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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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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메이지시기 오카무라가 집필한 『新撰地誌』⋅『明治地誌』 등은 문부성의 검정을 받아 널리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소학교 지리교과서로 손꼽힌다. 그는 일본영토의 확장과정에 관심을 갖고 지리교과서에 일본영토의 경계와 범주를 정확히 서술하거나 그려놓았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오카무라가 지리교과서에서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분석하였다. 오카무라의 일본영토⋅오키 인식은 난마의 『小學地誌』를 저본으로 『小學地誌字引』을 집필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문부성 발행의 『小學地誌􋺸에는 독도가 거론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난마가 『內地誌略』에서 竹島⋅松島를 소개하면서도, 오키의 관할범위를 북위 약 35도 50분여∼36도 30분으로 명기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울릉도⋅독도를 일본영 토로 간주하지 않은 난마의 인식은 오카무라에게 수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카무라는 『新撰地誌』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를 알면서도 두 섬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였다. 조선과 중국 등 주변국이 표시된 「日本總圖」에는 일본영토가 채색된 반면 울릉도와 독도로 여겨지는 두 섬은 채색되지 않은 채 해양 영역을 표시한 듯한 빗금이 조선 영역으로 그어져 있다. 일본의 강역을 표시한 「日本全圖」에는 두 섬이 그려지지 않고, 「山陰山陽及南海道之圖」에는 오키까지 표시되었으며, 「亞細亞」에 그어진 일본의 국경선 에는 오키가 포함된 반면 독도가 분명하게 제외되었다. 이러한 「亞細亞」의 일본 국경선 표시는 현재까지 알려진 ‘문부성검정제’를 받은 지리교과서들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것으 로 판단된다.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오카무라의 인식은 『新撰地誌􋺸 이후에 집필된 『小學校用地誌』⋅ 『尋常科用日本地理』⋅『明治地誌』⋅『高等小學新地理』⋅『日本地理新問答』에도 견지되 었다. 이들 지리교과서의 일본⋅산인도 위치에는 일본 국경의 극단에 있는 섬들과 오키만 열거되었을 뿐 독도는 서술되지 않았다. 일본의 모든 영토가 표시된 「大日本全圖」⋅「府縣 明細圖」⋅「大日本帝國全圖」⋅「日本國全圖」등에는 독도가 빠졌고, 조선 등 주변국의 위치가 표시된 「日本諸島及隣國之地圖」⋅日本全形圖」등에도 일본영토가 채색된 반면 동해 안쪽의 두 섬은 채색되지 않거나 그려있지 않다. 「山陰道及山陽道地圖」등에는 오키까지만 그려져 있다. 『新撰地誌』⋅『明治地誌』 등은 공식적으로 검정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지리교과서로 손꼽힌다. 따라서 독도를 조선영토로 간주해 일본영토에서 제외한 오카무라의 지리교과서는 문부성을 비롯한 일본정부의 차원에서도 독도를 일본영토가 아니라 조선 영토로 인정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메이지 후기에 발행된 대표적 지리지에 독도와 관련하여 어떤 기술이 이루어지 고 있는지 그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분석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1890년 전후 일본의 지리 인식의 특징을 검토하여 지리 지 발간의 시대적 배경을 검토한다. 이를 바탕으로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의 『大日本地名辭書󰡕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도의 시마네 현 강제편입 후에 발간된 향토지로서 오쿠하라 헤키운(奧原碧雲)의 두 저술인 『竹島及鬱陵島』와 『隱岐島誌』를 비교 검토하여 독도 관련 기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메이지정부는 1870년대 초부터 근대적인 행정체제 정비 및 국토 개발, 군사적 목적 하에 자국의 영토와 영해를 파악하기 위한 근대적 측량 사업을 시행하고 이를 토대로 국책사업으 로 지도 제작과 지리지 편찬을 진행해 왔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 본토에 서 멀리 떨어진 도서에 대한 영토편입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 가운데 동해의 울릉도에 대한 개척 논의가 일어난 적도 있으며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울릉도에 도항하여 벌목과 어로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가 이의 제기를 하여 일본은 1883년, 울릉도 재주 일본인 강제송환 및 도항금지 조치를 발령했다. 이 조치 이후에 간행된 일본의 지리지에는 이 금지령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즉, 문부성에서 지리교과서 편찬을 담당한 적 있는 오쓰키 슈지의 󰡔개정일본지지략󰡕, 일본 의 지질조사소를 이끈 하라다 도요키치의 「일본군도(日本群島)」, 요시다 도고의 󰡔대일본지 명사서󰡕에는 이 조치로 인해 울릉도가 조선에 귀속한다는 것이 한일양국에 결정되었음을 언급하였다. 한편 요시다 도고의 󰡔大日本地名辭書󰡕(1900)의 「오키」 부분에는 한일양국의 지리지를 구사하면서 일본에서 말하는 송도는 삼봉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자료는 메이 지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로 평가받고 있을 뿐 아니라 한일양국에서 아직 언급되지 않는 자료이다. 더욱 1905년 독도의 강제편입 이전에 간행된 지리지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 1905년 일본영토에 강제로 독도를 편입한 다음에 저술된 오쿠하라 헤키운의 󰡔다케시마 및 울릉도󰡕와 󰡔은기도지󰡕를 비교해보면 일본의 독도 편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료 에 대한 자의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1915년에 저술이 완료된 󰡔은기도지󰡕에는 그것이 심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이제까지 선행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메이지 시대 문헌들을 중심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 본 것이다. 독도의 일본에 대한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분리하여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였으나 독도는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근대국가형 성기에 과연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본 논문은 메이지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은 전 통시대와 마찬가지로 울릉도를 중시하였을 뿐으로, 울릉도개척논의는 존재했으나 독도를 단독으로 주시한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당시 메이지 지식인의 언설에서 볼 때 울릉도와 독도를 동해상에 위치한 두 섬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따로 떼어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점, 메이지 시대 이전과 이후의 지도자료를 통해 볼 때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일본의 영토로 간주한 지도도 있지만 이 두 섬을 조선의 영토로 간주한 지도, 혹은 아예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되지 않은 지도가 존재했으며 메이지 시대 지도에도 독도를 일본의 영토권 내로 표시한 지도는 없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배타적 영토관념이 희박했던 시대에 독도에 대한 관심이 불명료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즉,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영토편제하기 이전인 19세기 후반기에 일볹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한 흔적은 없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