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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진산사건을 전후해 윤지충과 정약용이 처했던 중국과 조선의 상황과 자신들의 생각을 언급한 1.2차 사료의 분석을 통해 고찰했다. 이를 통해 제사에 대한 이들의 상반된 입장은 천(天)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자 했다. 즉 윤지충은 천주(天主)의 명령은 큰 부모의 명이며 동시에 교회의 명령으로 여겼기 때문에 천주교 제사 금령을 목숨을 걸고 지켰다. 한편 정약용에게 천명은 상제(上帝)의 명이었는데 상제의 명은 인간의 마음에 생기는 도덕을 행동으로 실행함 으로써 따르는 것이었고, 인간 도덕에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죽은 부모와 천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록 공적으로 천주교를 포기하면서도 제사를 지냈다. 한국에서 제사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인이 되는 데 커다란 걸림돌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한국개신교는 제사에 관한 태도를 정하는 데 있어서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신학을 확립해 가는 가운데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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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茶山 丁若鏞(1762~1836)이 살았던 19세기 초 조선후기 사회는 깊게 병들어 있었다. 이 시기에 다산은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되어 있 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살려 낼 방안을 찾기 위해 힘을 다하 였다. 특히 다산은 당시 사회에 만연된 잘못된 학문풍토와 아동교육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하였고, 그것을 통해 대중의 의식을 개조하고 참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본고는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먼저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의 발단과 전개과정에 대해 논의한 다음, 개선의 이유 와 목표에 대해 조명하였다. 이어서 조선후기 아동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다산의 비판과 다산 아동교육방법론의 특징에 대해 논의하였다. 특히 다산 아동교육방법론의 특징에 대해서는 다산의 아동교육 관련 저술을 인 성교육․문자교육․지식확충․언어교육의 네 분야로 나누고 각 분야의 특징을 찾 아 다산의 아동교육방법론의 특징을 설명하였다. 즉 인성교육 분야에서는 ‘文心을 키워주고 慧竇를 열어주는 교육방법’을, 문자교육 분야에서는 ‘觸類旁通의 교육방 법과 字書를 통한 개별 字義 교육방법’을 지식확충 분야에서는 ‘一以貫之를 위한 一以串之식 교육방법’을, 언어교육 분야에서는 ‘改非矯俗식 교육방법’을 특징으로 잡았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의 의의에 대해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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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3.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ims of this study are to examine the lifetime and educational thought of Dasan Jeong Yak-Yong and to find the significance of meeting and Dasan's educational spirit. Dasan was born on June 16, 1762 and died on February 22, 1836. In general, his lifetime is divided into four periods : ①learning stage(1-28age), ②public service stage(28-39age), ③exile stage(40-57age), ④emancipation stage(57-75age). He systematized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of practical science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 ideal image of a man to Dasan is a shepherd, who not only keeps his duties of magistrate but also is well qualified as a governor with learning and virtue, and as a teacher to lead people. Therefore, a shepherd is a practician having the whole personality of self-control first and then govern others. The spirit of governor based on practice of the self-control first and then govern others should not be looked down on as the old, and its spirit and lesson should not be overlooked in modern education. Dasan emphasized here and now and service to humanity. His aim was to educate a person to be a good father, mother, son, daughter, friend, and citizen. He believed that every person should strive for the continual development of self until excellence is achieved. The seven principles of teaching and learning which Dasan executed are as follows : ①step by step, ② major, ③fitting, ④practice, ⑤discussion, ⑥collaboration, and ⑦creative activity. It is sincerely hoped that this study on Dasan's Educational Thought will be contributed as a stepping stone of some help to those scholars and students who are interested in new teacher-education of the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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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一、序言 茶山丁若鏞(1762-1836)是能代表朝鮮儒學者。他在52歲時(1813),以自己精湛無比的知識,完成了一共四十卷的《論語古今注》。雖然,此書還沒能在中國和日本等漢字文化圈學界廣爲流傳,但對《論語》每一字句縝密而精確的分析研究,毫不遜色於多達兩千餘種的古今所有的有關《論語》的任何專著。筆者認爲,丁若鏞的此書與何晏的《論語集解》、朱熹的《論語集注》可以媲美的。何晏和朱熹與歷來注釋家一樣,潛心於探究《論語》每一字句中所蘊含的孔子的本義。但是,如衆所周知,何晏的解釋深受風靡當時的玄學的影響。朱熹的解釋也多處可見當時盛行的道學派的性理說思想。因此,從某種意義上講,他們是爲了宣揚的自己的思想而借用了《論語》的威望。但是,丁若鏞像乾嘉年間的一些訓詁學者一樣,沒有受任何思想上的影響。正如他本人所說一樣:“唯是是求,唯是是從,唯是是執”1 對這一章節衆說紛紜,因此不好把握其原義意。崔述在《洙泗考信錄》,趙翼在《陔餘叢考》進行了比較詳細的辨證。他們認爲;這事與史實不符,是《論,這是他所堅持的基本態度,所以比較接近于孔子的原義。筆者在這篇小論文,擧出能看見丁若鏞論語說之特色的三條來與讀者一起討論。二、本論 1) 丁茶山說: 曰東周者,東魯之隱語也。公山弗擾畔季氏,以扶公室,故孔子欲遷公室,據費邑以爲東魯,如東周也。 這條精義是對陽貨篇的「公山弗擾以費畔,召,子欲往。子路不說,曰,“末之也已,何必公山氏之之也?”子曰,“夫召我者,而豈徒哉?如有用我者,吾其爲東周乎?」而發的。對這一章節衆說紛紜,因此不好把握其原義意。崔述在《洙泗考信錄》,趙翼在《陔餘叢考》進行了比較詳細的辨證。他們認爲;這事與史實不符,是《論1見《與猶堂全書》第一集十九卷二十九頁〈答李汝弘載毅〉語》的編撰者們濫錄後來捏造的文章,所以不可取。陳天祥在《四書辨疑》中主張公山弗擾和公山不是一個人。相信這是歷史事實的學者當中,對公山弗擾邀請孔子的時間持不同的態度。定公五年說是孔安國,邢昺等的主張,定公八年說是江永, 黃式三,錢穆,範希春等的主張,定公九年說是翟灝,劉寶楠,方騎齡等的主張。 丁若鏞同意五年說。其中劉寶楠的論證最爲切實,但《論語正義》中有詳細的記載,故在此省略引文。 對“吾其爲東周乎?”也有截然相反的兩種主張。 一個是‘興周道于東方說’,是邢昺,朱熹等後世學者比較贊同的孔安國主張。 這裏又有問題,‘興周道’的主體是誰?是把當時周王請到費,興起周道的意思呢,還是幫助公山弗擾實現周道的意思?丁若鏞則認爲魯定公就是興起的主體。再一個就是把‘其’認爲‘豈’的通假字,把東周理解爲當時衰敗的周朝,理解爲“如果有人錄用我,我怎麽會讓那個國家象衰落的東週一樣呢?” 這是程顥和程頤的 “不爲東周說”。2 夷狄,謂用夷狄之道也。諸夏,謂用諸夏之法也。君不君,臣不臣,是亦夷狄丁若鏞否定了以上兩種解釋,提出了新的主張。說: 吾其爲東周者,欲以魯君,東遷於費,以爲東魯。寧以魯國付之三家,如西周之賜秦然,猶有愈於今日。……時三家分魯, 祿去公室。……不狃之畔,畔季氏, 非畔魯也。孔子欲往, 雖其戲言,本不害義,其畢竟不往者,陽虎本是亂人,不狃亦出私怨,皆非公正之憤,終恐事敗徒取禍耳。 然若使不狃能深信聖人,一聽其計,則孔子當迎定公,遷都費邑,盡收魯東郊之地,以強公室。仍以故國付之三桓,即田賦子弟,悉反公室,而三桓徒擁虛器,不久自殘,此必然之勢也。 曲阜在魯西偏,一失費則魯不足觀。 聖人心上,有此商量。直以虎與不狃, 皆不足與謀大事,故戲言欲往,而畢竟不往。其雲欲往者,戲也。其雲吾其爲東周者,非戲言也。…… 竊嘗思之,當時三桓,族黨甚盛,蟠根錯節,久於曲阜,一朝不可盡殺。況先王之法,公族不翦,孔子雖得勢,必不欲濫殺公族。然則坐於曲阜, 革其僭亂,反其田祿,雖聖人不能爲也。必遷邑於巖險之城,別剏朝廷,以新一世之耳目,然後乃可以定其局,此所以東周爲上策也。東周者,東還之隱語也。 興周道于東方,豈知痛癢之語乎? 據丁若鏞的主張,孔子要應於公山弗擾的邀請是假的,把曲阜讓給季氏,和魯定公一起,去費建立新的國家的想法是真的。這說明瞭丁若鏞對當時季氏的僭濫懷有強烈的不滿,與把八佾篇的“夷狄之有君,不如諸夏之亡也。”句所論同軌。丁若鏞在八佾篇說:2參考程樹德《論語集釋》 1195頁. 而已。安于夷狄,而苟保君位,不若遵先王之法,修華夏之禮,而不保其君位也。昭公二十五年,祭於襄公,舞列不備,只二人而舞公,盡赴季氏以舞大武,衆萬于季氏。昭公怒,欲誅季氏,議於子家駒,事敗,公奔齊,孔子亦適齊,魯遂無君。國人皆咎昭公,孔子明其不然曰,與其君不君臣不臣,安于夷狄而苟保君位, 不若誅亂討賊,以修諸夏之法,而失其君位也。 於此可見,丁若鏞解釋經文時,非常重視歷史背景的傾向。但丁若鏞把東周解釋爲魯之隱語的主張,與其說是根據事實,不如說是依據蓋然性的推論。 2) 丁茶山說: 曰上智下愚,非性品之名。守善者,雖與惡相狎習,不爲所移,故名曰上智。安惡者,雖與善相狎習,不爲所移,故名曰下愚。若雲:人性原有不移之品,則周公曰:“唯聖罔念作狂,唯狂克念作聖。”爲不知性者也。 這是對陽貨篇「子曰,“性相近也,習相遠也。”子曰,“唯上知與下愚不移。”」章的詮釋。首先,丁若鏞認爲上智和下愚不是品行的名稱,從而否定了荀悅,韓愈等的性三品說。孔子旣說了上智和下愚,後人認爲既然有上下,自然也會有中,因此才有了性三品說。錢坫的《論語後錄》裏,有著翔實的紀錄。3 性者,本心之好惡也。習者,聞見之慣熟也。……好德恥惡之性,聖凡皆同。以此之故,本相近也。兩人之賢不肖,本相近,親賢狎小之習,甲乙有殊,以此之故,終相遠也。兩人之賢不肖,隔千里。…… 明於利害曰知,暗於利害曰愚。知愚所以謀身,非性之品也。上知,雖與惡人相習而不受染汙, 下愚, 雖與善人相習而不受薰陶, 是不移也。…… 孔曰: “君子慎所習。”案孔之此注,深中經旨,毫髮不錯。……習也者,親習也,熏習也。非謂本人習於爲善,習於爲惡也。周書數紂之惡曰:“乃惟庶習逸德之人, 同於厥政。”月令曰:“貴戚近習,毋有不禁。”孔氏之雲慎所習,此之謂也。不移,謂不爲人所移,非謂本人堅坐一處也。……下愚之不移者,不移於善也。今乃曰下愚之人,生於下層,到死不移一步,有是理乎。……知愚者,知慧之優劣,知愚非丁若鏞認爲,這裏的智愚是“明於利害曰知。”“暗於利害曰愚。” 因此,知愚是關於處世的態度而不是性品說。 所以他說:“智愚所以謀身, 非性之品也。” 他又對性和習也提出了獨特的見解。即 “性者,本心之好惡也。習者,聞見之慣熟也。” 因此,把“性相近”解釋爲“好德恥惡之性, 聖凡皆同。以此之故,本相近也。”下面引用一下丁若鏞的主張。3言性者三家, 孟子言性善, 荀子言性惡, 揚子言性善惡混. 三家混者也, 劉向合之, 荀悅因向意定性三品, 蓋兼用三家矣. 性也。上知下愚一節,只就習遠上立論,非就性近上添說也。上知下愚,其性亦相同,特其知慧有優劣耳。執孝子而問之,舜曰善,蹠亦曰善。執叛臣而問之,舜曰惡,蹠亦曰惡。此以是非之心,明性善。譽之曰廉,則暴客亦悅。駡之曰淫,則冶婦亦恥。此以羞惡之心,明性善。上知下愚之同一性如此。惟舜習見頑嚚而不爲所染,蹠習見惠和而不爲所化,斯其所謂不移也。若論其進德修業之層級,則舜自耕稼陶漁,以至爲帝,無不取於人爲善。其步步移動,一息不停可知,何以謂之不移也。惡人之日進其惡,亦當如此。世豈有生來成熟,無復可移者乎? 對“唯上知與下愚不移” 章的闡釋,雖然多半是爲了達到孔子的原義意。 但也不能否定是基於自身的主觀哲學。因此,丁若鏞之以性善說爲基礎的性嗜好說,也是一種主張。因爲,從孔子的這一句話,無法判斷孔子是性善論者,還是性惡論者,或者是性有善有惡論者,還是性無善惡論者。但是,性三品論者主張性是天生的是不可改變的,以及“所謂性者,兼氣質而言也。氣質之性,固有美惡之不同”的朱熹的見解,似乎與孔子的原義之間都有一段距離。丁若鏞作爲其例子舉論了《尙書多方》中的周公之言“唯聖罔念作狂,唯狂克念作聖。”是說, 一個明哲的仁,若凡事不能常加思慮,就會變成一個狂妄的人,一個狂妄的人,若能凡事思慮,一樣能成爲明哲的人。孔子不會理解不了周公的這句話。如《尙書》中的〈堯典〉〈皐陶謨〉〈甘誓〉等篇是在孔子以後之作,但〈多方〉以及〈大誥〉〈康誥〉〈酒誥〉〈梓材〉〈召誥〉〈洛誥〉〈多士〉〈無逸〉〈君奭〉〈立政〉〈顧命〉等 12篇, 無疑是西周時期的作品。4 4參照屈萬裏《尙書釋義 ․ 敍論》 那麽上智和下愚就有可能不是 ‘不移’或 ‘不能移。’ 而是‘不肯移。’ 這‘不肯移’三個字, 是丁若鏞說的核心。丁若鏞主張“不移”不是‘不可移’,而是 ‘不肯移’。幷舉出了‘不可移’說的弊端曰: 生而聰慧者,將自傲自聖,不懼其陷於罪惡。生而魯鈍者,將自暴自棄,不思其勉於遷改。今之學者,以聖爲天,決意自畫,皆此說禍之也。丁若鏞的此主張, 可能是很接近孔子的原義。 三、 結論 1)丁若鏞認爲“爲東周”,表現了把被三家奪去主導權的魯國首都,遷至公山弗擾挑起叛亂的費地,重建了第二個周室的孔子的政治希望。 這主張雖沒有決定性的證據,很可能是歷史的眞實。 2)丁若鏞主張‘上智’是守善者,下愚是安惡者。上智者,雖與惡相狎習,不爲所移,下愚者,雖與善相狎習,不爲所移。我們以後世人的眼光,考察了丁若鏞的論語說。首先,丁若鏞拋開所有的成見,以“唯是是求,唯是是從,唯是是執”的返本主義的態度,探究了論語的原義。結果,原義求索上,取得了一定的成果。但是,因爲有關這些的孔子的言論過於簡略,並且時隔孔子的年 代太遠。因此,不管怎樣標榜原義,不知不覺之間,會加進去自己的主觀見解。丁若鏞的論語學的卓越性是不能否定的,但他也沒能從這些問題得以擺脫。1參照屈萬裏《尙書釋義 ․ 敍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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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아시아가 근세사회로 진입하면, 주자학이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된 다. 그러나 한중얼 삼국에서 주자학에 대한 견해는 동일하지 않다. 본고는 야 점 을, 王夫之(중국), 이또진사이(일본), 정약용{한국)의 『중용』해석을 비교함으로써 그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 고자 한다. w중용』가운데에서도 처1]1장에 나오는 천 성 도에 대한 주석을 그 분석 대상으로 한다. (1) 왕부지는 ‘천이 리이다.’라는 명제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의 리가 된 뒤에 천야 리라는 뭇이 성립된다. 라고 하여 기를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성즉리‘를 긍정하연서도 이 라는 ‘거의 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천과 연성 은 동일한 기반을 갖는다. 이 점은 인성을 ‘연간에게 내재한 천도’라고 하는 명제 에서 확인된다. 자연의 음양 · 오행과 언간의 인의 · 오상이라는 덕목을 대응시키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천도와 안도는 연속된다. 연성/울성, 인도/물도의 관계 에 있어, 왕부지는 철저하게 분리의 입장을 취한다. 인성=선, 물성=불선으로 규정한다. 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物道를 인간이 물을 이용하는 인도로 본다. (2) 진사이는 ‘천이 리’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주자학의 ‘이선기후’적 관점을 강하 게 비판한다. 그는 천을 원기로 보고 리는 그 조리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천 혹은 천도를 유행/주재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전자를 탈 도덕적 존재, 후자를 도덕적 존재로 본다. 전자는 인도와 구별되며, 후자는 인도가 도출되는 근거가 된다. 여기 에서 천도와 인도는 단절과 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진사이는 ‘성즉리’를 부정하고 기질의 레벨에서 접근하여 구체적인 정강의 선지향성을 성선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인간만이 갖고 있으며 사물은 탈 도덕적인 닫힌 존재이다. 그려나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인륜적인 규범을 인정함으로서 인간과 사물의 연속성이 확보된다. 천-인관계와 동일하게 인-물도 단절/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3) 다산은 천=리, 성=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천을 인격적 존재로 성을 선 지향적언 기호로 규정한다. 그리고 천의 영명성을 인간이 부여받아 영명무형한 본성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함으로서 천-인은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 이 점은 천명이 인간의 도심에 내재하며 도심의 경고가 곧 천의 명령이라고 말한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산은 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사물은 자연성만을 갖는 닫힌 존재로 보아 인/물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지금까지 정리한 바와 같이, 세 명의 유학자들이 천-인, 인-물의 관계를 연속/단절로 보는 시각은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지향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강한 도덕성을 지향한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왕부지가 중용의 성과 도를 인간에게 한정시킨 것은 ‘계신공구’라는 도덕적 수양을 전제로 한 것이며, 진사이가 천의 주재성 및 도의 연륜성을 강조한 것과 다산이 천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성을 기호로 보며 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한가지, 동아시아 사회가 근세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체계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천 • 성 • 도라는 유교 본체론의 핵심 개념 틀이 리에서부터 이탈하여, 기 • 정감 • 인륜 등 보다 구체적언 레벨에서 규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개념의 변용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도덕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이론을 재구축하는 작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6.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