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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원도 영동지역의 수많은 산성들 가운데 문헌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논증과 함께 고고자료들을 분석하여 신라~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8곳의 산성을 추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고고학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역사적인 실상에도 접근 할 수 있었다. 우선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단위인 주-군-현마다 산성들이 있었고, 산성의 규모도 행정 구역 단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주(州) 단위는 1,000m 이상이며, 현(縣) 단위는 200~600m 정도로 구분된다. 또한 일찍이 설치된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산성(州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복식(山腹式)의 토성이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현 단위의 산성(縣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정식(山頂式)의 토성이 많았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북진기 이 전에 축조한 산성의 성벽은 토루에 돌을 피복하는 공통점도 보였다. 특히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은 바닷가의 곶[산]에 석호나 강을 끼고 입지 하고 있는데, 이들 산성이 신라의 동해안 연안항해와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시기에는 이들 산성이 다소 내륙으로 들어가 산의 정상부에 입지 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진흥왕 북진기부터 통일전쟁기에는 그 입지의 변화가 잘 나타난다. 나아가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의 존재는『삼국사기』에서 실직(城)과 하슬라(城主) 등과 함께 나오는 사료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아울러 삼척 오화리산성은 북해(北海)의 제장(祭場)인 비례산(非禮山)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비교적 확실한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들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가 있는데, 앞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사와 신라고 고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3,200원
        4.
        2015.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넓은 수면의 원지를 중심으로 한 궁원으로 추정된다. 원지는 입수부, 연못, 출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입수부는 독자적인 특징을 보이는 수경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본 연구는 월지 입수부의 수경에 대한 디자인수법을 밝힘으로써 통일신라시대의 궁원을 이해하고 원지조영에 대한 작법의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으로 동궁과 월지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발굴조사의 내용과 복원된 수경시설에 대한 조사와 분석 을 통하여 입수부에 대한 수경 디자인수법을 도출한다. 원지의 입수부는 직선형수로, 석조, 소지, 계류형수로, 폭포로 구성되어 다채로운 수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각각의 디 자인 수법은 다음과 같다. 기하학적인 인공형태의 직선형수로는 수로의 초입부에서 직각으로 수류방향을 바꾸는 굴절점 을 세 차례 반복하는 선형을 보이는데 이는 건축물의 축선을 따른 것으로 건축물의 세력권에 영향을 받은 형태의 디자인 수법으로 볼 수 있다. 상하로 연결된 2단 석조는 물을 담은 큰 그릇으로써의 이용을 고려한 것으로 상하의 단차에 의한 물의 약동은 시각 및 청각적인 효과를 위한 디자인수법이다. 또한 석조 주위의 판석과 외연벽석으로 형성된 한정된 공간 은 가장 가까이에서 물을 접할 수 있는 친수공간으로 디자인된 수경공간이다. 완만한 곡선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소지는 호안의 축조와 바닥처리 및 경석의 배치에 있어서 독자적인 디자인 수법을 보이며, 기능적으로는 폭포수의 일정 한 수량공급을 위한 저수지의 역할을 한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계류형 수로는 직선형 수로와 대비되는 디자 인으로 호안을 축조하는 방식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수법을 보여준다. 입수부의 마지막 단계로서 극단적 인 시각적 변화를 보여주는 폭포는 수로와 원지의 단차를 해결하는 디자인수법으로 사용되었으며, 위치설정에 있어서 완전노출을 피하여 흥미를 유발시키는 고차원의 수법이 적용되었다. 다섯 단계로 구성된 다채로운 입수부의 수경시설은 근접한 건축물의 영향을 받는 직선형의 인공적 디자인의 수경수법 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디자인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수경시설의 디자 인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4,300원
        6.
        2015.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통일신라의 명주와 삼척군에 대하여 󰡔삼국사기󰡕 기사를 토대로 기본적인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명주의 지명은 고구려의 하슬라에서 신라의 하서아=하서량으로 변해 갔으며, 문무왕부터 경덕왕에 이르는 시기에는 하서(주)의 지명이 사용되었다. 이후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을 거쳐 명주가 등장하였으며,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명주와 오랜 지명인 하슬라가 함께 사용되다가 신라말 고려초를 경과하면서 명주가 우세해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주치인 명주의 영현들 가운데 정선현과 속(동)제현의 입지를 태백산맥을 넘어 영동지역으로 진출하는 교통로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리지의 명주 군현들의 입지를 검토하면서 지리적인 입지에서 약간의 의문을 남기고 있는 곡성군과 녹무현의 입지적 배경을 검터하였다. 이들 군현은 경상북도 내륙지방에 위치하였는데, 이를 왕경의 방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였다. 신라는 통일 후 왕경을 중심으로 한 지방사회의 재편성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왕경으로 연결되는 주요 간선교통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9주 체제 내에서 운영되었던 10정의 설치가 교통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결과 곡성군과 녹무현의 입지가 결정된 것으로 보았다. 삼척군은 명주와 더불어 통일 이전 동해안 지역의 핵심 거점이었다. 이러한 사 실은 주치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하슬라와 실직(삼척)으로 이치되는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무열왕대 설치된 북진(北鎭)은 하슬라(명주)지역의 해 상 방어를 위한 해군기지로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삼척지방에서는 중고기 북쪽 경계지역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중대의 사해 제사가 열리기도 했지만, 통일 이후 고구려고지 방면으로의 국경의 확장과 주치가 명주로 고정되면서 동해 안의 핵심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잃어 갔다. 이어서 하대의 전란 속에서 읍세가 위축되면서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4개의 영현 가운데 3개의 영현이 미상 지명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7,800원
        7.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먼저 문무좵신문왕대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주좵소경의 성을 구체적으로 비정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漢山州晝長城,國原城(옛 薍長城)은 각각 남한산성과 대림산성에 비정할 수 있었고, 신문왕대에 축조된 주좵소경의 성 역시 평지 시가지 인근의 산성으로 파악하였다. 이들은 입지와 규모로 보았을 때 삼국 시대에는 거의 요구되지 않았던 지방 도시 거주 지배층의 피난성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성벽의 양상은 오히려 기존의 거점성에 비하여 정연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따라서 이 시기 성벽 축조의 표준을 보여주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한편 소경의 중심 지역에 나타나는 평지 토성은 신라 말이나 대체로 고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통일기의 坊구획과 잘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무의미해진 시점에, 상시적인 방어 시설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한산주 주장성이나 국원성(옛 완장성)은 실제로 한산주 및 국원소경에 거주하고 있었던 왕경인들의 장기적인 입보처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다시 평지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정비되었을 것인데, 한산주의 경우에는 8세기에 들어 기존의 거점성인 이성산성이 새로이 정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국원소경의 경우에는 현 충주시내에 새로운 시가지가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한산주에서는 9세기에 들어 이성산성보다는 다시 남한산성이 활성화되는 양상이 나타나며, 그보다 늦은 시기에 국원소경에서는 평지 시가지를 둘러싼 부정형의 토성이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5,700원
        8.
        2009.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understranding the essence of the Korea traditional Architecture, it is important to consider the jointing methods of architectural members, architectural technologies, etc. Especiall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understanding on the Jointing Method of Wooden Members in the period of Unified Silla Architecture. It's conclusion is summarized as follows. 1. A section of column has very close to do with the foundation stone. The structures of foundation stone and column are generally concluded by butt joint, arrow-head joint, housed joint by Grang-e method. Judu is structured by arrow-head joint. And, in general, beam is structured by Sagaematchum Chumcha and sagaljudu of Dori direction. At the head of Pyungju and the body of Goju, Changbang is structed by Jangbumachum with arrow-head joint or by jumukchang- machum. Also, it is surmised that Gyisoseum and Anssolim methods had been applied to columns from former ages. The example can be found at Bagjae Mireuksaji stone pagoda. Bagjae Mireuksaji stone pagoda taking wooden-pagoda form adopts Gyisoseum and Anssolim methods. We can also find such a sort of methods from other stone constructions like Budo, etc. 2. Injahwaban is structured by short Changbumachum with arrowed-head joint at upper members, and by Anjangmachum at the lower part. This sort of Gongpo style can be seen in the mural painting of tomb of Koguryo and in Buplyungsa, Buplyunsa, Bupkisa-located in Japan, which are influenced by Bakjae or Unified Silla. It is considered that at the end of the late United Silla, Injawhaban had been replaced with Chumcha and Soro on the Pyungbang under influence of Dapo style from China.
        6,000원
        9.
        200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s examine the scales applied to buildings in the age of Unified Silla through construction sites excavated and its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scales used in the age of Unified Silla were varied like Jucheok, Dangcheok and Hancheok, but it was generally accepted that Dangcheok was used in Yeongjocheok Since it was found that the scales applied to Dabotap at the Bulguksa temple and main building of the Gameunsa temple belonged to Goguryeo, Yeongjocheok scale used early in the age of Unified Silla was transitional and it was thought that Goguryeocheok and Dangcheok were used togethar. Second, according to actual rulers in Korea, china and Japan, the length of Dangcheok(ruler used in Chinese Tang era) mostly belonged to the extent of $29.25cm\;{\sim}\;30.5cm$(central value: 29,71cm). Third, plane features of main building of temple are assumed that it had five rooms in front compartment until the 7th century and then it was diversified to three, five and seven compartment. The size of compartment was same in the scale of front Eokan and Hyeopkan until late 7th century, but since then the dimension of Eokan tended to be wider than Hyeopkan. It was judged that the front Eokan used triple scales like 9, 12, 15, 18 cheok. Fourth, the length of residential structures was 17.5cheok${\sim}$36cheok and Bcheok was commonly used for front side of structure, The length of official structures was 8.4cheok${\sim}$36.3cheok which is similar to residential structures. However it has been confirmed that each of 9cheok, 12cheok, and 15cheok has been used for Eokan and Hyeopkan which gave presumption that triple scales was used for the measure.
        5,100원
        10.
        2020.07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학문 목적 한국어 학습자를 대상으로 CBI를 활용한 한국 역사 문화수업의 방안을 고안하고 실제 방향을 제시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이론적 배경을 통하여 CBI의 특징 및 여러 수업 모델들의 원리와 효과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생각하기–내용 이해하기– 활용하기–마무리하기’ 라는 수업 절차를 구성하고 역사 문화수업의 실제 예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CBI를 활용한 수업 시 언어 교사가 가져야 할 전문 지식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교재 및 활동 개발 등을 제언하였다.
        11.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우리나라 불교수용에 따른 토속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에 의 해 연구되어 왔지만, 山寺의 확산으로 인한 보살주처신앙의 성립 및 그 연관성 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삼국시대 산지 사찰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토속적 산신신앙과의 갈등 및 극복, 그 리고 통일 이후 화엄 신앙의 정착과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보살주처신앙이 우리 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후 불교신앙이 대중화됨에 따라 왕경 근처의 평지에 사 찰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山地에도 사찰이 건립되었고, 이 현상은 지방으로 까지 번져갔다. 그 과정에서 山寺의 승려와 토속의 산신 숭배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갈등의 양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체로 불교신앙이 산신신앙을 압도하였고, 산은 불교신앙 공간으로 탈바꿈해갔다. 통일 이후에도 왕실에 의한 山神祭는 계속되었고, 전국의 名山을 三山‧五岳‧二十四山으로 나누어 大祀‧中祀‧小祀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가 불 교신앙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名山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불교의 기도처를 전국에 확대하였다. 이는 왕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신라불국토 의 염원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화엄신앙의 한 형태인 보살주처신앙을 수용하여 우리나라의 오대산, 천관산, 낙산 등에 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는 불국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발현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 고 그러한 염원이 더욱 확대되면서 산에는 磨崖佛이 새겨지고 새로운 불교설화 가 만들어졌으며, 더 많은 산에 사찰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월 이 흐르면서 산 이름이 사찰명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사찰명이 산 이름으로 바 뀌기도 하면서 산에 불교적 신비성이 가미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