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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500원
        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영조대의 하동 안계 마을의 학자 하대관의 가문계승의식과 향촌사회활동을 알아 본 것이다. 시기는 1748년부터 1758년까지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하대관의 글이 오로지 이 시기에 걸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이 1759년 가을부터 전개되는 종천서원 시비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집의 분석을 통해 볼 때, 하대관은 부친으로부터의 가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업적을 알게 되어, 그의 학문은 선조들의 전통과 남명학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은 향당에서 충절과 효행, 경의를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영남남인 외에도 기호 남인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자신의 가문과 진주 사족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겸재집』 간행, 족보편찬, 교육과 교화활동, 부당한 조세징수 반대, 『진양지』 간행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3.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時代 학계의 양대산맥이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독서와 講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실천위주의 선비였고, 이런 학풍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南冥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義兵을 일으켜 나라 를 위해 싸워 나라를 구출해 내었다. 이런 공훈으로 인하여 宣祖의 신임을 받아 조정에 발탁되게 되었고, 光海朝에는 大北政權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 무 자신들 위주로 정치를 해 나가고 반대당을 철저하게 배척한 관계로 1623년 仁祖反正을 맞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大北派는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 당 하였고, 南冥學派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仁祖反正 이후 새로 결성된 南人들은, 본래의 南人에다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몰락한 北人일부가 새로 편입한 것이다. 이들 남인은, 서울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서 西人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여 官職에도 나갔으므로 嶺南南人을 포함 한 전체 南人을 주도하였고, 많은 학자 문인들이 나왔다. 이들을 특별히 近畿南 人學派라 일컫는다. 이들은 退溪學派의 한 갈래로서 寒岡 鄭逑의 제자인 眉叟 許穆을 통해서 近畿 地域에 退溪學脈을 전파시켰다. 이들은 줄곧 嶺南에 근거를 둔 南人들과 활발 하게 교류를 했다. 이 近畿南人學者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龍洲 趙絅, 眉叟 許穆, 星湖 李瀷, 順 菴 安鼎福, 樊巖 蔡濟恭, 性齋 許傳 등이 近畿南人學派의 學統을 이어왔다. 이들 은 退溪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實學과 접목시켜 독특한 학문을 형성하였다. 이들 近畿南人학자들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들의 의도적인 집요한 南冥 貶下 의 상황에서, 南冥을 옹호하고 南冥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 다. 그들은 비록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가 退溪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南冥學 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英祖朝의 星 湖 李瀷, 正祖朝의 樊巖 蔡濟恭과 朝鮮末期의 性齋 許傳 등은 南冥의 位相을 提 高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오늘날 南冥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 분의 학자가 노력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