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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유입하여 표기 문자로 사용하였지만, 중국과 달리 표기문자와 음성 언어를 달리하는 이원적 구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자가 표기문자의 대표적 수단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 은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을 어떠한 우리말로 대체시킬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소중화의식의 확장․고증학의 발달 등의 영 향으로 철학적 담론이나 경세적 주제 외에도, 자학․물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 다. 그 과정에 물명을 우리말로 풀이한 다양한 저서 『物譜』․『才物譜』 등이 출현 하였다. 그런데 과연 18세기 조선사회에서 통행되고 있던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이 과연 우리말과 일치했던 것일까? 아울러 당시 통용되었던 물명류의 저작이 과연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오류를 시정한 다음 저술된 것일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본고는 이점에 유의하여 李家煥(1742~1801, 자 廷藻, 호 貞軒․錦帶)을 주목 하고자 한다. 이가환은 茶山 丁若鏞(1762~1836)과 함께 18세기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하지만 1801년 辛酉邪獄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했던 비운의 인물이 기도 하다. 그는 문학이나 천문․수학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正祖(1752~ 1800)에게 깊은 신뢰를 받았다. 이 외에도 그는 한자교육과도 관련 있는 자학이나 물명에도 관심이 깊었다. 이에 필자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가환의 저작 『貞軒瑣錄』과 「雜說」을 중심으로, 李家煥의 物名에 관한 관심과 그 실천적 면모를 살펴 보고자 하였다. 『정헌쇄록』은 일본 동양문고 『東稗洛誦 續』에 전하고 있고, 「잡설」 은 국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詩文艸』에 수록된 것으로 두 저작은 상호 관련 된 작품이다. 『貞軒瑣錄』과 「雜說」은 물명류의 저서 형태를 띤 것도 아니고 물명 을 우리말로 직접 풀이한 것도 아니다. 『정헌쇄록』은 이가환의 독서 잡기류로, 그 안에는 의복․음식․제도․가옥에 관한 기록 외에도 우리말과 물명의 어원을 고증 한 부분이 있다. 이에 반해 「잡설」은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 등에 대한 정확한 재해석과 오류 시정이 핵심을 이룬다. 곧 이가환은 이 두 저작에서 물명의 원뜻은 무엇이고 우리말은 무엇인가를 철저히 고증하면서, 18세기 時俗에서 잘못 사용하 고 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보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두 저작에는 학문 제영역 과 일상에서의 이가환의 철저한 탐구심과 고증적 학문태도가 돋보인다. 아울러 당 대 이루어지고 있는 物名에 관한 문제점과 방향도 읽을 수 있다. 이가환은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물명을 비롯하여 기타 영역에서도 原義를 철저 히 궁구하는 학적 자세가 필요하며, 절대 오류를 답습하거나 견강부회를 하는 식의 학습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물명이나 기타 한자어 연구는 단 순 물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영위하는 예절과 교양이면서 국가의 경영 곧 백성들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가환이 제기했던 이 같은 문제의식과 방향은 비단 物名 분야에 국한된 문제일 뿐 아니라, 학문 제반 영역에서 궁구해야할 자세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정헌쇄록』과 「잡설」 은 1795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丁若鏞의 『竹欄物名考』(19C)․李學逵의 『物名類解』(19C)․柳僖의 『物名攷』(1824年) 등의 저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곧 이가환은 1801년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신과 학문은 그의 조카 이학규․후배 정약용 등에 이어져 조선후기 실학의 또 다른 지류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9,500원
        2.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바그너의 총체예술 개념에서부터 정보예술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총체정보예술 개 념의 구성적인 틀과 그 특징을 도출하고, 현대 무용사례인 윌리엄 포사이드의 <Synchronous Objects for One Flat Thing, Reproduced>(2009)를 논의대상으로 작품 속에 드러나는 총체예술적 속성과 매체미학적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포사이드의 작품은 2000년도 그가 무대버전으로 창작한 것을 온라인상의 정보예술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으로 무용수의 춤추는 신체 없이도 신체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포사이드의‘안무 오 브제’개념을 예증해주는 작품이다. 총체정보예술로서 포사이드의 작품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의 매체미학적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첫째, 작품 속에서 실현되는 춤 움직임의 데이터화는 모션캡처와 같은 동작감지기술이 단순한 춤의 양적 외형적 데이터를 추출해내는 것과 달리 춤에 내재된 비가시적 요소 특히 질적인 속 성을 드러내며 춤에 내재된 안무적 사고와 지식의 영역을 가시화한다. 둘째, 디지털화된 춤 정보는 형태적으로 매우 무관해 보이는 20가지의 시각적 오브제로 표현 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춤 정보로부터 발생된 동기발생물이다. 셋째, 웹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서 춤의 선형적 전개방식을 해체하고 관객은 예술가가 정해 놓은 느슨한 의미의 틀 안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완성해 나아간다. 넷째, 네트워크망을 기반으로 전통적인 관조적 예술감상 방식에서 분석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몰입한다. 종결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감각적 형태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고 창조해 가는 생태학의 논리가 발견된다. 다섯째, 총체정보예술로서 포사이드의 작품은 단순히 춤 데이터의 재생산이 아닌 춤을 중심으 로 하는 새로운 매체작품의 탄생과 예술의 통합을 주도한다.
        5,700원
        3.
        200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s of this study are to explore firstly two teachers’ EFL writing classrooms at a university in Korea and secondly students’ perceptions on their teachers’ classroom-based teaching for EFL writing in the same social and institutional context. The classroom interactions focus on rules of processes and teaching and learning of writing. The data comprise classroom observations of two EFL writing classrooms and interviews with both teachers and students. The findings indicate that the two teachers show a big contrast in terms of their writing practices. One teacher embodied the textbook with traditional approach and adopted translation activity whereas the other teacher tried to have creative self-expression approach with the textbook and workshop activity. The students tended to adopt classroom-based writing practices that might suit their purposes or goals in learning of writing in English. The findings provide an in depth understanding of the teaching and learning of writing, the role of teachers, and students’ purposes in EFL writing classrooms. It also suggests that the teacher needs to consider students perceptions by actively talking about relevant issues.
        5,800원
        4.
        1997.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900원
        5.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895년 미국 북침례교 계통의 클라렌돈가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 내에서 개인의 후원으로 설립된 초교파 선교단체인 엘라씽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 이다. 본 연구가 갖는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 다음과 같다. 첫째, 엘라씽기 념선교회의 한국선교는 교파 선교회가 아닌, 한 개인의 헌신에 의해 설립 된 소규모 초교파 선교단체가 태평양을 건너 먼 이국땅 한국에서 선교의 열매를 맺은 첫 사례라는데 있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1884년부터 시작 됐는데, 주로 교파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4개의 장로 회 선교부(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빅토리아장로회선교회, 캐나다장로회) 와 2개의 미국 감리회 선교부(북감리교, 남감리교), 영국성공회가 그것이 다. 한편,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의 후원에 의한 독립선교사들도 속속 내한 하였다. 1888년에 입국한 게일(J. S. Gale)은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 (YMCA) 후원을 받았으나 1891년 미북장로회로 이적하였다. 게일과 함께 입국한 하크니스(R. Harkness)는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을 받았으나 1889년 6월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인해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 다. 1889년 펜윅(M. C. Fenwick)은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으로 내한 했으나 1893년에 귀국하였고, 1890년에 입국한 하디(R. A. Hardie)도 토론 토의과대학 기독청년회(YMCA) 후원으로 내한했지만 1898년에 미남감리 회로 소속을 옮겼다. 1893년에 입국한 매켄지(W. J. Mackenzie) 역시 캐나 다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으나 1895년 일사병과 신열(身熱)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권총 자살함으로 막을 내렸다. 이처럼 초기에 내한했던 초교파 선교사들은 교파선교사로 이적하거나 귀국 또는 단명함으로 뚜렷한 선교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엘라씽기념선교회는 약 6년간 한국선교를 지 속하여 교회설립이라는 놀라운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둘째, 엘라씽기념선교회는 당시 선교지 분할정책 속에서 선교의 사각지 대를 잘 인식하여 선교를 시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선교지 분할정책은 한국교회사에서 그 명암이 뚜렷할 정도로 공헌과 한계가 분명하다. 선교사 간에 불필요한 마찰 해소하고, 선교의 재정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는 데는 공헌했으나, 30년 이상 이것이 한반도에 적용되므로 인해 선교회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고, 지역성이 더해져 교권분쟁과 교파분열의 단 초가 되었다는 비판은 면할 길이 없다. 폴링의 충청도 선교는 남장로회의 전라도 선교 집중으로 인한 선교 사각지대를 효과적으로 접근했다는데 의 미가 있다. 처음부터 오지선교를 추구했던 엘라씽기념선교회 선교의 빛이 난다. 교파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면서도 선교의 불모지에 복음을 전 했다는 것은 선교의 후발주자로서 매우 바람직한 선교전략이 아닐 수 없 다. 물론 약 6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 아쉽지만, 그래도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수고와 헌신은 헛되지 않았고, 훗날 펜윅에게 인계되어 한국 침례교회 형 성의 중요한 토대요 모판이 되었음을 감안할 때, 엘라씽기념선교회의 활동 은 재인식되어야 하고,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