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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일상에서 유학 덕목을 실천하는 기초였던 심신관리는 修身이며 이를 養生, 養心이라 하였다. 종래 남명학 연구에 서 남명이야 말로 자기수양에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남명과 그 문파들의 수신 즉 심신관리의 지혜에 관한 선행연구는 많지 않다. 본고 는 덕천서원 유생들의 심신관리 지혜의 모태를 남명이 찬술한 성리학 요약서인 學記類編, 또 남명과 그의 제자들의 행적에서 찾고자 하였 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질서에서 의학은 도덕적인 수양을 방해하는 잡학 이자 자기 몸을 보존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기 위한 일상적인 기술로 취급되었고 이는 유학이 시작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 학과 의학은 태동과 발전의 역사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송 대 신유학에서 신체원리와 병리현상의 개념이 적극 수용되면서 의 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러한 송 대 신유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반영된 글이 성리대전과 당대 유학자 들의 言表들인데 학기유편에서는 주로 이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학기유편에 근거한 생명적・역동적・실천적 세계관은 곽재우, 정인 홍, 김우옹, 정구 등의 예와 같이 행동하는 삶의 바탕이자 보이지 않는 계율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남명의 심신관리와 치병에 관한 행적은 주로 남명집에서 확인되었 다. 남명은 몸을 다스리기 이전에 마음 수양을 기초로 보고 ‘좌우명’, ‘패검명’, ‘혁대명’ 등을 지니고 '‘神明舍圖’를 붙여놓고 평생 ‘銘’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또 남명은 정신을 한 군데에 집중하고자 항상 정좌수 행과 猩猩子의 쇠방울 소리, 敬義劍의 날카로운 형태를 통해 수시로 의식을 각성시키는 등 특별한 무언가를 갖추고 행하는 심신수양의 방 법을 보여주었다. 남명이 일생동안 겪은 질병에 대해서는 9세 때 사망 직전에 이를 정도로 심한 질병을 앓았다는 것이 연보의 기록이고 문집에서는 거의 40대 이후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있을 뿐이다. 다만 20년 가까 이 반복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남명의 현기증과 두통이 고질적 지병으로 확인되었다. 남명의 성정은 자신은 물론 일상다반사에 대해 지극히 엄정했다. 이와 같은 그의 성정이 만성적인 피로감과 두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추측해 보았다. 남명은 약재를 구하거나 약을 짓는 등 본인과 가족의 질병에 대해 직접 치료를 행했던 것으로 나타나 그의 행장 등에 기록된 다양한 분야 에 관한 능통하고 의약도 섭렵했다는 구절과 다르지 않았다. 남명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학문관과 출사관을 가졌던 퇴계와 심신관 리, 의료행적을 비교해 보았다. 퇴계 본인은 물론 지인들에 대해 행한 다양한 의료 행적이 전하지만 오늘날 유학자의 양생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활인심방의 편저하기도 하였다. 퇴계 뿐 아니라 16세기 이후 에는 유학자들의 다양한 양생서가 저술되었다. 그러나 남명 문하에서 는 망우당 곽재우의 양심요결이라는 제목만 전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양생서는 전하지 않는다. 남명의 문인 중 한강 정구는 의서저술과 대민의료시설 재건 등을 통해 修己와 安人의 실천의지를 보여주었다. 한강은 의서 외에도 대민 구제를 위해 성주의국을 설치하였다. 성주의국은 임진왜란 후에 피폐 해진 의료시설로 한강은 이를 재건해 대민의료의 기반을 갖추고자 하 였다. 한강은 60대에 이르러 개인적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73세에 중풍으 로 오른쪽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한강은 중풍 발병 이듬해인 1616년부 터 중풍 치료를 위해 온천기행을 시작하여 이후 3년간 지속하였다. 한 강의 온천치료를 위한 기행은 제자 이윤우가 기록한 「봉산욕행록」에 자세하다. 봉산욕행록은 1617년 7월부터 9월의 기록으로, 45일 동안 의 여정, 한강이 매일 반복적으로 목욕요법을 행하고 제자와 관료를 접대하는 등의 내용이 쓰여있다. 남명의 또 다른 문인 망우당 곽재우 역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으로 나서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 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망우당은 개인적으로 불우했고 관료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이 과정 에서 망우당은 불로장생과 신선의 세계에 심취하였고 일반적인 유학자 들의 양생이 아닌 수련 양생의 길을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망우당이 50대에 이르러 벽곡조식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망우당의 벽곡조 식에 대해 허균과 성여신은 한나라 장량에 버금가는 처세술이었다고 변호하였다. 한국도교사에서 망우당에 대한 평가는 조선단학파의 맥을 잇는 한 사람이고 민간에서는 의병과 신선을 넘나드는 전설적인 인물 로, 덕천서원의 유생들에게는 남다른 기개의 선배로 남았을 것이다. 남명을 비롯한 문우, 제자의 박학풍은 남명문파들의 공통된 특징으 로 나타나고 있다. 덕천서원 건립에 참여했던 각재 하항,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의 제자인 함양 선비 고대 정경운 등의 예와 같이 의약으로 자신과 가족을 치료하고, 대민구휼을 위해 사우들과 의론을 펼치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사상이 재전제자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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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덕천서원은 南冥 曺植(1501-1572)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그 문인 寧無成 河應圖가 자신의 田莊을 서원 터로 제공하여서 처음 德山書院 으로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남명의 감화를 받은 여러 문인 들의 스승을 존모하는 마음과 이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상도 관찰사와 진주 목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학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파 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원장과 원임이 있어서 제대로 운영하여야만, 제향된 인물이 추구했던 학문 정신을 체득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교화의 역할 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이 서원의 운영을 주도하였던가 하는 문제는 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만년 강학지에 설립된 것이어서 남명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설립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초기에 서원 운영을 담당했 던 이들은 ‘범남명학파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파가 주도하던 북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정치적 으로 패퇴함으로써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가문으로 단성 지역에는 안동권 씨, 성주이씨, 합천이씨, 진주류씨, 상산김씨 등이 있었고, 진주 지역으 로는 안계‧명석 및 수곡‧단목에 거주하는 진양하씨 사직공파와 시랑공 파, 나동의 태안박씨, 소남의 함안조씨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 가문 이외에도 여러 십여 가문이 있지만 원임에 선임된 숫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 가문이 덕천서원의 운영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덕천서원의 창건 및 초기 중건에 관여하였던 인물의 후손들이거나, 초기 원생록에 이름이 올라 있던 인물들의 후손 들이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남명집 훼판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서인화와 남인화가 이루어지는데 서원의 운영은 남인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들 가문은 모두 남인 가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우의 연원 또한 남인 계통을 따라서, 갈암‧밀암‧대산‧정재‧한주 등과 성호‧순암‧번암‧성재 등을 종유한 인물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