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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수토제도는 안용복사건으로 1694년 시작되어 1894년 12월 종료될 때까지 201년간 조선 중앙정부의 깊은 관심 속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왔다. 본 논문은 수토의 주기성을 파악하기 위해 사료, 수토기, 각석문, 울릉도도형, 대 풍헌자료, 문집 등을 검토하여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울릉도 수토가 이루어진 해와 횟수를 파악해 보았다. 숙종 때는 7회(1차~7차)의 울릉도 수토가 있었고, 1697~8년, 1708~10년, 1717~8년 등 7회의 수토정지가 있었으며, 삼척영장의 수토까지 3년 1차 윤회수 토가 이루어졌다. 경종 때는 한 차례의 수토(8차)가 있었다. 영조 때는 1745년 월 송만호 박후기의 수토(14차)까지는 3년 1차 윤회수토가 시행되었고, 1747년 삼척 영장의 수토부터는 2년 1차 윤회수토가 시행되었다. 영조 1년부터 21년까지 3년 1차 윤회수토 6회(9차~14차), 수토정지 5회가 있었고, 영조 23년부터 50년까지는 2년 1차 윤회수토 14회(15차~27차), 수토정지 3회가 있었다. 숙종 20년부터 영조 50년까지 27차에 걸쳐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울릉도 수토제도의 운영은 1,500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를 생활 공간으로 살아온 우리나라 연안주민들의 생활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울릉도 수토제도는 독도에 우리나라의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 영유권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201년간 수토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정조 즉위년부터 고종 31년(1894년)까지의 분석이 더 필요하다.
        9,000원
        2.
        201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research work is to analyz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Sungnyemun especially in King Yeongjo's reign in Joseon dynasty. The result of this research is summarized as following: 1.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Sungnyemun in King Yeongjo's reign are closely related with Confucian ceremonies such as Jeon-jwa and Heon-goek-rye. To perform these ceremonies, some lower walls of Sungnyemun's wooden pavilion were removed and used as ceremonial space. And after ceremony it was restored. 2. The floor type of center bay of the 1st story of wooden pavilion should have a type of floor using long and narrow fine tree plate, which is same type before the repair work of 1960's dismantlement. 3. The width of east stairway which is reached to east small gate, was changed just before Japanese's rule(1910~1945), should be broaden than present width, which is proven through the recent excavation. 4. The reason of asymmetric characteristic of locations of both east and west narrow-gate, and widths of east and west stairway, are related with order of King's ceremony.
        4,000원
        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시대 국왕 태실을 개보수하는 공역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영조조에 있었던 세종과 단종 두 태실의 수개 역사를 사례로 하여 고찰한 글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국왕 태실에 어떤 결함이 발견되면 태실 소재지의 수령이 이를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즉시로 태실 현장을 찾아 奉審한 뒤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렇게해서 관찰사의 보고가 중앙 에 이르면 禮曹에서는 관찰사의 봉심 내용을 중심으로 修改 여부에 대한 의견을 붙여 국왕에게 啓聞함으로써 태실 수개 여부가 결정된다. 태실의 수개가 결정되면 공역에 적당한 일자를 택정하고, 예정된 태 실 수개 일정에 맞추어 本道와 중앙의 해당 관사에서 준비해야 할 인력 과 잡다한 물품, 제반 준비 사항을 확정하여, 이를 본도 및 해당 관사에 미리 알려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 그러나 일정과 계획이 정해진 경우라고 하더라도 국휼이나 흉년 등으로 인해 날짜를 연기하는 일이 흔히 발생하는데, 본 세종. 단종 태실의 개수 공사도 국휼로 인해 한 차례 연기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앙으로부터 태실 수개에 필요한 준비 인력과 物目이 정해져 공문 으로 하달되면 본도에서는 관찰사가 이들 물목과 인력을 고을 별로 분정하였다. 물력과 인력의 분담 정도는 태실이 소재한 고을의 부담이 비교적 많은 편이나 인근의 대읍이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것으로 나타 난다. 특정한 물품의 경우 멀리 떨어진 고을에 까지 부담케 하는 경우가 보이나, 대체로 태실이 소재한 고을과의 거리나 고을 사정 등을 감안해 서 필요한 물품과 인력을 여러 고을에 두루 부담시키는 것으로 나타난 다. 역사는 중앙에서 감역관이 내려온 뒤 개시된다. 감역관은 공사 개시 일을 며칠 여 남기고 현지에 도착하여 개수할 태실의 석물 등을 살핀 뒤 이를 사안에 따라 소속 관서 와 예조, 및 본도 관찰사에 보고한다. 뒤이어 예정된 개수 공사 날짜가 임박하면 중앙에서 繕工監 提調와 觀象監 提調가 내려와 태실 공사 현장을 봉심하고, 수개 공사 당일의 행사와 공사 일체를 참관한 뒤 자신이 봉심하고 참관한 바를 중앙에 보고한다. 공역은 ‘告事由祭’와 ‘告后土祭’를 행한 뒤에 개시되며, 공역 을 마친 뒤에는 ‘謝后土祭‘를 행하는 것으로 행사가 완료된다. 본 건의 경우 왕실의 아기 태실을 처음 조성하거나 즉위한 국왕의 태실에 돌 欄干을 조성한 경우가 아닌데도 두 태실의 금표 구역을 정하 고 태실을 수호할 守直을 정하는 문제가 신중하게 논의되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왕 태실의 관리 및 수호와 관련된 규정이 제대 로 지켜지지 않아 태실이 소홀히 방치되고 있었던 현황을 알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