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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케네스 스콧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와 그 의 박사과정 제자인 찰스 데이비스 스톡스(Charles Davis Stokes, 1915-1998) 의 간추린 생애와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가장 먼 저 필자는 역사적 인물들인 이 두 사람들의 생애를 간략히 다루었다. 학생 해외선교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을 받은 라투레트는 중국선교사, 선교역사가, 그리고 세계교회연합주 의자(ecumenist)의 삶을 살았다. 스톡스는 한국선교사였던 아버지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농촌계몽운동과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교) 의 설립자와 교육가로 활동했다. 라투레트의 역사서술 방법론은 크게 “한계인정, 초월성, 상호작용” 이렇 게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객관적 역사서술을 지향하는 라투레 트는 객관적인 역사연구를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 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지역, 교파, 그리고 교회를 초월하고 자 시도했다. 즉 유럽중심적, 특정 교파중심적, 교리중심적 교회사의 한계 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 동방정교회, 개신교회 를 포함하고 북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들을 포괄하는 기독교역사 서술을 의도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역사는 그리스도 복음의 확 장과 영향을 다룸으로써 교회중심적 역사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라투 레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톡스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라투레트의 이러한 세 가지 역사서술 방법론들 중에서 적어도 한계인정과 상호작용이라는 두 가지 특징은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지도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스톡스도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역사적 객관성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연구를 시작한다. 게다가 스톡스는 기독교 선 교에 있어서 복음 전파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강조한 라투레트 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톡스의 유일한 역사 연구서인 자 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1885년부터 1930년까지 진행된 미국감리교회의 한 국지역 선교에 한정되기 때문에, 스톡스가 라투레트의 초월성에 관해 영향 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2.
        2015.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초기 일본의 그리스도교사 연구는 비기독교인 학자들이 주도했을 만큼, 그 연구 주제가 서구 모방과 일본 근대화를 위한 요체로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서양 제국의 팽창에 기여한 선교사들의 헌신은 본받아야 할 하나의 개척 정신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서구 기독교의 팽창 과정’이 곧 인류사라고 전제한,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의 이른바 ‘선교사관’도, 제국주의를 지향한 근대 일본의 특수성 속에서 편의적으로 수용되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사 통사서에 라투레트가 처음 등장하는 시점도 만주사변(1931) 직후 중국 이해가 요구되면서 부터이고, 그의 저서들도 관변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일전쟁 이후부터 그 번역이 본격화되었다. 즉 라투레트의 연구 성과는 대륙 및 해양 진출과 맞물린 일본의 국가적 이익과 관련되어 소개된 것이다. 라투레트는 극동에서 확장되어 가는 일본제국의 패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라투레트의 ‘강자 중심’ 역사관은 전시 하에서 활동한 제자 백낙준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론(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서구 제국 중심, 선교사 중심의 교회사관이 지닌 근본적 한계로 인한 결말이기도 하다. 전후에 라투레트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ICU)의 이사장으로 부임한 뒤 일본 기독교계에 새롭게 소개된다. 대륙 침략에 활용된 ‘동양사학자’가 아닌, ‘그리스도교사학자’로서의 재평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서구 선교사 중심 사관은 비판에 직면하여, 동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수용자들의 입장, 즉 ‘토착화’ 관점을 통한 극복 시도가 이루어졌다. 한국 교회사학계에서도 ‘민족교회사관’, ‘민중교회사관’, ‘토착교회사관’, ‘실증주의 사관’ 등의 등장으로 인해 라투레트의 사관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라투레트를 수단화하여 수용했던 과거의 착오를 반성하며 극복하려던 전후 일본에서의 신학 및 역사적 시도는,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로 식민지 시대를 공유한 한일 그리스도교 사학계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의 라투레트 수용 과정은, 한국교회사 및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사 연구의 현재를 입체적으로 진단하고 미래의 연구과제를 전망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준다.
        3.
        2015.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라투레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교회사가 중 하나였다. 논저의 양적면에서는 150여권의 저서를 출간하여 누구의 추적도 불허했다.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선교가 중시되던 시기에 태어나고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그 영향으로 중국선교사가 되었다. 건강 때문에 선교사역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치료 후 그는 학문의 세계에 들어갔다. 그의 학문적인 관심도 선교역사였다. 선교적인 염두에서 중국 일본등지의 역사 연구서를 펴내고 사학과에서는 동양사 교수로 자리 잡았다. 종교학과에서도 기독교를 선교사적 관점에서 교수했다. 신학교에서는 기독교확장사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확장되어 왔다는 견해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기독교확장사』 7권과 『혁명시대의 기독교』 5권은 그의 대표적 저서이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저서로 『기독교회사』와 『중국기독교선교사』 등이 있다. 이러한 저서들을 통해서 그는 기독교역사는 계속 확장되어 왔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백낙준과 라투레트는 예일 대학교에서 사제 관계였다. 라투레트가 백낙준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였다. 백낙준은 라투레트의 교회사 방법론을 따랐다.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고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서 스스로 밝혔다. 라투레트 페이퍼가 예일 신학대학원에 수집되어 있음으로 이를 활용할 것과 백낙준의 글들도 더 수집하여야 할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연구를 위해서이다.
        4.
        2015.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유명한 예일대 역사가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는 기독교의 전 역사를 ‘확장’(expansion)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며, 특히 ‘예수의 영향력 확장’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역사관으로 설정하고 이 사상을 일평생 유지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사상은 언제 그의 역사관과 선교관으로 확정했을까? 일반적으로 1937년 이래 수년에 걸쳐 출판된 『기독교확장사』(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7-45)가 그의 이런 역사관이 구체화되는 시기라고 주장되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라투레트에게 이런 역사관이 없었을까? 1937년 이후 확고히 정립되는 ‘예수의 영향력 확장’으로서의 기독교 역사라는 표현 자체는 1929년에 출판된 첫 기독교 역사 관련 저작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라투레트가 이 책에서 기독교 선교사를 중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서구의 대리자로 묘사할 때, 독자는 그가 1937년 이후 저술에서 등장하는 ‘예수의 영향력 확장’으로서의 기독교 선교역사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인식을 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중국에 끼친 서구의 영향력’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명제는 사실상 ‘서구’를 ‘기독교’로, 또 ‘기독교’를 ‘예수’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즉, 1937년 『기독교확장사』 이후에 구체화되는 명제가 이미 1929년 저작에서 배아의 형태로 표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기독교선교역사』는 단순히 ‘명제’에서만 1937년 이후 작품들의 선구적 배아가 아니었다. 공정하고 편파적이지 않기 위해 기독교역사 해석은 반드시 여러 교파를 통합과 비교의 방식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에큐메니컬적 역사기술, 또한 예수의 영향력은 교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교회사’가 아니라, 반드시 교회 바깥의 모든 영역을 포괄적으로 기술하는 ‘기독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 기독교 신앙이 선교를 통해 퍼져나갈 때, 이는 마치 파도의 고저, 밀물과 썰물의 반복되는 양상처럼 진보와 후퇴를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전진한다는 믿음 등, 1937년 이후 작품에서 구체화된 라투레트의 모든 역사기술 방법론과 관점은 사실상 1929년의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도 흔적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선교사와 선교활동의 공헌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고, 결국에는 기독교의 확장으로 역사가 진보할 것이고 윤리가 개선될 것이라 믿는 이상적이고 순진하고 낙관주의적인 승리주의 역사관이라고 라투레트의 후기 저작을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이미 1929년에 출판된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확장사』(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7-45), 『아노 도미니: 예수, 역사, 하나님』(Anno Domini: Jesus, History, and God, 1940)과 『꺼지지 않는 빛』(The Unquenchable Light, 1941), 『기독교사』(A History of Christianity, 1953), 『혁명시대의 기독교』(Christianity in a Revolutionary Age, 1958-62), 『기독교의 역사』(Christianity through the Ages, 1965) 같은 라투레트의 후기 대작은 모두 『중국기독교선교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