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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중국 지 식계층에 의해 처음 소개된 내용부터 그 이후의 변화된 루터의 이해를 고 찰하는 것이다.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 소개된 루터는 중국의 사회적, 정치 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극단을 오고 가는 다양한 형상으로 부각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처음 소개되는 루터의 형상은 천주교에서 개신교를 분립시킨 종교적 “창시자”이었다. 이 시기는 중국 개명 지식인들 이 나라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통한하던 시기였다. “중화”라는 폐쇄적인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세계무대에서 강력한 대국을 꿈꾸는 청나라 지식인 들에게는 루터는 단지 천주교라는 독제적인 종교 구도에서 개신교를 분립 해낸 “종교적 창시가”일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 근대 계몽운동 및 정치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19시기 말 유 신운동과 20세기 초 신문화운동의 과정에서는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서는 “혁명적 개혁자”로 칭송받았다. 유신운동가들은 중국의 부패와 무능을 해 결하기 위해서는 서방의 우수한 체계를 유입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구체적인 개혁의 일환으로 개신교를 모방한 공교를 회복하고 부흥시키 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유신 지식인들은 유신운동이 실패한 이후 자신들이 이룩하지 못한 개혁의 욕망, 실패에 따른 심리적 방어로 루터를 “혁 명적 개혁가”로 이해하였다. 신문화운동 거장들은 공교를 미신하는 유신운동가들과 정반대로 종교를 국민을 세뇌시키는 아편과 같은 존재로 혐오하였기에 천주교 교황의 전횡 에 대항한 루터를 혁명가로 높게 평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루터의 종교개 혁가의 색채는 제쳐놓고 오로지 혁명가의 측면만 강조한 것 역시 신문화운 동자들의 주관적이고 편집 취사적인 이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60년대까지 실질적으로 무력으로 혁명을 강행하 는 신해혁명 및 공산주의 혁명에서는 오히려 혁명가들에 의해 혁명을 반대 하는 “반혁명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강렬한 성토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끊임없는 정치 이데올로기운동 속에서 루터는 꾸준히 혹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계급 분석 방법”이라는 틀 속에서 엥겔스의 루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자리배김하고 독일 농 민전쟁을 계급혁명의 차원에서 평가할 때 루터의 사상과 행적은 “반혁명 배신자”로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말 개혁개방을 맞이한 새로운 역사적 상황부터는 “인문적 사상 가”로 루터의 형상이 새롭게 수립되고 있다. “계급”과 “혁명”이라는 주제 가 사라지고, 더불어 아직도 공산주의사상이 지도사상인 중국 공산당 집권 속에서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 지속되는 중국 당대의 시대 환경에 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에게서 “혁명”과 “종 교”라는 주제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오로지 “인문”이 아닐까? 개혁개방 이 후 현재까지 “인문적 사상가”로 새롭게 수립되는 루터의 형상은 현재진행 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