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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