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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경복궁은 조선 건국과 함께 창건된 궁궐로 태종, 세 종, 세조를 거치면서 법궁(法宮)으로 위상을 갖췄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를 시작으로 여러 국왕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270 년간 중건하지 못하였다. 경복궁의 공지(空地)에는 내농포(內農圃)가 들어섰으 며, 때에 따라 군사훈련을 하거나 왕실의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소실 이후 경복궁에는 전각터를 비롯하여 궁성(宮城) 과 궁성문(宮城門), 수계(水系)와 천문 관련 시설 등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궁성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로 유지 관리되었다. 궁성문에는 돌을 쌓아 출입을 막았으나, 광화문 동협문에는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별 도의 문을 두어 출입하도록 했다. 경복궁의 수계시설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祈雨)를 위해 정비되었으며, 영조 대에 들어 물이 잘 흐를 수 있 도록 준천(濬川)되었다. 이외에도 간의대(簡儀臺), 소간 의대(小簡儀臺) 등의 천문 관련 시설이 남아 있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이 발견 되어 관상감(觀象監)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광화문 밖에 남아 있던 세조 대 제작된 동종(銅鐘)은 종각을 세워 보 호하였다. 경복궁의 수비와 관리를 위하여 공궐위장(空闕衛將) 과 수궁내관(守宮內官)이 경복궁 내에 위치한 위장소와 수궁에 상주하였으며, 매일 포도청과 삼군문이 경복궁 외부를 순라(巡邏)하였다. 이러한 인력을 통한 관리와 함께 난입과 벌목, 내맥(來脈)의 굴토(掘土)를 금지하는 금령(禁令)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어기는 경우 처벌하였 다. 이러한 경복궁의 관리와 함께 근정전, 사정전, 강녕 전, 경회루 등의 전각터에서는 선대왕의 고사를 바탕으 로 왕실행사가 계속되었다. 현종 대 강녕전 터에서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종묘 부묘(祔廟)를 위한 제주(題柱)가 행해졌으며, 숙종은 경 복궁 신무문 밖에서 행해지는 회맹제(會盟祭)를 위해 경복궁에 친림하였는데, 이러한 회맹제 때 국왕이 경복 궁을 찾는 것은 이후 경종과 영조 대까지 이어졌다. 숙 종은 회맹제 외에도 세조 대 경회루에서 행해진 양로연 (養老宴)의 고사를 따라 노인연(老人宴)을 열었다. 영조는 회맹제를 시작으로 숙빈 최씨 사당의 전배(展 拜)와 관련하여 경복궁에 친림하였다. 이와 함께 경복궁 에서 과거시험을 열었으며, 친잠례(親蠶禮), 진작(進爵), 조참(朝參) 등을 행하였다. 영조 대 친잠단과 문소전 터에 세워진 어필비는 영조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문소전구기비의 경 우 이후 국왕들이 지속적으로 전배하였다. 또 경복궁은 춘당대(春塘臺)와 함께 정시(庭試) 과장(科場)으로 정해 졌기 때문에 철종 때까지 정시가 계속 열렸다. 경복궁 신무문 밖 공지에서도 회맹제(會盟祭)와 군사 의례가 행해졌다. 영조 대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 등의 사묘(祠廟)가 건립되고, 인원황후의 탄생지 인 양정재(養正齋)가 어필 봉안처가 됨에 따라 소란스 럽게 행해진 신조기휘제(新造旗麾祭), 호궤(胡跪) 등의 군사의례는 한양 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 행해졌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기초자료로써 문헌에 기록된 소 실 이전의 경복궁 전각배치와 중건 초기 경복궁 내의 수계와 내맥 등이 반영된 다양한 <경복궁도>가 제작되 었다.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은 경복궁 내부 청소를 시작으로 수계와 내맥이 정비되었다. 우선 경회루지와 후원지를 준척(濬滌)하였으며, 준척에서 나온 흙으로 내맥을 보토 하였다. 이와 함께 경회루지의 제방(堤防)과 첨계(檐階), 섬 등은 개축(改築)되었다. 수로 역시 정비되었는데 기 존에 관리되던 수문은 시설의 변화 없이 단순히 준천만 하였지만 관리되지 못한 수로와 수문은 새롭게 고쳐 쌓 았다. 경복궁 공지를 차지하고 있던 내농포와 궁성 밑 민가 들은 한양 곳곳으로 옮겨졌으며, 어필비각과 위장소와 수궁 역시 훼철되었다. 간의대와 소간의대를 훼철한 후 나온 석재는 경회루 첨계, 건춘문 지대석, 근정전 품계 석 등에 재사용되었으며, 광화문 밖 동종 역시 녹여 향 로와 토수(吐首) 등을 제작하였다. 신무문 북쪽 지역은 중건과 함께 경복궁 후원으로 포 함된다. 이에 따라 육상궁 동쪽에 담장을 쌓으면서 후원 안에 위치하게 된 연호궁은 창의궁(彰義宮)으로 이봉 (移奉)되었으며, 양정재는 영조와 정조의 어필 봉안처로 서 경복궁 후원에 남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궁성과 궁성문, 주요 전각터 등 은 훼철 후 다시 지어졌지만, 그 규모와 배치는 크게 바 뀌지 않았다. 다만 강녕전과 사정전 사이에 행각이 건설 되어 강녕전 전면 좌우 건물의 위치와 명칭에 변화가 있었다. 광화문과 강녕전에는 다른 궁궐과 같이 월대를 새롭게 쌓았으며, 경회루와 근정전, 광화문 월대에는 난 간이 새롭게 세워졌다. 이와 같이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0년간 중건되지 못하였지만,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조직과 법 령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경복궁은 유지관리 되 었다. 이러한 관리를 바탕으로 유지된 경복궁에서는 왕 실행사가 행해졌으며, 이로써 법궁으로서의 상징성이 유지되었다. 문헌과 중건 초기상황이 반영된 <경복궁도>는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의 기초자료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에서 내부를 점유하고 있던 시설들은 훼철되거나 자재로 재 사용되었다. 경복궁 내 남아 있던 전각터를 바탕으로 전 각이 중건되었으며, 경복궁 궁역이 신무문 밖까지 확대 되었다. 중건 경복궁에는 270년간 궁궐 건축 변화가 적 용되었으며, 월대의 난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기도 하였다.
        2.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focuses on the 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seco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which has been spotlighted for political and economic history. The author analyzed the contents of wood procurement with the Yeonggeon Diary, which records each day of construction site.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2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Yeonggeon of Gyeongbokgung Palace, was a new building that reflected the old system and 270 years of changed environment on the existing site. Despite the poor economic conditions, it began with years of effort and voluntary volunteer work and dedication. Second, the priority of timber transport was recruiting people in the whole process and the supply and demand of transportation tools. Carrying lumber from the mountains to the riverside and floating it at the right time were all a matter of manpower. Soldiers and carts were used to carry timber that arrived in Hangang River to the construction site. The cart was a consumable product, so it was necessary to continuously use the wood to make cart at the site. Third, fire and flood were the biggest obstacles to the Yeonggeon schedule of Gyeongbokgung Palace. Especially the fire was fatal. It was difficult to extinguish the fire in temporary structure, where was the storage for wood to construct. These disasters greatly affected the construction cost and construction period. Wood procurements of Gyeongbokgung Palace were based on public offerings. At the same time, recycled materials from other palace wood and nearby houses, nationwide buying of private mountain wood, the logging of royal tombs and some of the buildings of Gyeonghui Palace and Changgyeong Palace were reloc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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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focuses on the architectural changes of stele pavilion at the royal tombs of Joseon Dynasty. Throughout the survey on overall forty two stele pavilions, they were classified into basic type, expanded type, and 4-side corridor type. Basic type was usually used for general small stela, while expanded type was for extraordinarily large ones. 4-side corridor type, however, turned out to be used for both small and large stela and has appeared only during King Gojong period(高宗年間, 1863-1907). When it was first applied at Geonwolleung(健元陵) in 1870s, the purpose of 4-side corridor type seemed to stabilize the enlarged structure due to the size of the larger stele. Later, 4-side corridor type was repeated for small stela at Hongneung(洪陵) and Yureung(裕陵) in 1898 and 1904 respectively, to express higher dignity of Daehan Empire(大韓帝國). This type of plan continued to other pavilions in the center of Seoul such as Kinyeombijeon(紀念碑殿) and Seokgojeon(石鼓 殿) that were built in 1903 with sophisticated proportion and multiple brackets. This architectural change implies that stele pavilion itself has become more significant than stele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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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We report a calendar sheet for the 31st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1894) (hereafter, calendar sheet 1894) in Korea, which calendrical data in a single page. This calendar sheet 1894 is composed of 14 rows by 14 columns (about 190 cells), and various calendrical data are recorded such as the sexagenary circle of the first day in each month, 24 solar terms, full moon day. In this paper, we compare calendrical data of 1894 calendar sheet with those of the almanac based on the Shixian calendar (hereafter, annual almanac) of the same year. Our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 we find that the year is expressed using the reign-year of the king of the Joseon dynasty differently from using the reign-style of China in the annual almanac those times. Other calendar days of this calendar sheet are the same as those of the annual almanac in term of lunar dates, 24 solar terms, sexagenary days and so forth. Second, we find that the calendar sheet 1894 contains memorial days for 64 lineally ancestors of the Joseon royal family. These royal memorial days appears in the annual almanac two years later (i.e., 1896). Third, as the most distinctive feature, we find that the symbol of 工 kept every two cells. It was found that the cells can be filled with three days as the maximum number of days and then are labelled the same symbol 工 every second cell. This feature allows us to get the first year in which this kind of calendar sheet was published. It is conjectured one of 11 years, such as 1845, 1846, 1847, 1873, 1874, 1875, 1876, 1877, 1878, 1879 or 1880. We also think that the format of the calendar sheet 1894 has influenced on the Daehan-Minryeok (Korean civil calendar sheet) of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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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은 19세기 60년대부터 외세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고 프랑스와 병인양요, 미국과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또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은 제일 먼저 울릉도·독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울릉도에 일본인을 보내 벌목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이것은 1881년 울릉도 수토에서 보고되었다. 수토사들이 울릉도를 순찰할 때 일본인들이 나무를 베어 원산과 부산으로 옮기려 하였고 이 사실을 들은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관찰사로 파견하여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이규원은 울릉도 상황과 「울릉도내도」, 「울릉도외도」지도를 그려 바쳤다. 이후 조선은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도장(島長)을 두어 울릉도를 관리하였고, 군을 설치해 지방관제에 편입하고 관할 구역을 울릉도 전체와 독도를 포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고종의 관방정책으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집권하면서 1870년대 초부터 국경 방어에 관심을 갖고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관방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국경지역인 동래, 의주, 황해지역 방어와 이양선의 출몰 등에 대비하여 조치를 강구하였다. 또한 고종의 울릉도 관방정책은 전국 관방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를 개척하고자 하는 그의 영토수호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 울릉도는 버려진 섬이 아니라 비웠던 섬이고, 주민을 이주하여 단계적으로 울릉도를 개척하였고, 군청을 설치하는 등 고종의 정책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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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Located in a rear garden of Changdeok Palace, Yeonkyeong-Dang is valued as the most characteristic building of the houses of aristocrats of the later Joseon Dynasty. The time of the construction has been much debated, however, it is perceived through this research that the construction was completed in September 1827(the 27nd year of king Sunjo's reign). The shape of the buildings during this period resembles a letter ㄷ as shown in the picture of Dong-Kweol. We previously described that the purpose of Yeonkyeong-Dang was to carry the portrait of king Yikjong while keeping the shape of building when it was first established until the 8th year of king Heonjong (1842). In 1865 (the 2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it was reconstructed with very different outlook which has remained the present shape. The characteristic features of the residences of aristocrats were reflected in newly reconstructed Yeonkyeong-Dang. The structure was largely divided into two quarters that occupied by male and female residents respectively. The two quarters were bordered by fences and added with a study and a pavilion. The reconstruction was conducted by king Gojong's father, Daewon- Goon and its purpose was to prepare a separate house for the king and queen before the kings wedding that was about to come. During the 19th century, building an imitation of houses of aristocrats became quite a trend in the palace. Built in 1847, Nakseon-Jae was precedented and followed by Yeonkyeong-Dang. Also later Geoncheong Palace was built in Kyeongbok Palace in 1873. All of the three buildings imitated houses of aristocrats. Divided residences of male and female sections and splendid decorations were common features. Nakseon-Jae was the smallest in the structure of spaces, ornamentation of details and its sizes, Yeonkyeong-Dang was the second and Geoncheong Palace was the most distinguished building. The constructions of these three buildings created an innovative architectural wave in the 19th century palace. Yeonkyeong-Dang was the building that mediated the new flow of architectural structure in the 19th century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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