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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이 자리 잡기 이전, 곧 조선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던 지리산유람록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기다려 100여 편이나 등장했다. 그리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을 남기는 전통 또한 사라졌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하나의 물음을 떠올린다. 유람록의 주체이자 성리학을 이념적 토대로 삼았던 선비, 그들은 도대체 왜 지리산 유람 길을 떠났고 수많은 유람록을 남겼을까? 이 글은 이 물음에 대해 배움과 휴식 그리고 선현을 닮기 위한 노력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선비들이 유람을 떠난 동기를 찾아보고, 그것이 어떻게 넓게는 유학 그리고 좁게는 성리학과 연결되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선비들의 유람은 한편으로 일상의 배움을 이어서 세상을 읽어가는 또 다른 형태의 배움을 위한 길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긴장을 해소하는 휴식의 길이었다. 그리고 긴장과 이완이라는 두 가지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비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선현들과 닮은 모습, 곧 자신이 현인 혹은 그와 같은 인격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선비들에게 긴장과 이완, 배움과 휴식이 둘이 아니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선현을 닮아가는 것 역시 또 다른 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유람은 선비들에게 세상을 읽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세상 읽기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가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더욱 충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과 함께 유람록의 전통이 세워지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의 전통 역시 사라지는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선비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들이 세상을 읽던 방식 역시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2.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江右 지역에 유행처럼 일었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을 중심으로 강우지식인의 의식세계를 살펴 본 것이다. 존주의식은 임진란 이후부터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던 지성사의 한 중심축이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이에 매몰되어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족쇄였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19세기까지도 조선사회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중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이 지방에 끼친 영향의 상관성 연구가 전무했었는데, 본고가 강우지역의 세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 시기 강우지역에는 수많은 학자가 활동하였고, 그들은 여전히 명나라 毅宗의 ‘崇禎’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편적인 현상만으로도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라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전도 치욕 이후 형성된 북벌론 또는 대명의리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당대의 시대논리로 변모해 왔듯, 이 시기 강우지식인들도 자기 시대의 논리에 맞게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예컨대 남평문씨 가문의 大明花 현양과 朴震英 추숭으로 인해 강우지역에 일었던 존주의식 현창 활동은, 오랜 기간 소외되어 있던 지방사족이 顯祖를 선양하고 가문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절박함에 의해 도출된 그들 나름의 명분이었다. 鄭蘊과 朴明榑를 통해 某里나 弄月亭에서 갈구했던 지식인의 自意識 또한 그 시대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었다. 한말에 몰아닥친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야욕, 이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전통유학의 봉건적 질서 등 내우외환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이 시기에 정온 등의 춘추대의 정신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강우지역의 존주의식 현창 양상은 강우학자들이 당대 지식인으로서 자기 시대를 헤쳐 나가는 최선의 선택이자 기회였던 것이다.
        23.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임진년(1592) 오월 진주성 촉석루에서 김성일, 조종도, 이로(혹은 곽재우)가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건과 관련되어 지어진 시에 관해 언급한 여러 기록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삼장사에 관한 사적을 기록한 글로는 「從遊諸賢錄」(성여신 찬), 「鶴峯言行錄」(최현 찬), 「矗石樓詩懸板」(오숙 찬), 「大笑軒事蹟畧閭表碑」(찬자 미상), 「矗石樓詩註」(김응조 찬), 「大笑軒行狀」(한몽삼 찬), 「請祠祀三壯士疏」(하세응 찬), 「鶴峯年譜」(이재 찬), 「松巖李先生行狀」(조선적 찬) 정도가 『용사일기』가 印刊되기 이전의 기록으로 살펴진다. 이들 자료에는 대부분 삼장사시의 지은이를 김성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시의 작자를 다른 사람인 것으로 기술한 경우도 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시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다. 1762년 간행된 이로의 『용사일기』는 동일 저자가 지은 「문수지」와는 달리 삼장사시의 작자가 김성일이고, 그와 함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을 조종도와 이로로 기술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 사후 백수십 년이 지난 뒤 이 책이 출간된 배경에는 삼장사 사당의 건립과 관련해서 현실적인 이해 관계가 문중 간에 얽혀 있었다. 인간된 『용사일기』는 이로가 찬한 원래의 초본에 적지않은 첨삭이 가해졌기에 출간 당시부터 문제가 되었으나, 『용사일기』의 출간에 뒤이어 한몽삼의 글이 수록된 『대소헌문집』이 간행되어 이-삼장사설을 뒷받침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현풍 곽문에서는 『망우집』을 중간하여 곽-삼장사설을 주장하게 되면서 이후 양측의 주장이 심각히 대립하였다. 『망우집』의 발간으로 점화된 삼장사 시비에 관여하여 가장 정밀한 수준에서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적으로 밝힌 이는 대산 이상정이었다. 이상정이 찬한 『촉석루시사적』은 학봉이 초유사로 함양에 도임한 때로부터 이후 진주성에서 촉석루시를 짓기까지 『용사일기』의 기록을 위주로 김성일, 조종도, 이로, 곽재우 4인의 행적을 발췌해서 정리하고, 이에 대해 이상정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여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한 내용이다. 이상정은 무엇보다도 촉석루시의 작성 시점이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온 직후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왔을 때 곽재우는 이미 진주를 떠나 의령으로 돌아와 있었으며, 대신에 이로가 진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촉석루시사적』의 간행 이후 촉석루 삼장사에 관해서는 이-삼장사설이 통설의 지위를 차지한 듯이 보인다. 이후에도 삼장사 사적에 관한 이견(異見)이 간간히 표출되었으나 마침내 근년에 진주성에 삼장사 비를 세우면서 이-삼장사설의 내용이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의 비면에 새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촉석루 삼장사시는 김성일이 지었고, 당시 시를 짓는 현장에는 조종도와 이로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실효적 사실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24.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은 南冥 曺植의 학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南冥學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圖說이다. 그런데 后山 許愈가 「神明 舍圖銘或問」을 지어 이것에 관한 해석 작업을 시도하기 이전까지 300년 동안 은 어느 누구도 그 내용과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后山은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어 南冥의 「神明舍圖銘」을 상세히 해석하고 그 것이 가지는 유학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神明舍圖銘」에 南冥의 心學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南冥의 「神明舍圖銘」에 대한 주해 작업을 경상우도 학자들의 공적 안건으로 발의함으로써, 南冥의 학문과 수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南冥學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神明舍圖銘或問」은 后山의 개인적 저술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慶 尙右道의 학자들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남명학을 조명하는 촉발점 이 되었으며, 그 작업에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25.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노사학파가 19세기 후반 영남 서부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문인 정재규의 역할을 분석한 것이다. 노사 기정진은 1840년 대부터 서학을 배척하고 의리와 도덕의 확산을 꾀하였던 산림학자로서 중앙정 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850년대에는 영남의 노론학자들로부터 동방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받들어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기정진의 일족이나 문인들도 세도정치기와 대원군 집권기에 점차 중앙정계와 향촌사회 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19세기 이래 영남 서부지역에서 당색의 대립이 약화되고 다른 당파나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당시 영남 서부의 노사학파는 남인 출신도 있었었지만 대체로 노론 위주의 인 물들이었으며, 새롭게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통해 가문을 일으키려 는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방관과 협조하여 향 약 실시나 󰡔소학󰡕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강학활동에 힘써 영남 서부 지역에 많 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정여창과 조식을 숭앙하는 기풍이 강한 이곳에서 이들을 모신 서원이나 사우의 향례에 참여하거나 강회를 자주 개최하 여 진주와 하동․산청․합천․의령 일대의 영남지역에 노사학파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넓혀 나갔다. 이러한 영남지역에서의 노사학파의 성장은 특히 정재규의 노력에 힘입은 바 가 컸다. 정재규는 기정진 사후 적극적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하여 영남지역 내 에서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동문이나 문인들과 자주 강회를 열어 성 리학과 예학을 강론함으로서 기정진의 주리론이 널리 보급되고 위정척사의 주 지가 훼손되지 않게 하였다. 그는 또한 기정진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답문류편(答問類 編)󰡕을 편찬하였으며, 1901년 기정진의 문집을 목판본으로 중간했을 때에도 단 성의 신안정사에서 직접 일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문집 간행 이후 기정진의 논 설인 「외필(猥筆)」이나 「납량사의(納凉私議)」등에 대해 영남지역의 노론이나 송병선, 송병순, 전우 등이 이단으로 배격하였을 때, 정재규는 동문과 문인들에 게 기정진의 학설을 변호하게 하였으며, 본인도 직접 논서를 지어 기정진의 주 리론이 결코 주희나 이이의 학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재규는 영남지역에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일으켜 기정진의 위 정척사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는 1881년 신사척사운동에 가담하고 1895년에 서부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개화에 반대하고 일제의 침략 에 항거하였다. 이어 그는 1905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민 심의 결집을 주장하고 의병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그는 자신을 따르는 문인 들과 함께 1905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충청도의 최익현과 전라도의 기우 만과 함께 각지에 포고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으기 위해 문인들을 유생들에게 파견하였다. 비록 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의병이 제대로 모이지 않은 상태 에서 실패하였지만 의리를 중시하는 영남지역 노사학파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6.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時代 학계의 양대산맥이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독서와 講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실천위주의 선비였고, 이런 학풍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南冥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義兵을 일으켜 나라 를 위해 싸워 나라를 구출해 내었다. 이런 공훈으로 인하여 宣祖의 신임을 받아 조정에 발탁되게 되었고, 光海朝에는 大北政權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 무 자신들 위주로 정치를 해 나가고 반대당을 철저하게 배척한 관계로 1623년 仁祖反正을 맞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大北派는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 당 하였고, 南冥學派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仁祖反正 이후 새로 결성된 南人들은, 본래의 南人에다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몰락한 北人일부가 새로 편입한 것이다. 이들 남인은, 서울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서 西人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여 官職에도 나갔으므로 嶺南南人을 포함 한 전체 南人을 주도하였고, 많은 학자 문인들이 나왔다. 이들을 특별히 近畿南 人學派라 일컫는다. 이들은 退溪學派의 한 갈래로서 寒岡 鄭逑의 제자인 眉叟 許穆을 통해서 近畿 地域에 退溪學脈을 전파시켰다. 이들은 줄곧 嶺南에 근거를 둔 南人들과 활발 하게 교류를 했다. 이 近畿南人學者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龍洲 趙絅, 眉叟 許穆, 星湖 李瀷, 順 菴 安鼎福, 樊巖 蔡濟恭, 性齋 許傳 등이 近畿南人學派의 學統을 이어왔다. 이들 은 退溪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實學과 접목시켜 독특한 학문을 형성하였다. 이들 近畿南人학자들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들의 의도적인 집요한 南冥 貶下 의 상황에서, 南冥을 옹호하고 南冥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 다. 그들은 비록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가 退溪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南冥學 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英祖朝의 星 湖 李瀷, 正祖朝의 樊巖 蔡濟恭과 朝鮮末期의 性齋 許傳 등은 南冥의 位相을 提 高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오늘날 南冥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 분의 학자가 노력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27.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주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남긴 지리산 한시를 통하여 지라산에 대한 그들의 사상적 인식이 어떻게 드러나 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비록 유학자 내지는 유학척 교양과 식견,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시이가는 하지만, 그들이 지리산과 관련지어 말한 사상의 폭은 외 형적으록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나 보였다. 하지만 이면적인 성격을 살펴보면 이들 의 유가척 안식도 매우 폭이 좁고, 불교나 도교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자신틀의 편의에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가적인 인식은 ‘존현’ 정신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도가적 인식은 ‘유선’ 사상 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불가적 인식은 ‘향도’ 의식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민간신 앙적 인식은 ‘불배’ 의지로 특정지을 수 있다. 이들이 지리산을 가는 동안, 그리고 지리산 위에서 보고 겪은 것에 지리산에 대 한 인식이 다양하게 드려나 었는데, 지리산을 다녀온 뒤의 생각에도 또한 유가적인 생각을 바탕으후 한 감회를 피력한 것이 많다. 지리산에 오르거나 다녀오니 현 설의 막힌 것 흑은 물든 것이 터지거나 씻어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한마디로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것 같다고도 하였으나, 이들이 현실로 돌아올 때의 사상적 지향 점은 역시 유가로 선회하고 었음을 볼수있다. 유학적 현실에 담갔던 몸을 빼어 지리산으로 향함에 그것에 대한 인식이 유불도 및 민간신앙에까지 미쳤지만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다시 현실로 돌 아옴에 유가적 본연으로 회귀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신선세계의 하나로 일컬어 지고 하고, 가장 많은 절을 안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 민간신앙의 대상이 자리잡고 았는 지리산을 읊은 사대부들의 한시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그것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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