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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韓範錫(1672~1743)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서 본관은 청주, 자는 성뢰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영세이다. 1695년 別試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서 일생에 걸쳐 많은 업적을 쌓았다. 심양 요동 사이에서 해적이 출몰하여 노략질을 하자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 한범석을 선발하여 청나라로 파견하였다. 또한 다음 해에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오게 되면서 여러 나라를 두루 경험하게 되었다.1728년 ‘이인좌의 난’ 때 北漢別將이었던 그는 안성군수에 제수되어 안성에서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당시 안성군수였던 이광적이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 공석을 채우는 것이었으나 전국적 규모의 반란이 기획되었다는 것이 조정에 보고된 직후였기 때문에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신임할 수 있는 신하를 보내야 했다. 또한 안성지역은 반란군이 발생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청주성에서 한양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이곳까지 진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안성으로 관리를 파견할 때에는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을 만한 무인이어야 했다. 그는 이 공로로서 양무원종공신 2등에 참록되었다. 북방경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니 국경지역에서의 국방태세 정비 등 무신으로서의 기질을 발휘하였다. 北兵使로서 군비를 갖추고 훈련을 시행하기 위한 노력 등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길주목사 정양빈의 비리를 적발하는 등 강직함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특히, 운두산성 수성방략을 모색하여 북방 경비의 전략적 방안을 마련하여 폐허가 되었던 운두성이 한 동안 북방 최전선의 거점 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범석은 이를 위해 여러 차례 왕과의 대담을 통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그는 지방수령으로서 흉년이 들면 기민을 구휼하고 병자를 치료하는 등 민생을 돌보았던 그의 행적을 보면 목민관으로서 자애로움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함경병사, 경상우병사, 황해병사, 경기수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진양지등 여러 지방지에 이름이 올라있어 진주지역의 유력인사로 알려져 있다.
        2.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10년 청나라에서 해적이 출현하자 황제는 해적을 소탕하고 餘賊이 있을 까 걱정하여 조선에 알린다.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謝恩使를 준비하여 謝恩兼三節年貢使로 정사 鄭載崙과 부사 朴權, 서장관 洪禹寧을 북경에 보낸다. 이들보다 앞서 10월 5일, 당시 39세 였던 한범석을 都摠府都事의 자격으로 북경에 보낸다. 한범석을 포함하여 1710년에 북경을 다녀온 조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남긴 기록은 현재 발견할 수 없다. 다만 한범석이 조정에 狀啓로 올린 「單使赴燕時」와 「到義州報狀」이 남아 있는데, 이 때문에 한범석이 북경을 다녀온 전후의 과정과 목적은 이들 장계와 「赴燕詩」,『조선왕조실록』같은 자료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당시 청나라는 강희가 황제로 있었을 때였다. 즉위 초부터 왕실의 반대파인 鰲拜를 제거하고 三藩의 난을 평정하였지만 중국 전역에는 여전히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浙江, 湖光 등에서는 苗賊이 해변에 출몰하였고, 陝西와 階州 지방에서는 라마교의 난리가 일어났으며, 甘肅省 서쪽에서는 喝爾靼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었다. 조선에 영향을 끼쳤던 해적은 金州에서 소탕되었다. 원래 이들은 남방에서 일어나 북상하면서 登州와 萊州 지역에 출몰하였고 이어 북쪽 요동반도의 旅順 부근에 있는 金州까지 세력을 뻐친다. 한범석은 이 전후의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고 있다. 특히 해적의 규모라든가 전술방법 같은 것도 소상하게 보고하고 있다. 이들 기록들은 주로 북경으로 가는 동안 鳳凰城에서 얻은 정보와 심양에서 들은 것, 해적의 피해를 입은 李重德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보고한 것도 있다. 북경에서는 정보입수가 어렵게 되자 청나라 하급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자료를 얻기도 한다.그런데 한범석과 일행들이 북경에 도착했지만 오히려 청나라 예부는 한범석과 일행을 의심했다. 선발대가 이렇게 사은사보다 먼저 온 것이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범석 일행은 예부관원들과 한 차례 갈등을 겪게 된다. 당시 황제는 도성에 있지 않고 薊州와 永平 등지에서 사냥을 하며 지역을 시찰하고 있었다. 한범석이 얻은 정보는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三藩의 난 이후에도 청나라에 크고 작은 규모의 전란이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한범석의 선발대는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고 당시 정세 파악에 주력하였으므로 그의 장계는 정치와 종교의 변화에 자세하다. 朱氏 후손을 세워 멸망한 명나라 왕조를 재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최고 산문 중의 하나인 열하일기의 「허생전」을 보면 북벌에 대한 삼대책을 허생이 이완장군에게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朱氏왕손을 세운다거나 자제들을 빈공과에 보내고 강남에 상인을 보내어 북벌을 도모한다는 내용이다. 「허생전」은 허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소재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한범석의 장계를 통하여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3.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후기 영남이 배출한 대표적 무장 한범석(韓範錫)의 교지류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검토한 것이다. 한범석은 남명학파의 핵심이자 학문의 전통이 깊었던 청주한씨 조은가문(釣隱家門)에서 태어났으나 무과로 발신하여 영조대에는 병사(兵使)에까지 오른 현달한 무장이었다. 그가 남긴 교지류는 무과합격증인 홍패(紅牌), 인사 발령 교지를 비롯하여 유서(諭書)·유지(有旨)·녹패(祿牌)·사급기(賜給記) 등 총 50점에 이른다. 인사 발령 교지의 경우, 현전하는 무신 관련 교지 중에서는 자료적 밀집성이 매우 높아 무신의 관직생활을 추적·복원할 수 있는 사료적 장점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유서는 내용상 ‘밀부유서(密符諭書)’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특정 관직의 경우 한범석의 유서가 유일한 것이 있어 고문서의 새로운 발굴과 집적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주목되었다. 특히 영조가 한범석에게 활과 화살 등 전투 장비를 하사한 사급기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희귀본으로 파악되는 바, 조선시대 고문서의 활용, 사급기(賜給記)의 형질(形質)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명되었다. 이 연구는 한범석이라는 특정 인물이 남긴 교지류를 분석했다는 점에서 사례 연구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런 연구가 축적될 때 고문서의 사료적 가치와 활용에 대한 이해도 더욱 신장될 것으로 생각한다.
        4.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범석은 1711년 군관의 신분으로 신묘사행에 참가하여, 부산에서 에도까지 일본 각지를 지나며 느낀 감회와 일본 문화에 대한 견해를 시종일관 객관적이고도 솔직한 어투로 기록하고 있다. 한범석의 사행록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논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없었던 신묘사행의 군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신묘사행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접근을 가능케 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한범석은 이문화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허락되지 않은 시대에 연행사와 통신사를 모두 수행한 인물이며, 그 중에서도 중국과 일본에 대한 기록을 모두 남긴 극히 드문 경우로 당시 조선인의 살아있는 동아시아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대상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1711년 신묘사행이라는 특정 시기에 관한 고찰을 토대로 조선 통신사와 사행록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을 되짚어 보고,『일본사신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한범석의 대일본 인식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5.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淸州韓氏는 高麗 중기 이후로 名公巨卿과 文人學者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는 혁혁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朝鮮朝에 들어와 더욱 번창하였고, 成宗 때 韓繼禧의 대에 이르러 번창함이 절정에 이르렀다.그 손자 韓承利가 晋州에 은거한 이후로는 中央官界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줄어 자연히 高官大爵으로의 진출은 어렵게 되고, 중앙의 名閥家와의 聯婚이 어렵게 되자, 결국 진주를 중심으로 한 地域士族階級으로 변화하였다. 또 진주의 지역사족으로 변화한 이후로는 주로 武科를 통한 仕宦으로 家聲을 지속해 나갔다. 그런 인물 가운데 조선 肅宗 英祖 때 활약한 兵使 韓範錫과 그의 후손들이 대표적이다.그러나 韓範錫 家門의 무과 출신들은 단순히 武藝만 아는 무인이 아니고, 儒學的 素養을 겸비한 무인으로서 문무를 겸전했고, 江右地域의 儒所에도 참여하는 가문이 되었다.특히 韓範錫의 후손 가운데는 11명의 武科出身과 14명의 仕宦者, 3명의 문집 저자를 배출함으로써 강우지역의 명가의 위상을 유지해 나갔다. 한범석은 무과를 통해서 사환하여 50년 동안 仕籍에 있으면서 英祖의 특별한 知遇를 입어 6도 병사, 7개 고을원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특히 국가 민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들을 어루만지는 使命感이 투철하였다. 兵使 등 軍職을 맡아서는 성을 쌓고 무기를 정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고을원을 맡아서는 백성들의 고통상을 이해하고 이를 제거하고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흉년에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그는 무예에 정통한 무인이면서 아울러 모범적인 牧民官이었다.또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中國과 日本의 使行에 참여하였고, 그 사행의 활동상과 노정을 狀啓와 日記로 남겼다는 것이 다른 무인에게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일이다. 한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일본에 간 경우도 극히 드물어 그 일기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두 나라의 문화에 대한 감각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그는 전일에 많은 治績을 쌓은 高官이라 하여 鄕村에서 武斷을 일삼는 일은 전혀 없었고, 鄕村의 父老들과 동등한 친구로서 어울려 담소하는 소박한 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이런 지극히 평등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