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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南冥 曺植(1501-1572)의 만년 은거지인 지리산 천왕봉 아래 德山洞天에 德山九曲이 설정되지 못한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덕 산구곡의 설정이 왜 필요한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근거는 무엇이어 야 하는지, 덕산구곡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이며 그 역사적·문 화적 사실은 무엇인지, 덕산구곡 설정의 의의와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를 논의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만을 논의하면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에 孔孟과 朱子로 이어진 동아시아 山水認 識의 傳統과 九曲文化, 조선시대 선비들의 산수인식과 구곡문화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慶尙右道 지역의 학술이 극도로 침체 된 조선후기 이 지역의 학자들이 南冥學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한 것 중에 三山書院의 位相을 鼎立하여 晦齋·退溪와 함께 南冥을 추숭하고 자 한 노력, 三山九曲詩를 지어 보내 陶山九曲·玉山九曲과 함께 德山九 曲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남명학을 보전하고 계승하는 길인지를 찾아보려 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 선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 뜻 있는 인사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德山九曲을 設定하고 경영하여 德山을 명실 상부한 道學의 聖地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는 남명학을 계승하고 체험할 수 있는 현장과 콘텐츠를 확보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를 통해 安德文과 河範運이 추구한 영남의 세 先賢을 함께 존모하는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나간다면 嶺南을 鄒魯之鄕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영남이 중국의 曲阜나 武夷山 못지않은 儒學의 産室로 세계 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전반 경상우도 지역에서 활동한 河範運이 三山九曲詩를 창작한 것에 주목하여 그 내용과 의미를 분석한 것이다.하범운은 河溍의 6대손으로 19세기 전반 진주에서 활동한 남인계 학자이다. 그는 남명학과 퇴계학을 겸취하여 극도로 침체된 지역의 학풍과 기강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의 학문성향은 讀書明理와 閑邪謹獨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의리를 종자로 삼고 그 의리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점은 「自省箴」과 「山中懷古」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경상우도 지역은 경상좌도 지역에 비해 구곡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형적으로 화강암 지대가 적어 구곡이 형성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지역 학자들이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 인근은 지형적으로 구곡을 설정한 만한데도 덕산구곡을 설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19세기 전반 하범운이 처음으로 덕산구곡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덕산구곡시를 창작하였다.하범운은 1823년 안동으로 李野淳을 방문하였을 때, 이야순이 陶山九曲 詩와 玉山九曲詩를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차운시를 지어 보내면서 덕산구곡시를 추가하였다. 그리하여 晦齋·退溪·南冥을 제향하는 서원이 있는 곳을 ‘三山’으로 칭하고, 이 삼산에 구곡이 있는 것은 도학의 원류가 영남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三山九曲詩’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安德文이 세 선생을 추숭하여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점이 그가 삼산구곡시를 지어 덕산구곡을 도산구곡·옥산구곡과 나란히 드러내려 한 창작 배경이다.하범운이 지은 삼산구곡시의 덕산구곡시는 앞 시대 鄭栻이 덕천서원 뒤 산골짜기에 경영한 武夷九曲에 나아가 제목을 德山九曲으로 개정하고 曲名을 일부 바꾸어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하범운의 덕산구곡시와 정식의 무이구곡시를 비교해 보면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식은 주자의 「무이도가」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으려 한 반면, 하범운은 남명의 精神과 氣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범운의 덕산구곡시는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회고하고 추앙하며 자기 시대의 쇠미해진 도를 탄식하는 내용이다.하범운이 삼산구곡시의 하나로 덕산구곡시를 추가한 것은, 安德文이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의 덕산을 옥산·도산과 하나로 합해 도학의 연원과 학문의 본질이 같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여기에 그가 지은 삼산구곡시의 의미가 있다. 하범운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덕천서원이 있는 덕산에는 남명의 유적을 중심으로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조선 후기 이 지역 인사들의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퇴계 후손들이 도산구곡을 적극적으로 설정한 것처럼 남명 후손들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하였던 것이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