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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이황과 이이의 철학을 사칠론과 리의 자발성이란 측면 에서 검토한 것이다. 이황과 이이의 사유를 비교하자면 이황은 실존 적이라면 이이는 일반적이다. 이황은 실존적 경험과 수양을 중시했 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칠론에 관심을 가졌다. 사칠론은 삶 속에 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의 분류학이기 때문이 다. 또한 사칠론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리발설을 주장하게 된 다. 도덕적 마음으로서의 사단은 인간의 육체적 경향성과 반하는 것 이기 때문에, 그것과는 다른 근거에서 유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서 그는 사단이란 리에서 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이황의 사유 과정은 구체적 실존, 사단과 칠정으로 분류되는 현상적 마음, 그리고 사단과 칠정의 존재론적 근거로 진행된다. 만약 사변적 인 관심만을 가졌다면 이황은 기대승과의 논쟁에서 그렇게 자신의 사칠론에 대해 이론적인 변경을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황은 자신 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정확한 반성과 인식 은 그로 하여금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틀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게끔 했던 것이다. 반면에 이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황을 비 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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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주희의 심성론은 伊川의 분석 태도에 근간하여 心體理性의 心性生理觀으로 구성하였다. 理氣로써 心性生理를 말한 것은 즉, 心性과 理氣의 관계이며, 性卽理는 性善惡混說의 근본이 되고 慾과 서로 대립관계이며 理로써 慾을 극복해야 한다. 性體는 心體에 종속되어 心統性情을 주장하였다. 心性으로써 情을 다스려 情의 昏蔽를 排除하여야 한다. 心性을 이론 기초로 하여 致知窮理함으로써 지능을 확충하고 敬을 함양하여 致中和의 논리가치를 이루었다. 주희의 心性論은 실제로 周, 邵, 張, 程의 一元之說을 융합하여 性과 情을 통합하여 心은 一身의 主宰로 삼았다. 주희가 말하는 性은 곧 理이다. 주희는 性을 本然性(卽理性)과 氣質性(卽感性)으로 나눈다. 전자는 후자를 안에 포함하는 바의 특정한 理이다. 이이의 心性論은 주희와 마찬가지로 理氣觀에 근본을 두고 사람의 心性論에 대하여 해석을 하였다. 사람의 心과 性은 理氣의 합성으로 인식하였고 心의 體는 곧 理로 未發의 性이고, 心의 用은 즉 氣이며 已發의 情이다. 또한 情의 내심의 변화는 바로 意이다. 이에 대하여 이이는 주희와 서로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이는 人心은 육체의 감각의 일면에 치우치고, 道心은 바로 理性에 순응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人心과 道心은 상대적이면서도 둘 사이에는 상호 극복의 가능성과 연관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주희의 心性論은 조선의 性理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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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이의 대표적인 저술인 󰡔聖學輯要󰡕는 일각에서 帝王이 학문하는 교범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나 그가 초년에 出家했다는 혐의로 인해 정계의 관심 대상이 되지는 못하였다. 󰡔성학집요󰡕는 庚申換局에 이어 숙종 7년에 이이의 문묘 종사 가 실현된 것을 계기로 吳道一과 朴世采 등은 이이의 학문을 선양하며 󰡔성학집 요󰡕의 진강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였으나 서인 집권 당시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정계 일반의 논의는 활발한 편은 아니었으며, 진강 또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이는 己巳換局으로 그에 비판적인 남인이 집권한 뒤 문묘에서 黜享되었으 나 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뒤 復享되었다. 당시 숙종은 유생들의 상소 나 대신들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특명으로 복향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처 분을 거듭 뒤집는 데 따르는 명분적 부담을 피하는 한편 公論이 당론에 따라 움 직이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한 국왕의 정책 주도권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이이의 학문적 성과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여 이이의 위상을 처음 종 향보다 한 차원 높임으로써 從祀의 당위를 확증하기 위하는 조치가 수반되었는 데, 그 산물이 바로 󰡔聖學輯要󰡕의 進講이었다. 기사환국 이후 󰡔성학집요󰡕의 가 치를 주장하며 이이의 복향을 청하다 옥사한 延最績이 갑술환국 후 복권된 것 은 󰡔성학집요󰡕에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성학집요󰡕는 숙종 23년부터 27년까지 진강되었는데, 이 작업은 宣祖에 대 한 繼述로 평가되었으며, 숙종은 이이의 학설을 聖賢의 謨訓으로 평가하여 그 의 위상을 확증하였다. 한편 현전하는 󰡔성학집요󰡕 중 숙종 22년 9월에 進善 權 尙夏와 侍講院에 내린 內賜記가 적힌 것이 있다. 이것은 숙종 자신이 󰡔성학집 요󰡕 진강을 통해 경연관들과 군신의 관계를 확인하고 있다면, 시강원 관원들에 게 󰡔성학집요󰡕를 내려줌으로써 어린 세자에 대해 동일한 의미를 표상하고자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