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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봉황문 인문보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가례와 같은 중요한 행 사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보자기로 창덕궁유물로 지정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14점이 소장되어 있다. 인문보引紋袱의 일종 인 봉황문 인문보는 보자기 중앙에 봉황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 을 말한다. 인문보는 채색 물감을 이용하여 보자기 위에 다양 한 문양을 화려하게 그린 보자기이다. 봉황문 인문보 앞면에는 동물문양, 식물문양, 문자문양, 자연 현상문양, 보배문양이 복합적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시문된 문 양에 담긴 복합적인 의미를 분석해본 결과 왕조의 연속성, 자 손 번창, 부귀영화, 무병장수 등을 담아 조선 왕실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표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봉황문 인문에 관련된 고 문헌을 살펴본 결과 왕실에서 사용 하는 인문보의 제작은 왕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 엄격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었다. 아쉬운 점은 왕실의 주요한 행사를 기록한 고 문헌에는 수백 장의 인문보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제작과정에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봉황문 인문보와 관련된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대부분 궁중 보자기를 연구한 학술논문이나 학위논문 속에 일부분으로 다뤄 지고 있다. 본 논문은 이들 선행연구와 궁중 복식 연구, 궁중 문양 등을 연구한 논문과 단행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제공한 봉황문 인문보의 관련 자료와 수장고에서 실물 친견 등을 참고 하여 분석하였다. 봉황문 인문보에 시문된 문양 분석은 발생 배경과 함께 각 문양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였고 색채 분석은 동양 전통 오방색 과 음양오행 원리에 따른 색채의 상징성을 토대로 분석하였다. 표현 기법 연구는 조선시대의 전통 채색 기법을 바탕으로 분석 하였다. 이를 통해 봉황문 인문보에 담긴 수준 높은 조선시대 의 예술적 가치를 증명하였다. 봉황문 인문보의 문양과 색채 및 표현 기법을 분석한 본 논 문이 현대 회화와 공예, 디자인, 건축 등의 다양한 예술 분야에 서 새롭게 재해석되어 활용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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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경복궁은 조선 건국과 함께 창건된 궁궐로 태종, 세 종, 세조를 거치면서 법궁(法宮)으로 위상을 갖췄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를 시작으로 여러 국왕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270 년간 중건하지 못하였다. 경복궁의 공지(空地)에는 내농포(內農圃)가 들어섰으 며, 때에 따라 군사훈련을 하거나 왕실의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소실 이후 경복궁에는 전각터를 비롯하여 궁성(宮城) 과 궁성문(宮城門), 수계(水系)와 천문 관련 시설 등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궁성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로 유지 관리되었다. 궁성문에는 돌을 쌓아 출입을 막았으나, 광화문 동협문에는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별 도의 문을 두어 출입하도록 했다. 경복궁의 수계시설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祈雨)를 위해 정비되었으며, 영조 대에 들어 물이 잘 흐를 수 있 도록 준천(濬川)되었다. 이외에도 간의대(簡儀臺), 소간 의대(小簡儀臺) 등의 천문 관련 시설이 남아 있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이 발견 되어 관상감(觀象監)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광화문 밖에 남아 있던 세조 대 제작된 동종(銅鐘)은 종각을 세워 보 호하였다. 경복궁의 수비와 관리를 위하여 공궐위장(空闕衛將) 과 수궁내관(守宮內官)이 경복궁 내에 위치한 위장소와 수궁에 상주하였으며, 매일 포도청과 삼군문이 경복궁 외부를 순라(巡邏)하였다. 이러한 인력을 통한 관리와 함께 난입과 벌목, 내맥(來脈)의 굴토(掘土)를 금지하는 금령(禁令)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어기는 경우 처벌하였 다. 이러한 경복궁의 관리와 함께 근정전, 사정전, 강녕 전, 경회루 등의 전각터에서는 선대왕의 고사를 바탕으 로 왕실행사가 계속되었다. 현종 대 강녕전 터에서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종묘 부묘(祔廟)를 위한 제주(題柱)가 행해졌으며, 숙종은 경 복궁 신무문 밖에서 행해지는 회맹제(會盟祭)를 위해 경복궁에 친림하였는데, 이러한 회맹제 때 국왕이 경복 궁을 찾는 것은 이후 경종과 영조 대까지 이어졌다. 숙 종은 회맹제 외에도 세조 대 경회루에서 행해진 양로연 (養老宴)의 고사를 따라 노인연(老人宴)을 열었다. 영조는 회맹제를 시작으로 숙빈 최씨 사당의 전배(展 拜)와 관련하여 경복궁에 친림하였다. 이와 함께 경복궁 에서 과거시험을 열었으며, 친잠례(親蠶禮), 진작(進爵), 조참(朝參) 등을 행하였다. 영조 대 친잠단과 문소전 터에 세워진 어필비는 영조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문소전구기비의 경 우 이후 국왕들이 지속적으로 전배하였다. 또 경복궁은 춘당대(春塘臺)와 함께 정시(庭試) 과장(科場)으로 정해 졌기 때문에 철종 때까지 정시가 계속 열렸다. 경복궁 신무문 밖 공지에서도 회맹제(會盟祭)와 군사 의례가 행해졌다. 영조 대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 등의 사묘(祠廟)가 건립되고, 인원황후의 탄생지 인 양정재(養正齋)가 어필 봉안처가 됨에 따라 소란스 럽게 행해진 신조기휘제(新造旗麾祭), 호궤(胡跪) 등의 군사의례는 한양 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 행해졌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기초자료로써 문헌에 기록된 소 실 이전의 경복궁 전각배치와 중건 초기 경복궁 내의 수계와 내맥 등이 반영된 다양한 <경복궁도>가 제작되 었다.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은 경복궁 내부 청소를 시작으로 수계와 내맥이 정비되었다. 우선 경회루지와 후원지를 준척(濬滌)하였으며, 준척에서 나온 흙으로 내맥을 보토 하였다. 이와 함께 경회루지의 제방(堤防)과 첨계(檐階), 섬 등은 개축(改築)되었다. 수로 역시 정비되었는데 기 존에 관리되던 수문은 시설의 변화 없이 단순히 준천만 하였지만 관리되지 못한 수로와 수문은 새롭게 고쳐 쌓 았다. 경복궁 공지를 차지하고 있던 내농포와 궁성 밑 민가 들은 한양 곳곳으로 옮겨졌으며, 어필비각과 위장소와 수궁 역시 훼철되었다. 간의대와 소간의대를 훼철한 후 나온 석재는 경회루 첨계, 건춘문 지대석, 근정전 품계 석 등에 재사용되었으며, 광화문 밖 동종 역시 녹여 향 로와 토수(吐首) 등을 제작하였다. 신무문 북쪽 지역은 중건과 함께 경복궁 후원으로 포 함된다. 이에 따라 육상궁 동쪽에 담장을 쌓으면서 후원 안에 위치하게 된 연호궁은 창의궁(彰義宮)으로 이봉 (移奉)되었으며, 양정재는 영조와 정조의 어필 봉안처로 서 경복궁 후원에 남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궁성과 궁성문, 주요 전각터 등 은 훼철 후 다시 지어졌지만, 그 규모와 배치는 크게 바 뀌지 않았다. 다만 강녕전과 사정전 사이에 행각이 건설 되어 강녕전 전면 좌우 건물의 위치와 명칭에 변화가 있었다. 광화문과 강녕전에는 다른 궁궐과 같이 월대를 새롭게 쌓았으며, 경회루와 근정전, 광화문 월대에는 난 간이 새롭게 세워졌다. 이와 같이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0년간 중건되지 못하였지만,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조직과 법 령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경복궁은 유지관리 되 었다. 이러한 관리를 바탕으로 유지된 경복궁에서는 왕 실행사가 행해졌으며, 이로써 법궁으로서의 상징성이 유지되었다. 문헌과 중건 초기상황이 반영된 <경복궁도>는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의 기초자료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에서 내부를 점유하고 있던 시설들은 훼철되거나 자재로 재 사용되었다. 경복궁 내 남아 있던 전각터를 바탕으로 전 각이 중건되었으며, 경복궁 궁역이 신무문 밖까지 확대 되었다. 중건 경복궁에는 270년간 궁궐 건축 변화가 적 용되었으며, 월대의 난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기도 하였다.
        3.
        2023.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에서는 외래 문물의 유입이 본격화되었던 조선의 개항 이후 한국의 궁궐건축에 유 입되어 공간을 구성하고 장식했던 청(淸)의 공예품들을 파악하고, 이들의 유입 정황과 양식 특성을 고찰하였다. 조선과 청의 무역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의 체결, 기선회사들의 경쟁, 화상(華商)의 활동 등에 의해 1880년대 이후 크게 증가하였으며, 궁궐 에서 사용될 물품들은 중국 상해와 조선의 인천을 잇는 항로를 통해 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1891년 건립된 경복궁 집옥재(集玉齋)는 건축의 재료(벽돌)와 축조법, 기둥과 현판 그리 고 실내 공간의 문과 격단(隔斷) 장식 등에서 중국 건축의 장식 요소들이 반영되었다. 집옥재 는 청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궁궐건축으로써 청의 공예품 유입도 촉진하였을 것으로 판단 된다. 이와 관련하여 현전하는 청의 가구, 도자기, 금속공예품 등을 종합하여 양식 특성을 비 교한 결과 창덕궁에 전하는 중국 가구 일부와 도자기들은 페라나칸(Peranakan)을 대상으로 판매되었던 가구와 법랑자기(琺瑯瓷器)였으며, 청말 광동성(廣東省)을 중심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로 판매되었던 광동 가구와 법랑기였다. 조선의 궁궐에 유입된 청대 공예품들은 19세기 이후 중국의 무역항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던 중국의 미술품 수출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판매 대상과 지역에 따른 독특한 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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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floor of the royal palace was covered with grass mat called ji-ui. Ji-ui was produced by connecting several mats named seokja(席子) and trimming the edge with narrow fabric named seon (縇). The standard manufacturing technique was to connect the shorter sides of the seokjas by overstitching them. A room was covered with either single or multiple ji-uis, depending on the case. In the case of the main and the subsidiary halls (jeong-jeon and pyeon-jeon, respectively) where the king conducted official meetings with the civil servants, multiple ji-uis were laid out to signify the division of space, which reflected the ceremonial aspects of the governing acts. The most essential division was the distinction of yeong-wae(楹外) and yeong-nae(楹內), with the jeon-goju (a tall frontal pillar inside the hall) functioning as the breakpoint. Jeong-jeon was divided into four spaces each covered with one ji-ui: yeong-nae, yeong-wae, and the left and the right sides of the royal seat named jwa-tap(座榻). Pyeon-jeon was covered with three ji-uis that divided the hall into three spaces: yeong-nae, yeong-wae, and hu-twae(後退) (the hind section) where the royal seat was placed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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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explains details on Heungbokjeon during the re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19th century for the first time in 273 years. Hence, the construction of a palace with more than 7,000 Kan(間) made possible in a short stretch of time. Given the fact that its existing architecture was recycled. The antecedent of Heungbokjeon(興福殿) was the Hamiljae(咸一齋) of Changuiggung(彰義宮) which served as the residence of King Yeongjo before he was enthroned. On the other hand, the Changuigung was the outset of Inpyeongwi-gung(寅平尉 宮), which was built for the princesses. During the reign of King Hyojong the princess who got married must depart from the Inpyeongwi-gung. This study corroborated the undertaking of modification of its architecture from being asymmetrical house to symmetrical most primarily the inner part of the palace through the innovation of Changui-gung and the restoration of Hamijae to Heungbokjeon. Hence, it was confirmed that the Heungbokjeon was the only inner part of the palace that was not burned down by the 2 consecutive fires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to be more specific these fire happend on his 10th and 13th year of rule. Consequently, the research process of Gyeongbokgung Heungbokjeon can escalate the possibility of considering not only the re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in the 19th century, as well as the construction of the capital city in the 1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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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 제6세대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개혁개방시기 중국의 새 로운 모습을 조명한다. 중국의 제6세대 감독은 정치이념의 사 회적 흐름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개인의 삶의 역경과 불안정 한 심리상태를 표현하는데 큰 흥미를 보였으며 영화에서는 여 러 인물들의 정서적인 문제를 표현했다. 변혁과정에서 원래 사 회적 약자였던 중국 여성은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며 사 회적 역할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중국 제6세대 감독들의 영화 가운데 상당수의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여 성 캐릭터 묘사가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중국 6세대 감독들은 여성을 하나의 개체로서 욕망을 집중적으로 표현했 고, 여성의 욕망은 영화 속 캐릭터의 정서 표현 및 사랑을 향 한 동경 등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의 독백 및 행동과 분석을 통해 영화 속 여성의 욕망 을 이해할 수 있다. 논문은 제6세대 감독의 <이화원>을 사례 로 들어 영화 속 여성의 욕망을 탐구하고자 한다. 본문은 라캉 의 욕망이론 및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의 이론을 이용하여 영화 속 위홍余紅과 리티李緹두 사람이 변혁의 시기에서 자아 를 추구하고 사랑을 좇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아득함, 권태로움 의 정서를 분석하였다. 중국 제6세대 감독의 영화는 개혁개방 이 중국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거대한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사회적 지위 상승과 함께 소비주의와 성적 해방 사조가 보편화 되며, 여성이 과거의 사회 및 가정에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여성의 ‘욕구’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 개혁개방이 중국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충격을 가 져다주었고, 사회적 지위 상승과 함께 소비주의와 성적 해방 사조가 보편화되며, 여성이 과거의 사회 및 가정에서의 속박에 서 벗어나고, 여성의 ‘욕구’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욕구 위주에서 개체의 욕구 위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유롭게 개 인의 사랑을 추구하는 모습, 여성이 과거 봉건 사회의 수동적 결혼에서 벗어나 자아의식과 자기감정에 기반을 둔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변화를 고취하였다. 심지어 전통적인 결혼 윤리와 사 회 여론에 맞서는 행동까지 불사하였다. 여성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추구는 본질적으로 욕망을 향한 추구이다. 이 과정에서 맹목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따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중국 남성은 사회의 혼돈과 불안을 여성 캐릭터의 불안으로 외부화하고, 타자의 욕망은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채 결국 필연적으로 개체의 비극을 초래한다. 경제와 사회적 지위 의 독립은 일정 정도 여성이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데 도움 을 주었지만, 맹목적인 모습과 사랑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상대 를 기만’하는 현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성의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상태와 부정적 정서는 우리에게 소비주의에서 벗어나고,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시사점을 던져준 다. 그래야만 개체는 비로소 정서적 안정을 취할 수 있으며 진 정한 새 시대의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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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architectural changes that occurred in the main space of Deoksugung Palace based on the 『Deoksugung Wonan』. In the 1910s, constructions in the Deokhongjeon area and Hamnyeongjeon area caused a change in the main space of Deoksugung Palace, which is similar to the change in the central space of Changdeokgung Palace. In both palaces, the space composition, architectural structure, construction equipment, and architectural design of the palace were changed due to the changed architectural organization and construc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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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lthough Changgyeong-gung was devastgated by Japanease invasion in 1592, it was restored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had remembered of early Joseon danasty's architecturural order. It was destroyed several times by fire after that but was rebuilt i㎜edieately. There are Donggol-do and Donggol-dohyeong, so we can fine the change of architectures in Changgyeong-gung. Jibbokheon(集福軒) and Yeongchunheon(迎春軒) are marked in another location and architectures in Donggon-do and Donggon-dohyeong. The reason has been known that it was rebuilt after the fire in 1830.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record of birth of crown prince Sado and movement of coffin of King Jeong-jo in funeral ceremony, it was confirmed that notation of Jibbokheon and Yeongchunhyeon was misprinted. In particular, Yeongchunheon confirmed the possibility that the existing building was built by extending it while applying the asy㎜etrical building with four-purlins structure method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and that it was reconstructed by moving Yeonyeonghap when it was destroyed by fire 1830. And although now Jibbokheon and Yeongchunhyeon(延英閤) are connected, nothern part of Jibbokheon did not burn in the fire, so it was judged that original architectural plan were maintained until now. The current building north of Jibbokheon was built before 1695 (21st year of King Sukjong), which was first identified in the Gunggeolji(宮闕志), a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it may have been a part of Janggyeongmun(長慶門) inner corridor built before 1633. The present building north of Jibbokheon has great architectural significance in that it maintains the structural method of the early Joseon Dynasty which was often applied to buildings with a small scale of inner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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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the historical city center where overall development has not been made, it is not difficult to observe the asp ect of the urban change process over time accumulated. Seochon(西村), which collectively refers to 13 legal dong s in the west of Gyeongbokgung Palace, is also considered a representative historical village with high value as a historical and cultural cityscape because of historical context remains throughout the lot. Therefore, research ex amining the process of changing parcels in this area is useful for a more three-dimensional understanding of the presence of several layers of time. In this study, relationship between the opening time of each road, the river co ver process, and the current building establishment process is examined using maps after the pre-modern period and modern era. In addition, to examine the specific change process of individual lots using the old land register, building management ledger and cadastral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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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king of Joseon Dynasty Jeong-jo commanded the renovation of Seongjeong-gak, once a study for crown prince, to serve as Pyeonjeon(便殿), a main office for kings. The renovated building strictly separated the routes designated for the king and the other officers, respectively. The interior space consisted of Youngnae, reserved for the king and his senior aides, and Youngwae, for lower ranking officers. Youngnae(楹內) and Youngwae(楹 外) corresponded to the two blocks (the space between two columns) on the east and west side, respectively. Such structure of Pyeonjeon was heavily transformed over several occasions beginning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 Youngwae was subdivided into separate spaces, and the routes for the king and the officers became indistinguish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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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focuses on the 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seco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which has been spotlighted for political and economic history. The author analyzed the contents of wood procurement with the Yeonggeon Diary, which records each day of construction site.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2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Yeonggeon of Gyeongbokgung Palace, was a new building that reflected the old system and 270 years of changed environment on the existing site. Despite the poor economic conditions, it began with years of effort and voluntary volunteer work and dedication. Second, the priority of timber transport was recruiting people in the whole process and the supply and demand of transportation tools. Carrying lumber from the mountains to the riverside and floating it at the right time were all a matter of manpower. Soldiers and carts were used to carry timber that arrived in Hangang River to the construction site. The cart was a consumable product, so it was necessary to continuously use the wood to make cart at the site. Third, fire and flood were the biggest obstacles to the Yeonggeon schedule of Gyeongbokgung Palace. Especially the fire was fatal. It was difficult to extinguish the fire in temporary structure, where was the storage for wood to construct. These disasters greatly affected the construction cost and construction period. Wood procurements of Gyeongbokgung Palace were based on public offerings. At the same time, recycled materials from other palace wood and nearby houses, nationwide buying of private mountain wood, the logging of royal tombs and some of the buildings of Gyeonghui Palace and Changgyeong Palace were reloc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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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wood joinery technique in the ancient era. Joinery is one of the core techniques in constructing timber frame architecture in the Korean peninsula. These techniques can be revealed by examining wooden members of ancient buildings. The members were excavated at the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the historic site in Gyeongju. This study collects the data of 284 members excavated at the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and analyzes the details such as length, thickness, width, joint types, joint shapes. With the result of the analysis, this study tries to indicate the level of wood joinery techniques in ancient buil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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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ttempted to clarify the modern transition process of the urban space through the construction and change of the Imperial Palace as a central facility in Seoul. The road renovation of Seoul, which started in 1895, has established a modern, circular transportation system centered on Gyeongun-gung Palace, the Imperial Palace along with the tram line. In this urban structure, the imperial palace as a central facility of the former monarchy, unlike the previous palaces, could not be located at the top of a road with a longitudinal axis, and it expanded its territory around foreign legionaries and placed a new government office around the perimeter. However, the royal palace was moved to Changdeokgung Palace in 1907 with the throne of Sunjong. With the creation of Changdeokgung, which is the periphery of Seoul, as new royal palace, the status of the imperial palace in the city was remarkably weakened, and Gyeongun-gung, located in the center of Seoul, was also reduced to the current Deoksugung area, turning into an urban facility facing a modern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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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2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examines the transitional situation that can be seen from the palace operation in early Joseon Dynasty. The first decades of Joseon after the nation was founded differ from the Joseon Dynasty as a whole, but rather similar with the Goryeo Dynasty. By examining “The History of Goryeo(高麗史),” it showed that palace operation during the Goryeo Dynasy was marked by the fact that a separate palace was built and resided in despite the existence of the Bongweol(本闕, main palace) as the central palace. The separation of the parent’s generation and the children’s generation was shown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one’s own palace. Such trait of Goryeo affected palace construction directly after the founding of Joseon. This can be shown from the characteristic of palace operation by generation. The construction of the Changdeokgung Palace(昌德宮) of King Taejong, as his own palace, is an example. Afterwards, the palace system of Joseon was established, and the space of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was merged through ritual reform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However, the space for the parents of the king were considered separate, and this influence continued to the reign of King Seongjong. The construction of Changgyeonggung Palace(昌慶宮)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is an event where the king proclaimed the separation with his mother and grand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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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alace byeoljeon(別殿), the King’s non-ceremonial space, were created as a space for the king to comfortably use and for the king to do what he wanted to do. The byeoljeon housed various types of spaces and were flexible in that they could be repurposed to meet the demands of the times. Nevertheless, their characteristic as palatial building created for the King’s convenience has remained unchanged. In this study, we examine the process by which such royal spaces were created by focusing on the reconstruction of the Changdeokgung Huijeongdang during Japanese occupation period, with a view to continuity and the transformation process. The reconstruction of Huijeongdang at the time may be considered along internal and external characteristics. Internally, Huijeongdang connected the symbolism of the king’s space as the palace byeoljeon. Externally, Huijeongdang is characterized by its mixture of traditional and western style, where western style structures were housed within traditional buildings. The plans for the block of Huijeongdang also included the coexistence of traditional building, western style building, and mixture of traditional and western style building. This reflects the characteristic continuity of the byeoljeon as well as the architectural techniques of the time, manifested together within a specific spatial 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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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Seonjeong-jeon, the semi-great hall in Changdeok Palace, was constructed in a highly formal and conservative style and accommodated official ceremonies. However, the contemporary modification of the building has distorted or eliminated features including the two side doors on the front, the floor coverings, and the throne base (Jwa-tap) that consisted the most significant part of the throne. Seonjeong-jeon originally had three doors that stood between each pair of columns on the front side, respectively. The courtiers accessed the building through the side doors, while the central door was exclusively designated for the king. However, the renovation in 1999 ignored the political context of the architectural form of the building and changed the side doors into windows, damaging the traditional structure inherited from the early Joseon Dynasty. Although the building currently has traditional wooden floor structure (Woomul-maru), it was originally covered with square brick tiles (Bang-jeon) before the Japanese occupation, following the customs of early Joseon Dynasty. The throne was placed to the north of the central door and consisted of the throne base and a decorative roof (Dang-ga). A canvas (Jang-ja), which featured the royal symbolic painting of Sun, Moon, and Five Peaks, was also installed between the two columns that connected the base and the roof. Nevertheless, only the columns and the blank canvas remain nowadays after the removal of the 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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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01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 major performance stage carpenter, Jang Insang led performance stages from the 1719 Sukjong Royal Banquet and was confirmed by historical records to be the first craftsman. Lee Wandeuk led the Hwaseong Fortress performance stages of the Jeongjo period and Gichuk Jinchan performance stages of the Sunjo period. The carpenter techniques he used during the Jeongjo period were succeeded to the Sunjo period. Ahn Sungil was the head craftsman who led the performance stages of Jagyeongjeon Jinjak, Muja Jinjak, and Gichuk Jinchan of the Sujo period, under which the foundation for court palace performances was laid. The progression of major carpenters includes Jang Insang of the Sukjong period, Jeon Yoochu of the Yeongjo period, Ahn Sugil of the Sunjo period, Yoon Seoksin of the Heonjong period, Kim Yoonsik of the Gojong period, Lee Jongyoon, Kim Soongil, Seo Sangmook, and Han Sujoon. In addition, the Major Repair of Injeongjeon Hall (1857) of the Cheoljong period was the most important palace construction project for transferring the carpenters’skills. Through this project, Ahn Sungil of the Sunjo period, Kim Myeonggap, Yoon Seoksin of the Heonjong period, Kwon Deuknyang, and Kim Sungil of the Gojong period were able to interact with each other. That is, this major repair project of Injeongjeon Hall reflected the major carpenters’best techniques through performance stage construction, showing the progression of Ahn Sungil, Yoon Seokshin, and Kim Sungil, who led the constructions of Gichuk Jinchan of the Sunjo period (1829), Mushin Jinchan of the Heonjong period (1848), and Jeonghae Jinchan of the Gojong period (1887), the most impressive performance stages of the late Joseon period. The carpenters of the court performance stages participated in important construction projects of the royal palace, reflecting the superior technical skills of the carpenters in the construction of court palace performance stages. The carpenters who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construction of performance stages were able to interact with one another and transfer their excellent technical skills, providing the driving force that allowed court performance stages to blossom into splendid and high-quality court stag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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