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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는 1576년에 <이달선비>, 1577년에 <이언적신도비>, 1585년에 <조광조신도비>를 썼다.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쓴 삼비 중 첫 비인 <이달선비>는 조선시대 승정원 좌부승 지를 지낸 문장가 이달선(1457-1506)의 묘비로,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도덕산 아래에 있다. 윤구가 비문을, 이이가 추기를 짓고, 비액과 양면의 글씨는 모두 이산해가 써 당대의 명문장가와 명필의 조합이 환상적인 의미 있는 비다. 전서와 해서로 쓴 이산해 글씨의 출중함은 그가 조선 중기의 명필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이 글은 두 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이달선비> 글씨의 특징을 살펴 그 서예사적 가치를 찾아보기 위한 것이다. 변화가 많은 비액의 전서는 물론 정연하면서 행기가 부분적으로 있는 전면의 해서, 행서의 필의가 농후한 후면의 해서까지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쓰여 <이달선비>는 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산해의 특출한 솜씨를 보여 준다. 동시에 비 상부의 원형, 전서의 원필, 해서 비문의 유려한 서풍이 종합적 조화를 이룬다. 이런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표현한 이비는 문화재적 가치가 큰 금석문이다. 이산해는 조선 초기의 유행 서풍인 송설풍을 잇고, 중기의 유행 서풍인 석봉풍과 부분적으로 그 맥을 같이 하면서 동시에 풍후한 안진 경풍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에 머물지 않고 힘차면서 유려하고, 노 련하면서 능통한 자신의 독창적 서풍을 창조하여 일가를 이룬 명필 이다. 따라서 그의 나이 38세에 쓴 첫 비인 <이달선비>의 서예사적 가치도 마땅히 그의 서예적 명성에 걸맞게 평가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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