍ동모ㆍ동과)+의기(동경)+공구(동부)’중심 체계이며, 차마구는 의기 화되거나 감소한다. 이는 정치체의 권력 기반이 변화하면서도 전사와 제장의 상징성을 겸비하는 수장 권의 기본 이념 등은 일정하게 유지되었음을 반영하는 양상으로 이해된다. 단경식동검문화는 청동기의 전개와 수장묘의 변천 양상으로 보아 기원전 9~8세기경, 기원전 6~5 세기경, 기원전 4세기경 등의 시점에서 획기적인 문화변동이 확인된다. 특히 문헌사료와의 비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고조선이 규모있는 정치체로 인지되는 기원전 4세기경 및 이와 연동되는 기원전 6~5세기경의 정가와자유형 관련 문화변동이다. 최근‘고조선시대론’이 여러 관점에서 제기되었는데,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기(정가와자유형) 또는 세형동검문화 개시 단계부터 설정하는 것이 고조선사의 보 편성과 특수성은 물론 개설서의 편의성을 모두 고려하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생각된다.
        8,300원
        3.
        202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근 20년 동안 한대 황제릉의 고고학적 조사․탐사 발굴 작업은 한대제릉의 형식과 배 치, 발전 및 변화의 궤적을 밝혀내는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발표된 고고학 자료와 여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한대 황제릉의 고고학적 성과와 연구과정을 소개하 고, 능묘배치, 내포된 함의을 중점적으로 소개하였다. 서한(西漢)은 “사사여생(事死如生)” 즉, 죽은자 섬기기를 산자 섬기듯 하였는데, 황제릉제도의 특징을 요약하면, “제후동토부동 혈(帝后同茔不同穴)”로, 황제와 황후는 동일 묘역에 장례를 치루지만, 각자의 능원을 가지 며, 이중능원, 외릉원 안에서 제후는 각기 소능원을 가지며, 능원담장 밖에는 한겹 또는 2중 으로 해자를 둘렀다. 복두형 봉분으로 4개의 묘도가 있는 아자형묘(亞字形墓)이며. 가장 긴 동쪽의 묘도가 무덤의 주묘도이다. 무덤 안은 황장제주의 목곽구조이며, 묘주는 금루옥의를 입고 있다. 능원 안에는 대량의 외장갱이 있고, 여러 기의 건축물이 있으며, 비빈의 합장묘 가 있다. 수량은 몇기에서 수십기로 차등이 있다. 능원밖에는 대량의 배장묘(陪葬墓)가 있 다. 서한 선제이전의 제릉은 근처에 능읍을 설치하였다. 동한(東漢)은 박장(薄葬)을 부르짖 어, 서한시대의 능묘시설을 중시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제사의식을 더 중시하였으며, 동한시기 제릉의 규모가 서한 때 보다 훨씬 작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제후동혈장(帝后同穴葬)으 로, 한겹의 능원으로 규모가 작거나 혹은 한 겹의 해자가 있거나 또는 원구형 봉분이다. 무 덤형식은 묘도가 하나인 갑자형묘(甲字形墓)로, 묘도는 통상적으로 묘실의 남측에 있다. 묘 실은 가로형 전실과 세로형 후실이 있거나 혹은 다실(多室)의 전석묘(磚石墓)이다. 묘주는 몸에 금루옥의를 걸치고 있다. 능원 안에는 석전(石殿)건축과 종거(鐘簴)건축이 있다. 외장 갱이 없는 것은, 서한시기의 외장체계를 무덤 안으로 포함시켰으며, 배장묘는 있다.
        9,000원
        4.
        2021.02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6세기 중후반~7세기 초 수대까지 중국 경내에서 활동한 소그드인의 종교 및 문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무덤 내 출토품과 관련 문헌 자료에 대한 정리를 통해 그들의 중국 내 거주 및 문화 양상을 대략적으로 고찰하고, 이에 대한 연구 경향을 분석한 후,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시론적으로 탐색하였다. 먼저, 6세기 중반~7세기 초 중국에서 활동한 소그드인의 묘지(墓誌)와 무덤 출토 석장구(石葬具)의 기본적 현황을 고찰하였다. 이를 토대로 소그드 상대(商隊) 수령인 ‘살보(薩保)’를 중심으로 중국 내 소그드인의 정착 상황을 분석했다. 그리고 무덤 내 출토품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교와 문화의 두 측면으로부터 분석했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는 조로 아스터교를 기본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불교적‧마니교적 요소는 물론 중국적 요소까지도 포함하는 매우 혼종적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소그드인들의 석장구가 6세기 후반∼7세기 초의 화북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시공간적 특색에 주목하고, 앞으로의 연구방향에 대해서 짚어보았다.
        6,300원
        5.
        2020.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Shanxi Provincial Institute of Archaeology publishes 359 new epitaph rubbings of the Epitaphs Recently Acquired by Shanxi Provincial Institute of Archaeology, which offers the real and reliable unearthed literatures for us to research into the new ancient epitaphs recently excavated in Shanxi Province. However, it is not easy to interpret some variant forms in the epitaph rubbings. By studying on eight variant forms in the epitaph rubbings, giving examples in characters and illustrations of literature, inquiring character meanings, clearing physical meanings, and summarizing the evolution laws of characters, this paper provides support documents and reference experiences for the research on difficult characters and the history of Chinese characters.
        4,500원
        6.
        201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고 유적은 집중적 관리를 필요로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요 문화 유산이다. 런던 미트라 신전 박물관은 정부 및 민간분야의 협업을 통해 고고유적을 활용한 복합 문화 공간이 되었으며, 문화재의 관리와 활용에 있어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영국의 전통을 반영한다. 그 협업의 결과로 본래 건축 자재와 복제품으로 복원한 신전 유구에 다양한 시청각적 효과를 더해 관람객들의 상상을 북돋우는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또한 박물관은 소재지인 월브룩 지역의 로마시대 고고 유물과 함께, 이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 기업인 블룸버그가 관리 책임을 맡아서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문화유산의 활용에 있어서 민간 분야의 새로운 형태의 협력상을 보여주는 유용한 참고사례가 될 것이다.
        6,000원
        7.
        2019.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취락고고학에서 주거지의 동시성을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유물 과 유구를 총망라한 양식 편년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기존의 토기의 문양이나 주거지의 형식을 통하여 청동기시대의 시기와 단계를 설정하였던 관습에서 벗어나 문양, 무문토기 壺, 淺鉢, 적색마연토기의 壺ㆍ甕ㆍ鉢, 內彎口緣甕, 底部의 두께, 胴 下半部 의 傾斜度 등의 器形과 또 석촉과 有溝石斧, 반월형석도, 방추차 등의 형태적 차이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주거지와 수혈에서의 공반상을 통하여 순서배열보충법으로 양식을 편년하였다. 그 결과 110개의 유구에서 51단계의 시간적 차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는 너무 세분된 편년이라 취락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각 단계에서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는 경향을 살펴 9단계의 획기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점토대토기 단계에 발견할 수 있는 유물들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점토대토기 단계 직전의 재지계 유물의 변형으로서 先粘土帶土器文化(청동기시대 晩 期)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 획기를 통하여 지좌리유적의 취락상은 협곡에 입지한 주변 취락으로 타 공동체와의 교류가 적어 전통문화의 존속기간이 긴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밝힐 수 있었고, 청동기시대 전기ㆍ후기ㆍ만기의 문화가 혼재함을 알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차후에는 이 편년을 이용하여 지좌리유적 Ⅰ~Ⅸ기(기원전 1100년~550년 전후)의 취락 변천 과정을 살펴서 그 시대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7,800원
        9.
        2018.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6,000원
        12.
        2015.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신라가 최초의 주(州)를 설치한 실직의 고고자료를 검토하고, 실직의 신라사적인 의미를 찾아보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직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수용하여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고고자료부터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실직 지역의 고고자료 가운데 신라산성과 신라고분을 추출하였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신라사에서 차지하는 실직의 역사적인 역할을 찾아 보았다. 시간적으로는 5~6세기가 중심 시기가 된다. 이 시기는 이전 시기에 비하여 문헌사료가 풍부한 편이고, 동시에 사료 비판을 통해 삼국의 쟁패와 관련한 역사적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 이 때 고고자료가 사료 비판과 역사적 해석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공간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을 기본으로 하였다. 즉 실직의 고고자료는 통일신라시대 삼척군의 군치인 지금의 삼척시와 속현 지역을 포함하여 살펴보 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삼척군의 속현에 지금의 강릉시 옥계면인 우계현이 포함되므로 동해시와 강릉시 옥계면을 실직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연구 범위로 삼았다. 그 결과 실직의 고고학적 양상을 정리하면 신라산성으로는 오십천 하구의 곶 (串)에 위치한 오화리산성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고분문화로는 5세기 3/4분기인 황남대총 남분 단계 직전에 신라문화가 출현하였으며 5세기 4/4분 기~6세기 1/4분기에 고분군이 급증․확산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분군의 입지도 구릉지대와 산의 사면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여 사구지대에 초기 고분이 분포하는 강릉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들 시․공간적인 고고자료와 문헌사료, 역사지리적 자료들을 활용하여 신라의 실직 경영에 대한 신라사적 의미를 찾는 시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오화리 산성의 경우 신라계 지명인 벌 지명이 있고, 건너편인 정라진 일대도 부리(=벌) 지명이 남아 있어 오십천 하구 일대가 신라마을이 형성된 실직의 핵심 지역으로 판단하였다. 나아가 통일신라 중사의 하나인 북해 비례산도 오십천 하구인 정라진 바닷가 일대와 오화리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였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중원(충주)을 거점으로 남한강을 따라 동해안의 강릉이나 삼척을 측방공격하는 고구려군을 막는 방어의 거점성이자 해양의 거점으로 오십천 하구에 있는 오화리산성을 운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인들이 동시대부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일대를 해양의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통일기에도 중사의 사해에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10,500원
        13.
        2014.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강원 동해안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집단은 濊國과 悉直國으로서, 이들은 濊[東濊]계의 일원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금까지 실직국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적, 역사고고학적, 순수고고학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직국의 실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합리적 이해는 현재 충분하지 않다. 본 연구는 삼척·동해지역으로 공간적 범위를 제한하여 최근까지 조사된 철기시대 유적·유물을 검토하여 실직국의 문화 양상과 그 변천과정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실직국 관련 철기시대 유적들은 영동지방에서와 같이 해안사구지대에 입지하는 呂자형·凸자형 주거지와 중도식토기를 공반하고 있어, 소위 中島類型文化를 공유하는 동예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직국 관련 철기시대 주거지들은 대체로 呂자형·凸자형 주거지가 시기적으로 선행하고, (장)방형계 주거지가 후행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일부 凸자형 주거지와 (장)방형계 주거지가 늦은 시기까지 함께 공존하는 양상도 파악된다. 실직국 관련 유적 중, 동해 송정동유적은 지금까지 영동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마을유적으로 확인된 점, 최고의 위계를 상징하는 유물과 주변지역(한군현, 진한, 변한, 마한 등)과의 활발한 대외교섭 행위를 시사하는 외래적인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 점, 철기생산과 직접 관련된 공방지가 존재하는 점 등에서 실직국과 관련된 강력한 집단세력이 거주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실직국의 장례문화는 종족상으로 보아 옥저와 같은 가족장을 위한 지상식 대형목곽묘를 공유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오늘날까지 지상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실직국에 거주했던 예의 종족들이 남긴 물질문화를 통해서, 실직국은 적어도 기원 1세기부터 기원 4세기 무렵까지 동예사회의 공통적인 물질문화를 유지하였으며, 한군현과 진변한 등 주변 세력과의 대외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까지 확인된 실직국 관련 고고자료를 통해서, 실직국은 대체로 강릉의 예국사회와 같이 대동소이한 문화변동의 단계를 거쳐 전통문화가 점차 해체되면서, 신라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신라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직국은 적어도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에 신라문물이 유입되고 확산되면서 이후 토착문화를 대신하여 신라 영역화에 따른 신라문화권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8,100원
        14.
        2014.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산국의 고고학적 실체규명은 한국고고학의 중요한 미해결 과제의 하나이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진행중인 울릉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우산국의 실체에 대한 외연을 좁혀가고 있으나 향후 조사연구를 통하여 해결해야할 핵심과제가 많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울릉도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모든 유적과 유물은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이후에 해당하는 신라고분과 신라토기 등이며, 당연히 존재했던 요지와 취락주거지 등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목표지향적이고 체계적인 학술 조사가 시행되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현재까지 이사부정복이전의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과 유물로 거론된 바 있는 추정고인돌과 타제어망추와 지석 및 무믄토기편 들만으로는 신라복속 이전시기의 고고학적 해석이 어려우며, 따라서 신라복속이전시기에 해당하는 선사시대와 5세기대까지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는 조사는 우산국연구의 필수불가결한 과제로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고분들도 울타리로 구획한 극소수외에는 대부분 방치되어 있으며, 일주도로와 활주로건설에 따른 위락지개발과 경작지 확대과정에서 급속도로 파괴인멸될 처지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고분들의 보호대책은 우산국의 고고학적 규명을 위한 조사와 병행해서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유관행정기관과 조사연구자와 긴밀하고 항시적인 협조가 이루어 져야한다. 울릉도의 유적보존과 고고학적 연구는 우산국의 실체를 규명하는 학술적 의의뿐만 아니라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시비를 종식시키는 총체적인 작업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시기적으로 시급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파악된 토기산포지를 중심으로 주거지나 요지 등의 지하유구를 찾기위한 체계적이고 연차적인 시발굴을 실시하여 신라복속이전의 독자적인 유적과 유물을 찾아내고 이를 근거로 우산국의 성격과 형성과정 및 주민 등 총체적인 고고학적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8,700원
        15.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Capriccio which has emersed in Italy of the 18th century is a new genre of the landscape painting. This genre represents reality, but it is very artificial product correspondingly its concept and character. It's birth place is distributed on various regions in Italy, but the main stage was Rome. Till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Rome was the Holy city of the Grand tour, the home of the Neo-Classicism and furthermore the field where archaeology and art history began to be instituted. On such historical situation the Capriccio came out and was recognized as the best popular genre in the visual art. It was favor of the art collection with the antiquity together and reflected the consciousness of the contemporary to the ancient. This study will examine the phenomena in the newly-developed archaeology and with few representative works of Giovanni Paolo Pannini as central term consider the Capriccio and the archaeological connotation. The systematical and institutional archeology which appeared at the age of the Enlightenment, on the contrary to the critical theories at the same time against capriccio, because it was regarded by them as paradoxical and too much sensitive, utilized it as a theoretical method very actively. Some among Historians and archaeologists did it, especially Francesco Bianchini distinguished the capriccio from simple imagination and made it a capacity of the knowledge. And through it he wanted to find out the historical truth. The visual art was influenced and encouraged by such attitude of the archaeology. However it's output spreaded out in various courses. While Giovanni Battista Piranesi, the best known Capriccist of the 18th century, tried to revive the antique through the epical value and his own imagination, Pannini gave priority to the strict historical research. In the such context Panni succeed Giovanni Battista Nolli who made the great map of the city Rome. Their Capriccio profited motive and was inspired by the historians and archaeologists such as Bianchini and Muratori. The Capriccio reflects not only the academic and popular interest for the antique, but also influenced on the upcoming scientific archaeology vice versa. It caused by their reasonable Interpretation and restoration of the antique through the visual medium. Finally as archaeological landscape Pannini's Capriccio is a historical case, in that the Capriccio applied the theoretical method of the archaeology to make art. It served as a momentum for the connotation to the archaeological thought.
        6,300원
        16.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고학에 보이는 중국 초기 각화부호(刻畫符號) 자료는 지속적으로 발견되어 어느 정도 그 중요성을 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 역 사학, 문자학, 예술사학, 기호학, 민속학 등 여러 학문분야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선행연구에서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 행되었다. 다만 현재까지도 이러한 각화부호(刻畫符號)의 명칭문제를 전문적으로 언급한 논문은 보이지 않는다. 본고에서는 선행연구의 연 구성과에 기초하여 관련자료들을 전면적으로 수집하고 서로 다른 분 류표준에 의거하여 분류정리를 진행하였다. 분류과정에서 먼저, 현재 학계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각획부호(刻劃符號)’와 ‘각화부호(刻畫 符號)’의 경계가 불분명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로 ‘각획(刻劃)’과 ‘각화(刻畫)’는 본질상 구별이 있다. 전자는 칼과 같은 공구로 새긴 형태만을 표시하고, 후자는 새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의미 도 그 안에 내재되어 있어 지칭하는 범위가 비교적 광범위하다. 따라 서 ‘각화부호(刻畫符號)’라는 명칭이 더욱 포괄적이고 정확하기 때문 에 이를 사용하기를 건의한다. 둘째, 부호(符號)의 구성원리에서 출발 하여 부호의 점(點), 선(線), 면(面)에 대한 결구분석을 진행하였다. 또한 중국 초기 각화부호(刻畫符號)에 대해 부호(符號)의 창제(創制) 특징에 의거해 명칭을 확정하자는 의견을 제기하고, ‘기하형부호(幾何 形符號)’와 ‘형성부호(象形符號)’와 같이 전면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각화부호의 문제에 대해서는 ‘선조류(線條類)’와 ‘형체류(形體類)’라는 총체적 구분방식을 도입하자는 관점을 제기하였다.
        9,500원
        17.
        2012.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각 표본집단(토양시료)이 모집단에 대하여 동일한 대표성을 갖게 산출하고 식물유체의 수량 비교시 통계적 유의성을 갖춘 계측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본고는 상대오차와 확률에 기초하여 여러 유적에서 채취된 토양시료 표본의 크기를 표준화하는 통계법을 제시하였다. 표본 크기의 표준화는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유체 간 수량의 차이가 단지 표본의 크기 차이에서 비롯됨이 아니라 문화적 원인 즉 식물 자원 이용상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통계적 대표성과 토양시료 채취는 기본적으로 군집표집의 일환이므로 토양시료의 수를 표본의 크기로 각 토양시료에서 추출된 종자의 밀도를 변수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표본 크기 표준화 방법을 남강댐 수몰지구 어은 및 옥방 유적 청동기시대 유구에서 출토된 식물유체에 적용하여 그 실효성을 타진하고자 한다. 또한 여러 표본(예, 유적, 유구)의 변수(종자 밀도)를 비교할 때 상이한 보존율과 복원율이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표본간 종별 중복비율을 모식도를 통해 제시하였다.
        5,200원
        18.
        2010.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국사기』에 견훤이 대량과 구사를 공취한 다음에 나아갔다는 진례는 구사가 창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김해의 진례로 보아야 하며 진례성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의 발호는 여러 가지 기록을 검토한 결과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반 경에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진례성주로 기록된 김인광과 소충자와 소율희 등은 당시 진례를 대표하는 권력자로서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들의 세력기반이었던 진례성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조사결과 진례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축성으로 확인되었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은 김해로부터 거리가 부합되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그 위치 또한 진례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세력이 위치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송정리토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송정리토성은 아직 정식으로 조사된 바가 없어 정확한 축조시기와 성격을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를 몇몇 출토유물이나 고고역사학적인 상황만으로 비정하는 것은 문제점이 있어 차후 본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한편 기록에는 김해로 비정되는 금관고성을 匝干 忠至가 공취하여 성주장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충지는 진례 출신이므로 진례의 세력이 결국 김해까지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하대에 선승들은 모두 진례로 가서 김인광, 소충자, 소율희를 보았다고 하였지 김해 금관경에 갔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 점은 결국 진례와 김해의 정치적 성향 또는 역사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양동산성은 신라가 김해지역을 정복한 다음 맨 처음 축조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진례지역과 김해와 진례의 교통로와 진례 중심을 조망할 수 있는 양동산성을 먼저 축조한 것은 신라와 가까운 김해와는 반대세력이 자리하고 있는 진례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가야시대 김해의 대표세력이 양동고분 축조세력에서 대성동고분 축조세력으로 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김해와 진례의 세력 이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점도 차후의 연구에서는 진례와 김해의 관계에 대하여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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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신라의 江原道 東海岸 및 鬱陵島 진출을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短脚高杯段階로부터 통일신라 초기까지의 유물.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필자는 황남동 109호 3.4곽을 4세기 후반~말기,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3/4분기 訥祗王의 무덤으로 보는 입장에서 고고학적 물질자료를 해석하였다. 그 결과 강원도 동해안의 강릉은 이미 황남동 109호 3.4곽 단계부터 신라의 문화가 나타나며 , 威勢品으로 보나 고분군의 규모로 보나 강릉이 최고의 거점지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집단을 강릉으로 徙民시켰고, 이들의 후예들을 異斯夫의 울릉도 정벌에 활용하였을 가능성도 제기해 보았다. 이후에도 강릉을 비롯한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지속적으로 경주와 連動하여 橫口式.橫穴式 무덤이 조성되며, 遺物相도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 반면, 울릉도는 육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고분이 조성되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울릉도의 고분은 追加葬이라는 횡구식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으며, 처음에는 屍身을 안치하였지만, 점차 佛敎의 영향으로 火葬을 하고 藏骨容 器를 埋納하는 방식으로 추가장을 하면서 많은 고분이 조영될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울릉도식 고분은 6세기 중후반 이후에 갑자기 나타나고 있다. 발굴 자료가 거의 없어 단정할 수 없지만, 그 이전의 선행 묘제가 없는 까닭에 외부로부터의 徙民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울릉도 土着人들이 횡구식 묘제를 받아들여 변형시켰다고도 볼 수 있으나 자료의 증가와 검토가 필요하다. 울릉도는 이사부의 정벌 이후 銅冠으로 상징되듯 완전히 新羅化되었고, 원거리에 위치한 섬이라는 특성상 간접지배를 받았다고 보인다. 고고학적 자료로 보건대, 울릉도 고분이 외형상 독특하고, 동일한 고분형식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며, 횡혈식석실분으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예가 없는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울릉도와 강원도 동해안에서 6세기 중.후반~7세기에 보이는 고고학적 물질자료들은 뚜렷한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 시기의 물질문화가 신라의 전체 영역에서 동시에 유행하는 齊一性의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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