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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는 陜川 三嘉에 있었던 龍巖書院 운영주체들의 성격과 활동을 고찰하였는데, 특히 인조반정 이후 그들이 보여주었던 학문적 지향에 관해 주로 논의하였다. 또한 1609년에 공히 사액되었던 德川書院ᆞ新山書院 등 타 남명 제향 서원의 경우와 비교해 봄으로써,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의 특징을 좀더 부각시키고자 하였다.용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경 재건되었는데, 이때 관여한 인물 다수가 鄭仁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용암서원의 원장ᆞ원임을 맡은 인물로는 정인홍, 文景虎, 李屹, 鄭蘊, 林眞怤, 朴絪 등이 있는데, 정온ᆞ임진부ᆞ박인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용암서원 내에서 남명 선양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덕천ᆞ신산서원의 추가 배양 논의에서도 남명 위상의 제고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다.임진부는 용암서원에서의 강학을 통해 남명 정신을 강조했고, 박인은 남명 관련 기록물의 정리ㆍ편집을 맡았는데, 이 일들을 정온의 자문을 받아 진행하였다. 정온은 趙任道에게 신산서원 원장을 맡길 만큼 용암서원ㆍ신산서원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조임도는 용암서원 측의 입장을 참고하며 신산서원 내의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한편 덕천서원에서는 1635년 무렵 覺齋 河沆을 배향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여기서 사액서원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배향을 강행하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온 등 용암서원 운영주체 측에서는 사액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하항 외에 鄭逑 등 남명 高弟를 함께 배향해야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추락해가는 남명의 위상을 제고할 방법을 모색한 것인데, 정구에게서 남명의 영향을 지우려는 집단의 반대로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인홍이 생전에 추구했던 남명 선양 정신의 잔존이라 할만하다. 신산서원에서 金宇顒만을 제향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들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은 정구도 함께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다.인조반정 이후 덕천서원ᆞ신산서원에서는 서원 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집단끼리 논의하고 충돌함으로써, 반정 이후 바뀐 환경에서 적응할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면, 용암서원은 변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인홍 계열의 영향력이 컸던 곳으로 판단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에도 한동안은 정인홍의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학의 학습과 교육, 정리와 출판 사업 등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