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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그동안 여러 선행연구의 성과를 통하여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시키기 이전, 일본의 지도와 역사지리교육에서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시대적인 특성상, 위와 같은 관점의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기에 따라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속성 하에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법제적으로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영토화했다고 해도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인식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울릉도와 독도 관련의 일본어 자료 속에 독도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 자료는 2017년에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김남훈 독도 관련 기증자료 중,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역사지리부도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저술된 울릉도와 독도 관련 연구논문, 시마네 현 마쓰에 시 죽도연구소에서 필자가 직접 수집한 「죽도편입에 관하여」라는 문서군을 주목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바 가즈모리(芝葛盛) 의 『일본역사지도』(1922)에는 죽도(=독도)를 조선의 것으로 적어,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독도를 인지했음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地名의 巨人’으로 불린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대일본지명사서』의 영향이 컸으며, 요시다 도고가 펴낸 『신편 일본독사지도』에 소개된 「한국병합 전후 일본영역도」 의 인식과도 일치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나아가 시바 가즈모리의 관점은 연구 동료인 후지타 아키라(藤田明)의 저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런 점에서 시바 가즈모리의 『일본역사지도』 의 독도 관련 기술이 시바 가즈모리의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하는 사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의 저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등의 연구에서는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에 비정함으로써 자연히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히바타 셋코(樋畑雪湖)는 직접적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 라고 단정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울릉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뚜렷이 보인다고 증언한 점, 독도가 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 현에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은 량코도로, 조선인은 獨島라고 했다는 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정 지역의 소속과 명칭을 바꾸어도 일상생활 속에서 체감하는 공간 인식은 이전의 방식 과 습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23년 발간된『島根縣誌』나 1945년 일본 마쓰에 재무부 국유지대장에 ‘獨島’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의 독도의 존재감이 일본 측에도 인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정작 독도를 영토 편제한 시마네 현에서는 1926년에 행정구역 개정으로 오키 도사가 폐지되고 오키지청이 수립된 후 독도 관련 행정 조치도 취해야 했지만 1953년까지 방치한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현재 일본 측에서는 은폐하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독도에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한국병합조약에 의해 ‘영원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인식되었기에, 일본 측은 굳이 독도를 따로 떼어 내어 일본의 영토로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도는 그 행정적인 소속 관계와 상관없이 지리적인 특성에 의해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펴낸 저술에도 표출되었으며, 일본 측 공식 자료에도 ‘獨島’라는 명칭이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2.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를 비롯한 일본인 4명은 1905년 6월 3일 ‘죽도어렵해려 합자회사’(竹島漁獵海驢合資會社) 정관을 작성하였다. 그런데 나카이는 회사에 참여한 사원 중 자본금 등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독도 어업 활동이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에 참여한 사원들을 비난하면서 독도 어업의 실패가 자신이 아닌 동료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카이는 오사카와 홋카이도로 강치 판매의 활로까지 준비하였다. 나카이(中井養三郞)는 창업 이후 회사의 이익이 희생당했다고 주장하였다. 나카이는 정박 관련 시설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선착장 건설이 최대의 급선무라고 파악하였다. 그는 물의 채취 방안에 고민하였다. 그는 강치 포획을 위해서 섬의 한복판을 뚫을 계획까지 만들어서, 강치어업을 위해서 독도의 자연을 심하게 훼손할 계획을 세웠다. 나카이는 ‘죽 도’의 이익 원천을 영구히 보전하려 한다면 반드시 강치의 포획 및 수산물 채취를 절제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독도 어업권의 독점을 추구하였다. 1906년 6월 죽도경영에 관한 진정서와 계획서를 제출한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 등은 ‘죽도어업조합’(竹島漁業組合)을 창립하였다. 그 후 나카이는 1907년 오키도청을 통해서 사할린의 강치(海馬)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강치의 홋카이도 판로를 확보하는 한편 사할린의 강치(海馬) 포획을 준비할 수 있었다. 나카이(中井養三郞)는 독도에 거주하지 않았고, 어업 활동을 한정된 시기만 전개하였다. 나카이의 ‘죽도어업조합’은 독도에 거주와 주소지가 없기 때문에 일본의 어업조합규칙을 위반하였다.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는 시마네현의 특혜에 따른 나카이의 독점적 영업활동이 진행 되면서 함께 참여한 조합원의 반발과 탈퇴라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더구나 나카이는 강치의 번식과 보호를 위해서 노력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나카이는 경제적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강치를 남획하였다. 나카이는 독도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일본 어업법까지 어겨가 면서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와 ‘죽도어업조합’을 조직하였고, 만 마리 이상이 생존했던 독도의 강치를 불법적으로 남획하여 독도의 생태환경까지 파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