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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6

        1.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원찰․원당의 시각에서 조선 시대 동학사 내 동학삼사(東鶴三 祠)의 불교사적 전개를 통해 이곳에 모셔져 있는 인물들을 위한 의례에 주목한 연구이다. 동학삼사에는 현재 단종을 비롯하여 단종의 거사를 돕 다 죽임을 당한 종친과 사육신 및 생육신, 관료 그리고 심지어 노비들도 제향되고 있다. 특히 계룡산 초혼각지(鷄龍山 招魂閣址)는 야은 길재가 동학사의 승려와 함께 단을 쌓고 고려의 국왕과 정몽주를 초혼하는 제사 를 지냈다는 점도 원찰 연구의 단초로 삼는다. 또 하나의 전각으로 숙모 전(肅慕殿)을 다룬다. 이곳은 계유정난을 계기로 등극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면서 건립되게 된 조선의 역사적인 공간이다. 본 논문은 동학삼사의 공간을 단순히 유교의 사당이나 사우로 볼 수는 없다는 점에 집중하고 있다. 말하자면 숙모전을 포함한 동학삼사에 모셔 지고 제향되는 인물들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조선시대 유교 의 례와 불교적 죽음관 및 그 의식이 혼합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동학사 동학삼사의 공간/장소에서 특정 인물들을 제사해 온 역사를 일차적으로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유교적․불교적 의례 혹은 이들 의례의 혼합양상이 번갈아가며 지속되는 양상을 포착할 수 있었다.
        8,000원
        2.
        2017.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Donghak, an awareness of Hanul in all aspects of life awakens spirituality and vitality in human beings and begins to heal the world. Dong-yup Shin determinedly searched for a literary re-contextualizing of this thought of Donghak to reestablish oppressed people as the subject of history. This article examines such an attempt in “The Talking Ploughman’s Earth,” Shin's debut work. The singularity of this poem lies, especially, in how it embodies the spirituality and vision of Donghak through the narrative of a rite of passage. By passing through Donghak’s initiation rite, Ploughman, the narrator of this poem, acquires spiritual subjectivity and gains the key to world healing. Finally, his adventure encounters the philosophy of the history of Donghak, which tries to transform the ‘here and now’ into a site of hope, and with this, it secures the possibility of restoring the subjective puissance of the people.
        5,700원
        3.
        2015.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동학과 천도교의 경전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나타난 수운의 신비체험을 ‘공공기복’(公共祈福)의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기복은 종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존재론을 구성한다. 기복의 현상이 사회적 공공성을 지닐 때 새로운 차원의 공동체적 응집력을 지닌 사회변혁과 개혁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용담유사』는 기복의 성격이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는 경전이자 한글가사이다.『용담유사』에는 고통, 기복의례, 누미노제, 주체의 각성, 수행의 주제가 고백적으로 기록되어 있다.『용담유사』는 민중을 교화하기 위한 교육적, 개혁적 한글가사로서 공공기복의 개념과 부합되는 경전이다. 『용담유사』에 나타난 수운의 신비체험은 개인의 고통을 구도수행으로 극복하고, 인간 에너지의 최고 형태인 사랑, 애민(愛民)정신으로 생명 간의 끊임없는 연결과 소통을 추구하며 융합 정신으로서의 공공기복을 구현하고자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용담유사』는 불운한 시대의 아픔을 포용하는 영적 구도자인 수운의 깨달음과 우주적 합일을 통한 사회적 헌신을 종교문학적으로 고백하는 영적 노래로서 주체의 각성과 융합정신의 회복은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의 기복적 구도수행이 공공기복의 시민종교정신으로 재탄생 될 수 있는 새로운 구원의 서사를 제시하고 있다.
        5,800원
        5.
        2014.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서부경남지역의 저명한 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조성가의 ..월고일기..를 통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의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을 살핀 것이다. 서부경남지역은 관리들의 탐학과 혹심한 가뭄으로 자주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1894년 4월 산청 덕산에서 백낙도 등의 동학교도들이 처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부터 호남지역의 지원을 받아 덕산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8월 19일부터 곤명의 봉계와 진주의 마동 일대에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학농민군에 비판적인 사족들을 체 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9월 초 섬진강을 건너온 순천, 광양의 영호도회소나 구례 등지를 거쳐 남원 등에서 온 호남지역 농민군과 함께 하동,진주, 사천, 곤양 등지를 동학농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왜적의 침 입을 막아낸다는 명분하에 대규모로 집결하였기 때문에, 진주 병영이나 관아에 서도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군을 공 격하게 하였다. 그 중 가장 큰 전투는 10월 14일 전개된 하동의 고성산성 전투 였다. 동학농민군은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무기와 전투기술 에 눌려 끝내 동학농민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이곳에 관군이 진격하 고 진주 우병영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종식되게 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맞서 경상 우병영에서는 각 지역의 사족들을 군무 참모관으로 임명하고, 지역별로 성첩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각 지역별로 요호(饒戶)를 대상으로 군무참모관을 뽑아 향회를 개최하고, 성첩 을 수리하고, 군기를 보수하였으며, 군량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당시 사족들은 경상우병영의 대책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나, 어쩔 수 없이 자금을 제공하고, 군무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 각 마을에서는 오가작통제를 강화하고 산에 보를 축조하였다. 오가작통제는 경상감영의 지시로 실시되었는데, 각 洞에 오고가는 자를 살펴서 수상한 자취 가 발견되면 통수→두령→통장→영수→관아→감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 었다. 보는 진주 우병영의 지시로 단성이나 옥종면 일대의 산에 많이 축조되었다. 월횡리에서 축조한 사림산 보의 경우, 보의 축조에 마을 사람 전체가 동원되었 다. 마을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성문을 축조하고 보 안에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었다. 그리고 식수원과 연결하는 길을 내었다. 그러나 이 보는 땅 이 좁아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기 불편하였고, 동학농민군의 신속한 공격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오가작통이나 보의 축조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는 동학농민 군에 가담한 인물이 점차 늘었다. 월횡리에는 최소한 두 개 이상 동학농민군 조 직이 있었으며, 10월 초 일본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동학농민군 에 강제 징집되었다. 대부분 탈출하였으나,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을 따라 백곡, 수곡, 북평을 거쳐 이동하였으며, 고성산성 싸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패배함에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죽거 나 피신하였으며, 월횡리에는 도인과 속인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동학농민혁명 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