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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俛宇 郭鍾錫(1846-1919)의 󰡔大學󰡕 해석 중 특히 ‘明德’에 대한 해석 및 그와 관련해 다른 사람과 논쟁한 것을 중심으로 그 설의 특징과 의미를 논한 것이다. ‘明德’에 대해, 기호학파 洛論은 本然之氣로 보고, 湖論은 心의 光明處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모두 心卽氣의 입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 면 嶺南學派는 朱子가 心統性情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하여 心合理氣의 관점에 서 理를 위주로 해석하였다. 19세기 퇴계학파의 정맥을 이은 柳致明은 명덕을 氣淸理徹이라 하였는데, 그 의 문인 朴致馥은 ‘주자 이래 相傳한 嫡訣이라’ 하였다. 유치명의 견해는 명덕을 心合理氣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李震相의 心卽理를 위주로 하는 학자 들은 氣를 겸하여 논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郭鍾錫의 설도 마찬가 지이다. 그런데 곽종석은 󰡔대학󰡕 삼강령․팔조목의 논의구조에 나아가 明德과 心을 엄 격히 다른 것으로 변별함으로써 하늘에서 얻은 心之本體를 가리킬 뿐만 아니 라, 行事를 통해 얻어지는 孝忠恭重 등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점이 스승 이진상의 설 및 동문들의 설과 변별되는 가장 특징적인 점으로, 동문 들과 논쟁한 핵심 사안이었다. 그는 명덕을 선험적인 본원은 물론 후천적인 경 험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丁若鏞이 후천적 경험만을 중시한 것과도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갖는다. 대체로 19세기 主理論者들이 主宰性을 강조하기 위해 본체․본원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곽종석은 행사를 얻어지는 實得을 모두 명덕에 포함시키고 있어 主宰性과 아울러 實用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자들과 변별되는 점이 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체용론은 본체에 치중하지 않고 該體用의 논리를 갖고 있 다 하겠다.
        2.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조선 말기 경상우도의 유학을 대표하는 재야학자 后山許愈(1833-1904) 의 한시에 대한 연구다. 朱子와 退溪의 학문을 잇는 데 평생을 진력한 학자였으므 로, 詩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허유는 문장 공부 에 주력하였고, 특히 韓愈의 글을 좋아하였다. ‘愈’라는 이름 자체를 한유에서 가 져 왔거니와 退而역시 한유의 자 退之에서 한 글자를 바꾼 것이다. 별호 南藜子 는 한유의 호 蒼藜에서 가져온 것인데, 남쪽 땅의 한유라는 뜻이다. 그러나 허유는 서른 살 무렵 文學을 멀리하고 儒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李 震相을 스승으로 삼아 主理說을 배우고 깨우쳐 李震相학문의 핵심인 太極과 動 靜, 人心의 主資, 人物의 性凡, 華夷와 王伯의 구분 등을 탐구하였다. 이것이 朱 子와 退溪의 전해지지 않는 학문의 비결이 이에 있다고 여겨 평생 이를 계승하고 자 하였다. 철저하게 理를 중시한 허유에게 문학이 중요하지 않거니와 문학을 하 더라도 역시 理를 主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허 유는 문학 자체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李白, 杜甫, 蘇軾등의 시도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小學과 大學이나 열심히 읽어라 한 것이다. 다만 한시는 당시 사족들에게 생활의 일부였기 때문에 배우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학생들이 여름철을 이용하여 일부의 시를 읽는 것은 무 방하다고 하였다. 李白의 古風五十九首와 杜甫의 北征을 긍정하고 특히 韓 愈의 南山과 朱子의 齋居感興은 필독해야 할 시라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허유는 한시를 강학의 수단으로 여겼다. 朱子의 시를 즐겨 읽었지만, 주자의 시를 시로 본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주자의 뜻을 파악하려 한 것이니, 허유에게 있어 시학은 心學의 일부였다. 허유는 鄭逑등 東方先賢의 시 역시 강학의 도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논리에서 허유는 벗들이나 후학들에게 시 를 통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히고 또 강학을 권려하였다. 허유는 강학의 여 가에 산수 유람을 즐겼고 그 흥을 청신하고 담박하게 발산하였는데, 그 전범을 陶 淵明에서 찾았다. 그러나 문학보다 학문을 우선한 허유이기에, 시를 강학의 도구로 생각하였던 것처럼 山水역시 수양의 자료나 理를 확인할 수 있는 매체로 삼았다. 허유는 19세기 내우외환의 복잡다단한 시대를 살아간 산림의 학자다. 세상이 복 잡하기에 오히려 心卽理라는 하나의 원리만을 고집하였다. 허유가 이 땅을 떠난 지 이제 100년이 되었다. 세상은 그 때보다 더욱 복잡하다. 복잡할수록 하나의 원 리만을 주장한 허유의 고지식이 오히려 현대 학자에게 경종이 될 수 있다.
        3.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한말의 위기 상황에서 경상우도의 사림집단이 어떻게 그들의 사상을 定位를 확보해 나아갔는가를 후산 허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后山을 포함한 寒洲學派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한주학파 는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퇴계와 남명의 사상적인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정신 을 이끌어 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지식인 집단이다. 후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사상과 퇴계사상을 그의 고유한 심즉리설을 통하여 통합해 보 고자 하였다. 그의 신명사도혹문 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의 신명사도를 주리론적 형식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아 세계에 대한 심의 主宰的권능을 확인하 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퇴계의 理發說을 더욱 밀고 나가 分殊속에서 작동하 는 기의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이미 상당 부분 양명학 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회정치적 함의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