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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development process of modern repair systems in the Korean peninsula. Sasungjeon, one of the main buildings of Jangansa temple located in Geumgangsan, was repaired from 1941 to 1944. It was the very last restoration work of historic wooden architecture perform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This work was delayed multiple times because of insufficient materials and human resources. The Bureau of Education(學務局), which was in charge of repair work, understood that the problems of the repair system and suggested reorganizing the system as a solution. This study examined the repair work of Sasungjeon as a background of the bureau’s suggestion and considered this suggestion as an attempt to transform the repair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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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the correlation between conservation activities and the development of tourism in the modern period in the Korean peninsula. The main building of Jangansa Temple, located in Mt. Geumgang, was repaired in the 1930s. During the repairs, the Japanese General-Government actively engaged in the development of Mt. Geumgang and raised funds for the oper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tourism revenue. The repair work was carried out under the influence of the Mt. Geumgang development project. And its influence is revealed by reviewing official documents recording repair work. This study tried to clarify the relationship between development and repair work through official doc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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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6.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충남 서산에 위치한 금강산 내 신갈나무림과 소나무림의 유기탄소 흡수량의 비교를 위해 2013년 9월부터 2014년 8월까지 지상부와 지하부 생물량, 낙엽생산량, 낙엽층의 낙엽량, 그리고 토양의 유기탄소 분포량, 토양호흡량을 측정하 였다. 지상부와 지하부 생물량에 분포하고 있는 유기탄소의 양은 신갈나무림과 소나무림에서 각각 115.07/34.36, 28.77/8.59 ton C ㏊-1이었으며, 임상낙엽층에 각각 4.89, 6.02 ton C ㏊-1, 토양층에 각각 132.78, 59.72 ton C ㏊-1 50㎝-depth가 분포하여 신갈나무림과 소나무림의 전체 유기탄소량은 281.52, 108.69 ton C ㏊-1으로 나타났다. 본 조사지소 신갈나무림과 소나무림에서 연간 광합성을 통하여 식물체에 고정된 유기탄소량은 각각 10.64, 3.64 ton C ㏊-1 이었으며, 낙엽생산을 통해 임상으로 유입되는 유기탄소량은 신갈나무림과 소나무림에서 각각 2.83, 2.20 ton C ㏊-1 으로 나타났다. 토양호흡을 통하여 방출되는 유기탄소량은 신갈나무림과 소나무림에서 각각 9.77, 5.54 ton C ㏊-1 이었으며, 유기탄소 순생산량과 미생물호흡량의 차이로 추정했을 때 본 신갈나무림과 소나무림에서 연간 대기로부터 순 흡수하는 유기탄소는 3.90, 0.81 ton C ㏊-1 yr-1 로 나타나 신갈나무림의 유기탄소 흡수량이 소나무림에 비해 현저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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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99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stimate rainfall around the district of Mt. Kumgang using several orographic factors where rainfall can not be measured routinely. Orographic factors used are height-reading, direction of main valley, relative relief, degree of exposure, and direction of maximum slope. The distribution of calculated rainfall around Mt. Kumgang coincides well with that of observed one and shows much rainfall in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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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세기까지 금강산을 유람한 인물은 모두 32명이며, 이들이 남긴 유람록 작품은 모두 37편이다. 이들이 금강산을 유람한 유람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금강산을 찾아가는 유람 경로, 금강 산을 유람하는 과정의 유람 경로,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유람 경로이다. 여기에서 다시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는 내산에서 유람 을 시작하는 경우와 외산에서 유람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비로 봉을 등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17세기까지 금강산 유람록에 나타난 금강산 유람 경로의 특징은 다 섯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람 인물은 한양, 근기지역 중심이었다는 점이며, 둘째 금강산 유람은 주로 내산 중심이었다는 점 이고, 셋째 금강산 유람지의 명칭이 변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 유람객들의 숙식처는 사찰이었으며, 금강산 내에서의 경로는 주로 승 려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며, 다섯째 유람 기일에 따라 유람의 경로와 일정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들은 오늘날과 비교해 보았을 때 후대로 갈수록 다른 양상 으로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금강산 유람 인물이 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게 되고, 외산 쪽으로 새로운 유람 경로 가 등장하게 되며, 오늘날 사용하는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의 용어 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등장하게 되리란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 고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도 점차적으로 다양화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역사적으로 금강산은 크게 霜嶽, 楓嶽, 皆骨, 蓬萊라는 이칭이 있었 다. 상악, 풍악, 개골은 불교가 수용되기 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금 강산의 고유 명칭이었다. 특히 상악은 국가주도로 행하던 名山大川祭 중 小祀를 지내던 곳으로 三國史記 祭祀條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 사료까지 고증해 본 결과 상악은 가장 처음 ‘국가공명’으로 사용된 명칭 이었다. 삼국시대 이후 사용되지 않다가 조선후기 불교식 이름으로 고 착된 금강이란 명칭에 대한 儒者들의 비판여론 속에서 묻혀 있었던 상악이라는 명칭이 다시금 거론되고 금강산의 원 명칭으로 고증된다. 풍악, 개골은 고려전기까지 꾸준히 사용되다가 고려후기 금강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면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文士들의 詩文 내 용에 두 명칭이 계속 나타나긴 하나, 금강이라는 명칭에 가려져 산을 대표하는 題名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이 두 명칭은 가을, 겨울 등 특정 계절에 나타나는 형상에 따라 각각 붙여진 것이 아니다. 돌산으 로 이루어져 있는 지세와 단풍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모습 등 계절을 불문하고 산 자체에서 풍기는 形勝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금강은 華嚴經에 曇無竭菩薩이 상주한다는 산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불교식 이름이다. 불교의 수용이후 14세기 후반 금강산은 불교성지 로 큰 명성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시기 산의 명칭 또한 금강으로 보편화 되어 사용된다. 조선시대에는 유자들의 거부감을 일으키고 비판의 대 상이 되었지만, 이미 금강이라는 명칭은 대내ᆞ외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도 금강산이라 칭했다. 현재에도 이러 한 전통이 계승되어 금강이 대표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봉래는 고려시대까지 이상세계 표현을 위한 것 외에 금강산의 異稱 으로 불린 예가없다. 조선시대부터 문인들이 금강산을 봉래로 빗대어 표현하기 시작했다. 금강이라는 불교식 이름의 대안도, 道敎의 공간으 로 표상화하기 위해 전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금강산이 Utopia와 같은 곳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題材나 배경으로 사 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금강산을 이칭하는 대표 명사로는 거의 사용 되지 않았다.
        13.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 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 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 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 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