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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산천재는 남명학이 완성된 곳이자 제자들과 강학한 본산이다. 산해정이나 뇌룡정과는 달리 산천재는 남명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곳에 지은 건물이다. 남명은 그 터를 잡기 위해 11번 이상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답사하고서 결국 『주역』 「대축괘」의 뜻을 취하여 자리를 잡았으며, 동시에 지리산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를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남명의 주요 제자들은 대부분 산천재에서 배웠으며, 그 교육의 효과는 후일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많은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궐기하여 구국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산천재는 남명 사후 2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1592년 소실되었고, 225년 후인 1818년에 복원되었다. 산천재의 중건은 정조 때부터 있었던 남명 선양 사업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본다면 제2차 남명 선양사업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 당시에 있었던 서원의 사액 및 영의정 추증 그리고 문묘종사운동이 제1차 선양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산천재가 폐허로 남아 있던 시기 그곳을 지나간 인물들이 남긴 기록에서 우리는 경의검에 대한 새로운 정보 및 사성현유상과 남명 고택에 대한 정보도 접할 수 있었다.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18년 복원한 산천재에서 약 반세기 후 1871년 덕천서원이 훼철되고 몇 년 뒤 곧 사성현유상을 모시고 남명을 배향하면서 채례를 계속 이어 나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용암서원이 훼철되고 1883년 무렵에 진행된 뇌룡정 중건과도 일맥상통 한다. 본고에서 살펴본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남명학의 계승과 선양사업이 시기별로 몇몇 열성 인사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에는 또한 늘 본손들 중에서도 정성을 기우리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남명학파는 비록 그 세력은 미약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산천재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