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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정재가 지닌 융합적 성격을 고려하면서, 정재의 의미에 접근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를 하며 시작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그가 지은 악장은 조선시대에 표본적 역할 을 했으며, 이후 정재의 형태로 공연되어 대한제국까지 지속되었기에 그의 악장 정재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1393년(태조 2) 7월에 태조에게 악장을 지어 올렸는데 그 중 <몽금척>․<수보록>․<문덕곡>이 나중에 정재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정도전 악장의 정재인 <몽금척>․<수보록>․<문 덕곡>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상징과 비유는 무엇가? 그 상징이 어떻게 조선시대에 지속되었으며, 현재적 의미 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조선시대로 한정하며, 대한제국기를 포함한다. 연구방법은 정재가 기록된 사료와 도상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문헌연구방법을 택했다. <몽금척>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꿈에 신인이 내려와 천명을 상징하는 ‘금척’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금척’은 곧 ‘금으로 만든 자’인데, 신화에서 자[尺]는 왕권과 함께 생명력과 규범을 상징한다. 치어의 내용에 서 금척을 받을 인물의 조건은 문무를 겸하고, 덕이 있으며, 지식을 모두 갖추고 있고, 백성들이 바라는 사람 이었다. 1인이 읊는 치어가 하늘 뜻을 대표한 것이라면, 12명의 함께 노래하는 창사는 많은 백성들의 뜻이라 는 것을 시각화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금척사에서는 ‘유덕’과, ‘백성들의 마음’을 강조했다. 창사를 부르면 서 점진적으로 춤도 확대되는데, 천 억대를 이어가라는 금척사의 메시지의 확대와도 상응하였다. 마지막 퇴구 호에서는 경계의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수보록>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이상한 글이 쓰여 있는 ‘이서’를 지리산의 석벽에서 사람이 얻었는데, 이후에 태조가 즉위하여 이 글이 실현되었다는 내용이다. <수보록>의 춤에서 핵심적인 상징은 ‘보록’이라는 무구이다. ‘금척’이 하늘에서 천명으로 신인이 내린 것이라면, ‘보록’은 살아있는 사람이 전해준 것이나, 왕업 이라는 상징은 상통한다. 춤에서 상징적인 인물은 지선(地仙)인데, <수보록> 악장에 없던 새로운 역할로 등장 했다. 보록사를 창한 뒤에 전체 6대의 18인의 무원이 이중으로 줄지어 세 차례 도는 춤동작은 창사의 내용이 모두 이루어지라는 온 백성의 염원과 소망을 담은 듯하다. <문덕곡> 정재에서는 백성들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문덕곡> 악장은 태조 이성계가 언로(言路) 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예악을 정리한 것을 치적으로 찬양한 내용이다. 표면 적으로는 공덕을 기리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정도전이 건의하여 진행 중인 네 가지 사안이 앞으로 조선왕 실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원이었다. 태조대에 만들어진 세 악장은 늦어도 태종대에 정재로 만들어져서 각종 의례에 쓰였다. 태종대에는 <몽금 척>과 <수보록>의 내용이 꿈에 일어난 일과 도참설일 뿐 태조의 실제 덕이 아니라고 비판받았으나 세종대는 다시 <몽금척>과 <수보록>을 활발히 공연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몽금척>만이 연향에서 자주 공연되었 으며,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도전 악장의 정재는 신하로서 임금에게 하는 발언이자 제언이기도 했다. 공연 중간에 부르는 악장을 단순 히 임금의 공덕이나 치적을 받들어 올리는 송덕이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으로만 이해하면 평면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다. 오히려 정도전이 악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위정자로서 칭송받을 만한 공덕을 지니고 있어야 한 다는 ‘경계’의 시각과, 천명과 민심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낮고 무겁게 깔려 있다. 정도전의 민 본사상이 그의 세 악장 정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정도전의 악장에서는 민심을 반영하는 좋은 국가 를 만들기 위해 군주로서의 최선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했다. 천심, 즉 민심을 떠난 왕과 왕실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최고국정자의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 는가?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오늘날에도 정도전의 악장 정재가 주는 ‘묵직한 울림’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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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0.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388年に威化島回軍という事件が起こった. この時期こそが儒學的意味での革命の時期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 當時, 新しい政治勢力として浮上した儒學者官僚たちが想定していたのは革命ならぬ中興であった. ところが, 中興論をもって高麗王朝を立て直そうとした試みは難關に直面し, 槪ね1390年後半から1391年初頭にかけて, 中興から革命への戰略的な轉換が試みられた. そして, ここから中興對革命という對決構圖が出來上がり朝鮮建國までの1年餘りにわたる命縣けの鬪爭が繰り廣げられた. このような當時の政局を踏まえて革命について否定に近い肯定をした朱子の革命論を檢討し, さらに, 鄭道傳の革命についての思惑と行動を考察した. 1392年の鄭夢周の死は, 回軍以降展開してきた鬪爭の決着と同時に高麗の滅亡, そして朝鮮の建國を意味した. 朝鮮建國といえば, 通常最初にその名が擧げられるのは鄭道傳である. しかし鄭道傳は現にあった朝鮮建國という事件の主導者ではなかった. その事件は彼の手を離れて, 彼の意圖とは全く違う方向に展開された. それは簒奪による王朝交替であった. そのような王朝交替に向けての下準備が行われたあとに, 鄭道傳は中央政界に召還された.もし純粹な朱子學者だったならば隱遁すべきであったろう. しかし鄭道傳は出仕した. 自分の出仕は不義への投降ではなく, むしろ不義を正すためだという鄭道傳の辨を糾明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