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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배은희 목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숭덕학교를 운영하다 한일합병당시에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 투옥의 경험이 그의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하였고 1919년 10월에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장로교 목회자 중심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부터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유치원, 숭덕학교, 여성야학을 운영하였고 1927년 전주 신간회 회장을 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독신자선교회와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반대하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전주에서 임시시국대책위원회와 전주청년단을 조직하여 치안유지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 28일 이후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전주를 중심으로 이승만이 조직했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1월 13일에 전북지부를 조직하였다. 전북대표로 활동하며 2월 8일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될 때 5명의 고문 아래 있는 18명으로 구성된 참여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는 독촉국민회에 가담한 이후에 이승만의 반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947년 10월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 7월에는 이승만의 승인을 받아 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였고 김구의 비상국민회의와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임정의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민족대표자회의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여 통합에 실패하였다. 통합에 난항을 겪자 민족대표자대회와 독촉국민회가 연합하여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섰고, 배은희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배은희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승만의 정책에 독촉국민회와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목회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