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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first claims that the Avatamsaka (Sanskrit) Sutra, or the Flower Ornament Sutra (大方廣佛華嚴經) is the best writing among the innumerable Sutras and other books that describe Truth. The Chinese characters in the Avatamsaka Sutra shows infinity, innumerable Bodhisattvas and the infinite Dharma body (無限法身) of Vairocana (毘盧遮那佛). Yet this dimension of the ultimate reality is not simply that of the nihilistic (虛無主義的) nothingness or void. Emptiness is the perfect emptiness with wondrous movement, and it is the most profound source (根源) of all animate existences and inanimate things. I claim that literary reading and watching films have the innate purpose (目的) of having this meditative mind, of which the most profound spiritual vision is presented as Ocean Samadhi in the Avatamsaka Sutra. In the first place, the innate (內在的) guide us to clearly see the binary structure (二元對立構造) of ego (自我). The ego is unstable between good and evil, right and wrong, decency and destitute. In order to let the audience feel free from the ego, we should take a profoundly different way than thematic approach (主題的接近). This way of understanding literary works and films is not to find the author’s intention and the main message implied in the work. Literature, film, and other arts are special areas that lead audiences outside the local, petty ego that is, into the dimension of the true self or the Transmiddle zone (領域) with special power of sensibility (感覺). As a literary text or film constructs the plot, story, and mood, it deconstructs itself (in terms of postmodernism). Ethical deconstruction would lead the audience beyond the limits of time and space into the spiritual dimension. A serious (深奧) literary text or film Great works (傑作) of literature and film direct our attention to break the shell (外觀) of our ego and encounter (直面) the source of life outside the ordinary habit of the ego. The exterior of the ego is the dimension of the pure consciousness. The unveiling process is the way in which it unlocks our spiritual sight (靈的視視) and presents with us a story of the protagonist’s failure (失敗) to flourish (繁榮) in the society (社會). The primal reality of the ego is that it is split into two, and thus fundamentally unstable. The ocean Samadhi (海印三昧) as portrayed in the Avatamsaka Sutra presents us with the vision that the whole cosmos (宇宙) and uncountable atoms are one. In this spiritual light, all phenomena in the whole universe are dependent co-arising or interdependent arising (同時發生); it is possible because everything is empty and has no stable substance. The Avatamsaka Sutra presents that the Buddha-body comprises, and thus it is truly “Emptiness (眞空) as Fullness (充滿).” Phenomena as the variances of Emptiness go through the processes of birth and death, not the Emptiness itself. It is like “empty space.” In the Hua-yen marvelous cosmos of Emptiness as fullness, one and all are interconnected with one another, and it is beyond our intellectual understanding (知的理解). In this way, Chinese characters (漢字) in the Avatamsaka Sutra (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describe (描寫) the infinite Dharma body (無限法身) of Vairocana (毘盧遮那佛). The ultimate truth is nondual (不二), and thus nonphenomenal (非現象的). The truth (眞理) of every existence (存在) is actually the spiritual dimension of not one, not two (不一, 不二). “Not one, not two” is the characteristic nature of the dimension beyond time and space, for it indicates the most fundamental realm (根本領域) of transcendence, where all phenomena are both separate and one.
        7,700원
        2.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discusses how Western thought would be developed far more with the help of Buddhist philosophy, which pursues the ultimate Truth (窮極 的 眞理) in a direct way. The Chinese characters employed in this paper would make meanings of the words clear. Western metaphysics has been a study of the presence of existence that goes with reason and logic in the dualistic mode of thought (二分法的 思考) with binary opposition, and even the contemporary thought to be called “postmodern ethics” is not fully free from that mode of thought. On the other hand, Buddhism (佛敎) in general has been the religion of “Emptiness”(空) for almost 2,600 years, and especially the philosophy of Mahayana Buddhism (大乘佛敎 哲學) has been “true Emptiness with wondrous movements”(眞空妙有) for about 1,500 years. The true Emptiness has been misunderstood by many Western thinkers with the concept of nihilism. But Emptiness as the ultimate reality transcends (超越) both states of presence and absence and produces both. In this paper, the philosophies of Deleuze and Levinas and affect theory are taken as the supreme examples of contemporary Western thoughts that tries to reach the genuine transcendence that lies beyond/behind/beneath, and also within, phenomena more directly than ever. Shakespeare’s Hamlet and Stevendon’s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are discussed as the representative literary works that show Western literature has pursued Emptiness and led readers to it through the moments of the sublime. The sublime seems to be a weak state of Samadhi , the Buddhist way of reaching the perfect Emptiness. Then this paper demonstrates that the Avatamsaka Sutra presents to us the ocean Samadhi penetrates the whole universe or universes where everything happens in terms of cause and effect, sources and consequences. I am convinced that we as Asian scholars should great efforts to present more ideas on the reality of true Emptiness with wondrous move ments(眞空妙有) to Western scholars and people in general.
        6,100원
        3.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의 목적은 함허선사(1376~1433)의 사상을 살펴봄과 동시 에 수행과 깨달음에서 오는‘비움과 충만’의 시적 미학을 모색하는 데 있다. 함허는『현정론』을 통해 유자들의 불교비판의 부당성을 주 장하고‘유불융합’의 회통과 조화로운 관계 모색을 통해 불교의 정체 성을 지켜내려 했다. 그의 이러한 사유와 실천은 앞서간 선사들을 통 한 자기 확인, 점수(漸修)의 과정을 담은 관조의 시, 산사에서 느끼는 한가함과 탈속무애한 정서가 내재된 시편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함허의 이러한 시적 세계는 직관을 통한 교화사상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시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과 조화를 이룬 무 심의 세계는 그의 선적 직관과 시적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물아일여의 깨달음의 세계이다. 여기에는 내려놓기와 걸림이 없고 무심한 삶의 관조의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함허의 수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역시‘선다일여(禪茶一如)’의 수행이다. 그래서 함허는 깨달음을 얻어가는 수행 과정에서 차로 마 음을 맑히고 진여를 찾는다. 한 잔의 차를 마심으로써 집중과 통찰을 높이고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관조하며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체의 집착을 놓아버리고 무심의 상태에서 사물을 관조하는 무심합 도에서 배태된 함허의 맑고 투명한 언어의 시편들은 내려놓기와 비 움의 지혜를 준다. 또한 그의 이러한 시편들은 텅 빈 충만의 세계를 보듬게 함으로써 번다함과 집착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지친 심신 을 치유하는 한 줄기 바람으로 작용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7,800원
        4.
        201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서양의 문학과 예술의 비평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심적 문제로 다루어져 온 숭고미를 동양의 종교인 불교의 철학, 특히 선(챈, 젠)불교와 접목시켜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문학과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에 경험하게 되는 향유(enjoyment; jouissance)가 가장 고조되는 순간이 숭고미의 순간이라 함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보면 독자의 생각을 형성하는 이분법의 양변이 없어지고 중도를 통해 공에 접근하는 경험이다. 유뿐 아니라 무의 개념도 초월하여 개념이 성립하지 못하는 영역을 잠시나마 접하는 경험이다. 이러한 목적과 취지로, 본 논문은 우선 데리다, 라캉, 들뢰즈 등의 이론을 조명함으로써 왜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자아의 바깥인 타자를 가장 근본적으로 접근하고 동양철학과 가장 근접해있는 이론인가를 살펴본다. 그 다음은 불교철학에서의 개념들을 유대교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인 레비나스의 생각과 접목시켜서 서양의 문학비평이론에 위치시키는 작업이 뒤따른다. 서양의 절대 신과 불교의 공의 개념의 개념을 비교하며, 그 툴이 생각과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하나의 뜻을 지녔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 논문은 생각과 체제의 차원에서는 엄격히 다른 종교들이 결국 추구하는 바는 같고 그것이 문학의 목표이기도 함을 논의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순수자아"는 불교의 "진아" 또는 "참나"와 같으며, 그것은 가장 깊은 내면에서 자아가 자기해체를 하며 절대적으로 자신의 외계(단순히 무시 받는 남으로서의 타자가 아닌)인 타자를 직면하는 자아이다. 문학서적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생각의 이분법을 넘어 자신의 외계를 일견하는 것은 이러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작은 개념으로서, 텍스트가 마치 선불교의 "공안"과 같은 구조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텍스트의 총체성을 해체시키는 읽기는 마치 이성의 힘, 생각의 차원 이상을 목표로 하는 선문답과 같은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문학텍스트를 읽음으로써 향유와 숭고미를 경험할 때 그 의식이 텍스트와 하나가 되며, 텍스트의 총체성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규정하는 자아의 틀까지 해체하게 됨으로, 이것은 곧 (언어와 행동의 틀을 가지고 있는 "도덕"이 아닌) 절대윤리를 대변하는 것이 된다. 화엄경 등에 나오는 공과 무한에 대한 말들이 어떻게 현재의 포스트모던 윤리학과 그것을 이용한 문학비평 형성의 발전에 공헌될 수 있는가가 논의된다. 결국 독자의 문학택스트 읽기의 최종점은 부처의 마음과 지혜에 도달하는 것인데, 큰 규모가 아니라 단지 섬광과 같이 그 무한한 공의 상태를 숭고미를 통해 맛보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필자의 생각인 "숭고주체"가 설명된다.
        7,000원
        5.
        2015.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T. S. 엘리엇의 「텅 빈 사람들」에 나타난 “허공” 의미가 엘리엇이 주장하는 “전통”의 의미와 어떻게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고 그 의미가 확장되어 모더니즘 측면에서 스티븐스의 「눈사람」에 나타난 “무”의 의미와 연결시켜 보고자한다. 두 시인이 말하고자했던 “무”가 단 순히 비어있음이 아니고 실재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이거나 또는 제한된 인간의 시각으로는 규정지울 수 없는 범위를 표현하는 방식임을 증명하 고자한다. 엘리엇은「텅 빈 사람들」에서 “텅 빈 것”과 “채워짐”의 관계를 근접관계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단순한 “허공”의 의미를 어떻게 극복 하는 지를 보여주고 스티븐스는 「눈사람」에서 잠재성이 있는 무와 존재 하지 않는 무로 구분하여 실재에 다가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두 시인의 목소리가 표면적으로는 다른 것처럼 보이나 결과적으로 두 편의 시에서 독자는 같은 것을 고민하는 두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