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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왕자오정 (王子午鼎)>은 기물의 모양이 독특하고 문양은 실랍법 (失 蠟法), 명문은 조충서 (鳥蟲書)를 사용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선행연구에서는 주로 무덤주인, 제작연대, 내용분석에 치중하였는데, 본 고에서는 이를 토대로 <왕자오정> 명문의 내용과 기물의 주인, 그리고 명문에 나타난 서체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도출해 내었다. 첫째, <왕자오정> 본체의 명문에 영윤자경 (令尹子庚)이란 명칭을 통 해 왕자오 (王子午)가 영윤으로 있던 기원전 558~552년 사이에 열정 (列 鼎)을 주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 덮개에 보이는 붕 (倗)은 자 경과 자남 (子南)의 뒤를 이어 영윤 (令尹)이 된 위자붕 (蔿子馮: 楚叔之 孫倗)으로, 어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 기물을 획득하여 덮개를 추가로 만들고, 기원전 548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 (M2)에 부장하였을 것으 로 추정된다. 둘째, 춘추 5패 (覇) 중의 한사람인 초나라 장왕 (莊王)은 9정 (鼎)에 대한 고사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인 왕자오는 자신의 신분보다 한 단계 높은 7점의 열정을 주조하여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음을 고고 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왕자오정>과 같이 화려한 청동기 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인문정치가 미약하였기 때문으로 추 측된다. 셋째, 조충서는 춘추전국시기에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여 중원 지역에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오 (吳), 월 (越), 초 (楚), 서 (徐), 증 (曾), 채 (蔡), 송 (宋) 등의 여러 제후국에서 주로 발견된다. 춘추시기에 서 조충서는 무기류에서 주로 확인되고 용기에는 극히 드물다. <왕자오 정>은 현재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조충서의 명문으로 그 사료적 가치 뿐만 아니라 서법예술에서도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춘추시기 초나라 문화권에서는 세로의 길이가 긴 장방형 결구를 선호하고 있다. <왕자오정>의 명문도 이러한 결구를 취하고 있는데, 본 체의 복부에는 조충서로 14행 8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고, 덮개에는 장 방형의 대전 (大篆)으로 4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 이 기물 본체는 왕자오가 만들고 덮개는 위자빙이 만들었기 때문이며, 덮개를 추가로 만드는 과정에서 좀 더 고풍적인 장방형의 전서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왕자오정>은 동시기 청동예기 중에서 기물의 제조방법과 명문의 서사방식이 매우 빼어난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최고의 걸작 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초나라 왕실과 국제정세를 알 수 있는 청동기 유물이며 조충서의 초기적인 형태로 조충서의 형성과 변화양상 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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