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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한국의 독도 교육정책이 어떻게 강화되고 있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논의는 영토교육 강화로서의 독도 교육이란 관점에서 초·중·고등학교의 독도 교육 내용 체계를 검토하고, 당면하고 있는 한국의 독도 교육정책 실태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독도 교육 내용 체계의 완성은 2015년 교육과정의 개정에서 독도 교육 강화방 안이 수립되면서부터이다. 교육부는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독도 교육을 범교과 학습주 제로 채택한 취지에 부응하여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 등의 교육 전반에서 통합적으로 운영하 는 방침을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도 교육정책은 대응적 성격이 강하다.일본 문부과학성은 2010년 3월 초등학교 사회과 검정교과서에 독도를 일본령으로 명기하면 서부터 왜곡된 영토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고, 2017년 3월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2018년 3월 고등학교 학습지요령 및 학습지도요령 해설을 개정하였고, 그해 7월에 개정판을 고시하였다. 이에 한국의 교육부는 2009년 교육과정에서 2015년 교육과정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독도의 영토교육을 강화하는 대응적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독 도 교육은 교과 영역에서 독도의 영토교육 강화, 창의적 체험활동에서 독도의 영토교육 강화, 뉴미디어 공간에서 독도의 영토교육 강화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초등학교에서 저학년과 고 학년 교육과정에서의 분류 항목의 분량과 난이도가 존재하고, 중등학교의 경우는 현장 교육 에 맞지 않게 교육과정이 진행되기도 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 때문에 형 식적이거나 일회적인 활동으로 독도 교육이 진행된다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2.
        202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독도교육의 변화를 살펴보고 독도교육 내용체계가 독도 학습에 중요한 교구인 경상북도교육청 『독도』와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바로알기』 교재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 지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초등학교 독도교육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향후 적절한 수준에 맞춰 흥미롭고 심도있는 독도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모색해보았다. 독도교육 내용체계의 10가지 분류 항목은 위치, 영역, 지형, 기후, 생태, 자원, 지명의 변천, 독도수호자료,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대응, 영토주권수호노력이다. 그러나 경상북도 교육청과 동북아역사재단의 교재에서 다루고 있는 분류 항목을 살펴보면, 10개의 분류 항목에 대한 내용을 모두 기술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연속적인 독도교육에서 저학년과 고학년에서 각 각 다루어져야 할 분류 항목의 분량과 난이도가 적절하게 구분되거나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초·중·고등학교로 구분하여 제시한 내용요소를 무 시하고 중·고등학교에서 다루어야할 내용요소가 초등학교에서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교육부의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반영한 독도교육 내용체계를 통해 일선 학교에서 독도교육을 강화하고, 그에 따른 세부 시행계획들을 비교적 잘 추진해오고 있다. 특히 학생활동 중심 교육이 강화됨에 따라 체험·활동 중심의 다양한 학습 기회가 보장될 수 있도록 독도교육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교재의 내용은 초등학교 수준에 맞게 기술하고 이와 함께 독도의 자연, 사료, 동·식물 등의 스티커 붙이기, 독도십 자말풀기, 독도보드게임, 독도책갈피 만들기 등 독도관련 체험·활동을 돕는 학생 참여 중심의 독도교재 개발도 요구된다.
        3.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의 독도정책은 정치 행위로서 항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제도화 된 법규 혹은 규범보다 정치적 가치에 따라 단순한 반대를 표하는 것으로 권리보전을 위한 소극적인 행위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행동이다.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정책 시책들을 ‘고유영토 주장’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의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시책들은 사료와 자료를 찾아내는 것을 넘어서 영유권 주장을 위한 공세적 논리로 ‘다케시마의 날’ 행사의 정치화,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관제화, 독도 영토교육의 확산화 등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러한 특징들은 정부 주도의 해양정책에 예속된 독도정책, 우경화된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구성원, 노골적으로 편향된 독도교육의 강화 등과 같은 딜레마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시책들은 일방적 선언에 적용되는 지도원칙으로 항의한 영토의 권리를 보전하기 위해 현존하는 상황이 고착화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항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4.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1952년한국 정부의 평화선 선언 이래본격적으로 제기된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과 관련하여 우리 정부의독도주권수호정책의전개과정을1965년한일어업협정체제와일본정부의 일방적 파기 및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 체제로 구분하여 고찰한 다음 일본의 궁극적인 전략인 ICJ를 비롯한 국제재판소 제소에 대응한 우리 정부의 유엔해양법협약상 강제관할 배제선언의 국제법적 효력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한국의 독도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일본이 제기하는 영유권 주장의 본질적 토대는 제국주의 침략 노선의 근간인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의 독도주권을 인정한 1696년에도막부의도해금지령과이를승계한1877년 메이지 정부의「태정관지령」에대한의도적인은폐에 더하여, 1905년무주지선점론에서시작하여, 17세기고유영토론을경유한뒤, 1951년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승인론으로 전환해온 과정 자체가 일본이 강변해온 국제법상 시제법의 법리에서도 오류로 점철되어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러한한계로인해일본의3단계장기전략정책프레임은한국의외환위기국면을활용한한일어업협정의일방적 파기와병행하여 본원적·역사적·조약적권원으로 귀결되는 국제법적논거의 강화를통해궁극적으로ICJ를비롯한국제재판소에회부하려는고도화된전략으로분석된다. 이에우리정부는일본정부가일제식민주의에입각하여제기했던1954년ICJ 제소시도선례에서이미확고한 독도주권 수호 의지를 천명하였는 바, 향후 이를 제고하는 장기・종합・체계적 정책 대응방안의 수립이 긴요하다고 하겠다.
        5.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외무성은 SCAPIN 677에 의해 일본의 영역에서 분리된 일본 주변 섬들을 되찾기 위해 이들에 관한 영토조서 4권을 1947년까지 작성해 미국에 제출하였다. 이 중에 독도(다케시마)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영토조서 제출 후 독도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독도는 류큐 등에 비해 중요도가 각별히 낮음으로 거의 무시되었다. 1951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독도는 규정되지 않았다. 이에 위기감을 가진 시마네현의 호소를 계기로 외무성은 독도 연구를 시작하였다. 또한 한국이 1952년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독도를 그 안에 넣자 외무성은 독도 영유권의 공고화에 나섰다. 그 하나가 미·일 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주일 미군의 폭격 연습장에 지정하는 것이었다. 이 지정에 인해 한국 어민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1953년 5월에 지정이 해제되었다. 해제를 계기로 독도로 항행한 시마네마루가 한국인의 어로를 발견하자 일본정부는 「다케시마 대책 요강」을 결정하였다. 이 목적은 독도를 경찰력으로 탈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횡포에 한국 측은 분노해 일본 순시선에 총격을 가했는데, 오히려 외무성은 한국정부에 사건을 항의하고 영유권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외무성은 「한국정부견해1」을 받자 영유권 논쟁만 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국제사법재판소(ICJ)로 제소하는 준비를 시작하였다. 다음해 다시 일본 순시선이 총격을 당하자 일본정부는 ICJ 제소를 한국정부에 제안하였다. 물론 한국정부는 이를 거부해 재판은 성립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하려고 여러 방도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나머지 방도는 한일회담에서 쟁점화 하는 것이었다.
        6.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독도와 관련된 사항이 처음으로 한일 양국간 외교문제로 떠오른 1952년의 독도 관련 사건을 다룬다. 1952년의 독도 관련 사건이라고 하면, 1952년 1월 한국의 평화선 선언과 그해 7월 일본의 독도 폭격 연습지 지정이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는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하여 9가지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중 7번째와 8번째의 내용이 독도 폭격 연습지 지정과 평화선 선언에 관한 것이다. 독도 폭격 연습지 지정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고, 평화선 선언은 ‘한국의 독도 불법점거’ 주장과 관련하여 제기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을 법적 측면과 정책적 측면에서 검토한다. 우선 국제법적 측면에서 두 사건을 둘러싼 한일 양국 주장의 법적 타당성을 검토한다. 아울러 정책적 측면에서는 1952년에 한일 양국이 독도문제에 대해 어떠한 정책을 취했는지, 또 관련 사건에 있어서 제3의 이해 당사국인 미국은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으나, 대개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을 하나의 맥락에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은 두 사건이 가지는 법적,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 주장의 부당성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7.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울릉도는 개항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불법 입도하여 거주하기 시작하고 일본 정부도 이를 방조하므로, 대한제국은 일본인 철환을 위해 두 차례나 국제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실행하고 일본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특히 1900년 6월 내부 조사관 우용정(禹用鼎), 부산 해관 세무사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와 일본인 관리 주 부산 일본영사관 부영사 아카츠카(赤塚正助) 등으로 구성된 제2차 “국제조사단”을 울릉도 현장에 파견하여 현지 실태를 조사케 하였다. 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후에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로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종래 강원도 울진현에 속했던 울릉도와 독도를 이번에는 독립시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울도군”으로, 격상시키고, 울도군의 관할지역을 울릉도와 죽도(죽서도)와 석도(石島, 獨島)로 법정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관제 개정 사실을 중앙정부의 󰡔관보󰡕 1900년 10월 27일 자에 국제고시하였다.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국제고시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石島, 獨島)의 대한제국 영유가 서양국제법으로도 다시 한번 더 세계에 공포된 것이다. 물론 이 때에 일본측은 어떠한 반대의견이나 다른 의견이 없었다. 이 때 독도를 종래의 명칭 ‘우산도’로 호칭하지 않고 “石島(독도, 獨島)”로 표기한 것은 공도정책이 폐지되어 1883년부터 합법적으로 들어온 울릉도민들이 사투리로 돌(Rock, Stone)을 “독”이라고 발음하여 독도를 돌섬(Rock islet)이라는 뜻의 지방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돌섬”은 뜻을 취하면 “石島”가 되고 음을 취하면 한자로 “獨島”로 표기되고 있었는데, 뜻을 취해 “石島”로 표기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때 국제법에 밝았던 조사단의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는 독도의 “Liancourt Rocks”라는 서양 호칭도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도 “리앙쿠르 石島”가 되므로 겸하여 石島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 발행한 『일·지·한 항로이정일람도(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우산도”를 “리앙꼬르드石”이라고 표기하였다. 대한제국의 石島표기는 리앙쿠르 石島(Liancourt Rocks)가 바로 대한제국 영토임을 서양국제법을 빌려다 거듭 밝힌 것이었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독도에 일본해군의 망루를 설치하려고 계획하면서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가 주장한 것은 독도가 임자없는 無主地라고 주장해 전제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有主地임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입각한 일본 정부의 독도영토편입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독도는 한국 고유영토로서 1905년 1월 이전에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기 때문에, 1905년 독도를 일부러 “무주지”로 억지 전제한 일본의 독도침탈은 처음부터 완전히 “무효”이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일본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 침탈 사실을 중앙 『관보』에 고시하지도 못하였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은 국제법상 불법의 도탈(盜奪)을 시도한 것이고 완전히 무효인 것이다. 한국은 1910년에는 일제의 강점으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의 패망 후에야 한반도와 함께 회복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8.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4년 1월 28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 개정을 발표 하였다. 2008·2009년의 경우 중·고등학교 지리에만 한정한 독도 관련 내용이 중학교 역사 와 공민까지 확대되었고, 고등학교 일본사, 현대사회, 정치경제까지 확대되었다. 또 4월 4일, 일본 문부과학성에 의해 검정 통과된 초등학교 5, 6학년용 사회 교과서는 2010년 검증을 거친 현행 교과서보다 독도 영유권 왜곡을 훨씬 더 구체화·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4종 모두 “일본 고유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령했다”고 기술하였고, 예외 없이 독도에 ‘다케시마’라고 표기한 지도를 곁들이기도 했다. 이에 대응하여 이 논문은 ‘교육과정’의 독도 기술과 현행 교과서의 독도 기술 현황을 살펴보고 ‘독도교육 내용체계’ 개정을 통한 독도교육 강화방안을 제시하고, 그에 입각한 교육과정·교과서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독도교육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교육 정책기관과 연구자와 일선 현장 교육자와 상호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9.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근 일본은 아베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경화로 치달리고 있고, 반면에 우리 박근혜정부는 신뢰를 바탕을 한 외교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 타케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은 평화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정책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협상을 계속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은 외교에서도 속내와 겉마음이 다른 것이 기본적인 태도이다. 죽도연구회는 시마네현이 만든 유사 관변단체이다. 죽도에 관한 연구는 일본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는 죽도연구회를 심각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사견으로는 독도는 한국 영토이고, 영토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도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는 북방영토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10.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영토의 포기는 영토의 취득의 한 유형인 선점과 같이 영토주권의 상실의 한 유형이다. 영토의 소유국가가 무거주지를 영원히 포기하면 그는 영토주권을 상실하게 되고 그 영토는 타국가가 실효 적인 선점을 하게 될 때 까지 무주지로 된다. 선점이 첫째로 실제적인 점유의 취득(체소)과 둘째로 영토주권 취득의 의사(심소)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토의 포기도 첫째로 영토로 부터의 실제적인 철수와 둘째로 영토주권 포기의 의사를 요한다. 따라서 영토로 부터의 단순한 철수는 그 국가가 영토로 부터 영구히 떠나려는 의사를 가지지 아니하는 한 영토포기 를 수반하지 아니한다. 일시적인 철수와 영토주권 행사의 약화는 소유국가가 그 영토를 다시 점유할 의사와 능력을 가졌다는 추정 이 있는 한 영토주권 상실의 효과가 수반되지 아니한다. 독도의 영토주권에 관한 1954년 2월 10일자 및 1956년 9월 20일 자 일본정부의 견해에 의하면 일본정부는‘조선초기부터 장기간 쇄환정책을 승계해왔고 … 한국정부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위‘쇄환정책’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의 포기를 의미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들 섬에 대한 포기의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쇄환정책’은 이들 섬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한 유형인 것이다. 따라서 1905년의‘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의한 독도의 선점은 무주지에 대한 선점이 아니므로 국제법상 위법인 것이다.
        11.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의 비법적(非法的)인 ≪시마네현(島根縣) 편입≫ 100년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올해에 들어와 일본 반동들의 독도 강탈 책동이 전례 (前例) 없이 악랄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2월 22일을 ≪다케시마(독도)의 날≫로 제정하는 데 대한 조례안을 통과시켰고, 남한 주재 일본대사란 자는 ≪독도가 역사 적으로나 국제법상 일본의 고유한 영토≫라고 망언(妄言)하였으며, 개 악된 역사 교과서에서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왜곡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 반동들의 ≪독도 영유권≫주장에서 기본을 이루는 것 은 1905년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이 당시의 국제법적 요구에 맞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영토 편입 행위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05년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이 일제의 조선 강점 정책과 영토 야망의 범죄적 산물이며, 따라서 이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란 완전한 억지이고 조선 재침 의지(再侵意志), 군국주의적 영토 야망의 발현이라는데 대하여 서술하려고 한다.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은 일본의 독도 침략 책동의 역사적 산물이다. 일본이 독도에 대하여 영토 야욕을 가지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 부터였다. 14세기말 우리나라에 대한 해적질을 통하여 울릉도에 대하여 알게 된 일본은 이조 초기 봉건정부의 ≪공도 정책(空島政策)≫ (섬을 비워두고 몇 해에 한 번씩 조사관을 파견하여 섬의 상태를 검열하는 제도)을 이용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빼앗으려는 탐욕을 품게 되었다. 1407년 쓰시마(對馬島) 수호 종정무(宗貞茂)는 이조 정부에 공물(供物)을 바치면서 여러 부락 사람들을 데리고 울릉도에 들어가 살도록 허가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에 대하여 당시 국왕이었던 태종은 그들이 ≪만약 국경을 넘어오면 반드시 말썽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그 제의를 거절해 버렸다. (≪태종실록≫ 권13 7년 3월 경오(庚午)) 이때로 말하면 태종이 강원도 관찰사의 제기를 받아들여 울릉도의 주민들을 육지로 데려 내오도록 명령한 지 불과 4년이 되는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