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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시대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 마을에 거주했던 진양 하씨(안계 하씨)가 혼인을 맺은 집안[婚班]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통해 안계 하씨 집안이 지닌 정치사회적 성격이 드러날 것이다. 안계 하씨는 15세기 중후반부터 안계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로 1900년에 태어난 인물들까지 이 집안에서 맺은 혼인의 건수는 568건에 달한다. 혼반의 수는 50개의 성씨, 108개의 본관이며, 대체로 경상우도 지역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안계 하씨 혼반의 성격은 초기의 혼반에서 대체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入鄕 초기부터 河弘度·河弘達·河澈·河泳의 주도 하에서 결정된 혼반까지의 숫자는 20개 성씨 28개 본관인데, 이들 혼반의 특징은 ‘德川書院 운영 주도 및 참여’, ‘曺植 문인 및 사숙인’, ‘鄭仁弘 관련’, ‘北人 관련’, ‘壬亂 참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초기 혼반과 혼인을 한 건수는 전체의 약 25%에 달하며, 이러한 특징을 지닌 여타 혼반과도 지속적으로 혼인을 맺었다. 또한 인조반정 이후에는 대체로 남인 계열의 집안과 혼인하였는데, 그중에서 남인의 색채가 짙은 혼반도 있었다.
        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晉陽河氏 가운데서 河珍을 시조로 하는 司直公派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名公巨卿이 배출되어 대단히 번성하였다. 그러나 領議政 河演, 大司諫 河潔 등이 현달하여 서울로 옮겨가는 바람에 진주에서는 명성이 줄어들었다. 다시 그 후손 중에 咸吉道 觀察使를 지낸 河襟이 朝鮮前期에 진주로 還故함에 따라서 다시 문호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南冥 이후 제일인자’라는 명성을 얻은 謙齋 河弘度와 그 아우인 樂窩 河弘達, 그리고 낙와의 아들이자 겸재의 조카인 雪牕 河澈 등이 나와 南冥學을 계승하여 큰 학문을 성취하여 이 家門의 격을 높였다. 科擧나 仕宦을 통한 번성은 아니었으나 학문과 儒論을 주도하여 지역 유림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냄으로써 집안을 현저하게 만들었다. 河東[조선말기까지는 晋州] 安溪마을에 거주했던 晉陽河氏 司直公派 가문의 역사와 특성을 자세히 고찰해 보고, 그 가운데 가문을 번성하게 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선별하여 그들의 유림사회에서의 행적을 고찰하여 밝혔다.
        3.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양하씨 滄洲 河憕家門은 진주의 전형적인 토반 사족가문으로서 17세기 초 반까지는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그 후 양송을 통해 畿湖學을 수용하면 서부터는 강우 서인[노론]세력으로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으며, 그런 흐름은 한 말까지 지속되었다. 북인 남명학파에서 서인 기호학파로의 전향은 인조반정 이 후 江右 지역을 덮친 정치사회적 격랑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 이후 滄洲家의 사회적 활동은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판도 위에서 설정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제약도 작지 않았지만 이들은 현조 滄洲 河憕(1563-1624)에 대한 각종 추양사업을 추진하며 문호의 기반을 확충함은 물론 지역 노론세력 및 중앙의 노론계 관료들과 연대하여 강 우지역 노론계 공론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부심하였다. 하증의 6세손 河鎭兌에 대한 孝子旌閭運動이 강우 지역 노론계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추진되고, 또 갖 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에 걸쳐 공론이 유지되어 마침내 정려를 하사받 을 수 있었던 것도 강우지역 노론사회에서 지니는 창주가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사환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었던 창주가가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하 게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풍부한 경제력에 있었다. 18세기 초반에 기준할 때, 창주가는 1,000斗落에 육박하는 전답과 100구에 달하는 노비를 소 유하고 있었음이 분재기를 통해 확인되고 있으며, 시기가 지날수록 경제 규모 는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은 단순히 문호의 유지 차원을 넘어 창주가의 인사들이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사론을 주도해나가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시론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강우지역 사족가문의 존재양태를 고문서를 통해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혀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것이며, 남 명학파 연구로 대표되는 사상사적 분석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 일정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